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선배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과 친한 지인의 아들 이름이 김재준(가명)인데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성적도 떨어지고 있어서 걱정인 데다가 집에서는 “예”, “아니오”라는 말만 해서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참 답답하다고 대신 좀 알아봐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침 그 학생이 있는 학급을 내가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다가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했다.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진 아이는 수업태도가 좋은 편이었지만 역시나 내가 묻는 말에 단답형으로 대답만 할 정도로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얼굴 표정이나 말하는 태도에서 자신감이 많이 결여돼 보였다.
담임 선생님께 아이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말하셨다.
“재준이 아빠가 ㅇㅇ중학교 국어교사인데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라 잘 알아. 아빠가 좀 엄격한데 그래서 그런지 재준이가 수업 시간에도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것도 안 하려고 해. 내가 남학생 담임만 20년 넘게 하고 있는데 엄격한 아빠 밑에서 자란 남자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자신감이 부족하고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서 하거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고 하는 배포도 좀 없는 것 같아. 아빠가 무뚝뚝한 건 성격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집에서 너무 엄격하게 굴면 남자애들한테는 전혀 좋지 않아. 오히려 망치는 지름길이지.”
나는 그 이후로 아버지의 태도에 따라 아이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부모 둘 다의 양육방식이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어머니의 영향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자라던 1980년대의 아버지는 밖에서 일을 하고 난 뒤 집에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쉬고 집안일이나 아이를 키우는 건 주로 어머니의 몫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대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시대에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던 많은 ‘아들들’이 이제는 자신의 자녀와 친구처럼 지내려고 하는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내 동료 교사들만 보더라도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며, 형부나 내 남편, 심지어 고3 담임만 계속하느라 바쁜 내 남동생까지도 퇴근 후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재준이의 경우처럼 자녀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게 참다운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막상 상담하다 보면 자신은 엄격한 게 아니라 꼭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거라고 말하거나, 심지어는 자녀가 사춘기라서 자신에게 반항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경우도 있다. 딸과 아들에게 대하는 게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아들에게 더 엄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사실, 위에서 아버지들이 말한 내용들이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녀가 유치원생이든 고등학생이든 상관없이 규칙이나 규율을 지키도록 지도하고자 할 때에는 부모와의 긍정적인 관계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부모가 이끄는 방향으로 아이가 잘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러한 긍정적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아이에게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려주려고 하거나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공부하라고 말한다면 자녀는 부모가 올바르게 ‘지도’하는 게 아니라 단지 ‘강요’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재준이 이후로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조차 남 앞에서 제대로 얘기하는 걸 힘들어하는 아이들과 지속적으로 상담을 해 보았다. 그 결과 겉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남학생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많이 어려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면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십 대의 자녀들이 성별에 관계없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학교 생활태도가 좋고 매사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는 삶의 멘토 같은 존재
여기, 7살짜리 한 남자아이가 있다. 이 아이의 엄마는 보통의 집 엄마들처럼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한다. 아이의 아빠는 회사에서 돌아오면 아이와 놀아주다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식을 취한다. 아빠가 회사에서 힘들게 일을 하고 왔기 때문에 집에서 쉬는 것은 당연하다고 아이나 엄마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 아이는 엄마가 식사 준비할 때에도 자신의 아빠가 그러했던 것처럼 텔레비전을 보면서 기다린다. 아이보다 어린 여동생이 오히려 작은 손으로 엄마의 식사 준비를 돕는다.
그런데 이 아이는 단체 생활에 있어서 문제를 보였다. 게임을 할 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다가 교실 구석으로 가버렸다. 한 마디로 다른 친구들을 배려하거나 양보하는 걸 어려워했다. 그리고 창의력 테스트에서 매우 낮은 점수를 보였다.
그러던 중 이 아이는 '양성평등교육'을 받게 된다. 교육을 통해 아이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걸 배우고 나 혼자가 아닌 다른 친구들과 함께 협동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의 부모가 바뀌기 시작했다. 아빠는 아들과 김밥을 만들기도 했고 집에서 온 가족이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변했다. 혼자서만 놀이를 주도하려던 아이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노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난 뒤, 창의력 테스트를 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맨 처음 창의력 테스트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던 이 아이는 굉장히 높은 창의성 테스트 결과를 받았다. 짧은 기간 동안의 교육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모의 변화된 행동으로 인해서 아이가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창의성이 발현되었고, 리더십을 보이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SBS 스페셜 '어떻게 영재가 되는가, 섬세한 아빠 터프한 엄마'에 나온 7살짜리 아이의 위와 같은 변화된 모습을 보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프로그램에서는 강한 남성성을 가진 남자아이들과 강한 여성성을 가진 여자아이들 각각 세 명씩을 선발해서 유아교육자, 창의력, 뇌 과학자로 구성된 전문가들과 함께 양성평등교육을 실시했다. 사실 양성평등교육이라고 해봤자 크게 특이할만한 건 아니었다. 그저, 한 가지 성에 편향되는 놀이가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교육이었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양성성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커리큘럼이었다. 양성평등 교육이 다 끝나고 난 뒤, 이 여섯 명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성 역할의 고정관념이 현저히 낮아졌을 뿐만 아니라 창의력은 월등히 높아져 있다는 것은 예측할 만한 결과였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이러한 창의성이 단지 부모의 작은 변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험에 참여한 남자아이 세 명 중에서 남성성이 너무 심해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데 가장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7살짜리 남자아이는 아빠와 함께 김밥을 만들어 보고 집에서는 아빠가 설거지를 하는 걸 본 것만으로 많은 변화를 보였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내고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짜증을 냈던 그 아이는 교육이 끝나갈 무렵에는 다른 아이를 먼저 배려했을 뿐만 아니라 놀이를 하던 중에 속상해하는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토닥이며 이끄는 등 이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창의성 테스트에서도 다른 다섯 명의 아이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아빠의 작은 변화 때문에 아이가 배려심을 배우게 되었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배우게 된 것이다.
나는 재준이의 어머니와 전화 상담을 하면서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아직 어려서 부모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였던 일곱 살의 아이들과 달리 이미 커 버린 재준이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어머니에게 나는 대니얼 J. 시겔 박사의 책 ‘십 대의 두뇌는 희망이다’에서 읽은 내용을 말해주었다.
“어머니, 재준이처럼 십 대의 아이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면서 반항을 하기도 하는 이유는 바로 뇌의 변화 때문이에요.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뇌의 변화를 통해 어른이 되어 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거든요. 이때 타인과의 긍정적인 인간관계와 자기 성찰을 통해 뇌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부모와의 관계예요. 부모와의 관계가 좋으면 뇌가 올바르게 성장하는데, 만약 부모로부터 양성성의 경험을 하게 되면 배려심과 창의성까지 키워진다고 하니 한번 시도해 볼 만하잖아요?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며칠 뒤 재준이의 엄마는 남편과 함께 프로그램을 찾아서 봤다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그동안 남편은 재준이가 공부 계획을 세우면 작심삼일인 것에 불만이었어요. 교내 대회에 나가서 상장 하나 받아오질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요. 절대 말로 길게 뭐라고 하지 않고, 단지 ”이게 뭐냐?”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실망한 눈초리로 쳐다보거나 뭐 이런 식이었어요. 남편한테 계속 친절하게 대하라고 해도 안 들었는데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남편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아들이 밤늦게 집에 오면 둘이서 같이 라면도 끓여 먹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남편이 학교에서 신생아 모자 뜨기 캠페인을 한다며 뜨개질 거리를 가져왔어요. 나는 바쁘니까 시킬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가 하려고 가져왔다는 거예요. 처음엔 안 믿었죠. 그런데 남편이 퇴근 후에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모자를 뜨기에 저 양반이 왜 저러나 싶었어요. 제가 처음에 하는 방법만 좀 알려줬는데 결국 모자 하나를 다 완성하더라고요. 물론 재준이도 그 모습을 보았죠. 처음에는 아빠가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을 안 보였는데 어느 날엔가 동생 인형을 가져와서 모자 크기도 같이 재보더라고요. 소파에 아빠랑 둘이 앉아서요. 전에는 밥 먹을 때 아빠랑 눈도 안 마주치던 애가 이젠 밤늦게 아빠랑 거의 매일 라면 끓여 먹는 것 때문에 제가 잔소리할 지경이에요.”
그 뒤 재준이는 학교에서 눈에 띌 정도로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전에는 복도를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만 까딱하던 아이가 이제는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건 2학년에 올라가서였다. 어느 날 나에게 아이들 이름이 빼곡히 적힌 메모지를 내밀면서 자기가 영어 독서 동아리를 만들었고 멤버도 다 모집했는데 담당 교사 이름에 내 이름을 써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세 개의 자율 동아리를 담당하고 있어서 더 이상의 동아리를 담당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준이의 부탁에 ‘좋다’라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에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던 재준이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너무나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었던 아이가 단지 아버지의 작은 변화로 인해 이 정도로 변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후로도 학교에서 교우관계가 좋고 남을 잘 배려하면서 학습태도도 좋은 남학생들과 상담을 할 때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남학생들의 대부분이 아버지와 긍정적인 관계를 갖고 있긴 하지만 ‘자상함’과 ‘강인함’이라는 양면의 모습을 아버지로부터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즉, 아들에게 친근하고 친구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아버지와 허물없이 지내다가도 학교생활이나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아버지에게 멘토로서 의지하고 있었는데 그저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고 편하게만 대하는 아버지를 가진 아이들은 그러질 못했다. 주말에 아버지와 신나게 축구를 하고 종종 같이 영화를 볼 정도로 친하게 지내지만 정작 자신의 공부나 교우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있을 때에 아버지는 멘토로서의 역할을 해 주질 못했다. 자상하고 허물없이 친근한 아버지로서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일적인 면에서나 가정에서의 대소사에서 결정권을 갖고 단호하면서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해가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십 대 아들이 이해심 많고 남을 잘 배려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몰두하는 공부습관을 갖길 원하는가? 단체생활을 할 때 남에게 이끌려 가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고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아이에게 옳은 방향으로 가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부모 자신이, 특히 아버지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항상 자상한 존재
보통 담임들은 2학년을 맡는 게 가장 힘들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막 중학교에서 올라와서 그런지 선생님이 하는 말을 대체로 따르는 편이라서 지도하기 편하고 3학년 아이들은 입시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대학을 포기한 게 아니고서야 어느 정도는 공부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2학년 아이들이다. 이미 1학년 때 학교 분위기나 선생님들의 스타일을 다 파악했다는 생각에 반항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교복을 줄여 입거나 화장을 심하게 하는 때이기도 하다.
내가 임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2 담임을 맡고 있었을 때였다. 그 당시 내가 지도하는 학급에는 눈에 띄는 네 명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아침 조회 때는 항상 제대로 복장을 갖추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짧게 줄인 교복으로 갈아입고 일본 가부키 배우처럼 진한 화장을 하고 다니면서 툭하면 말썽을 일으키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그때 당시 우리 반 국어 담당 선생님이 나에게 그 아이들의 보충수업 여부를 물어보면서 “수업시간에는 어쩔 수 없으니 보충 때라도 피하고 싶네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선생님이 교실에 있는데도 아이들과 수업 중에 말다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체육대회 때에는 상대반 아이들에게 너무 심하게 욕을 하는 바람에 다른 경기 심판 중이던 내가 욕을 못하게 제지하기 위해 불려 갔을 정도였다. 다른 학교 남학생들과 사귀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다반사였고 다 컸는데 왜 간섭하냐고 나에게 대들 때면 담임인 나조차도 아이들을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 김재희(가명)라는 여학생은 좀 달랐다. 아버지와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식당일을 하고 있어서 재희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재희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유독 밝았고 비록 친구들끼리 욕을 하긴 했지만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대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내심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역시 맞았다. 아버지는 새벽에 집에 들어와서 자고 있는 재희 머리맡에 항상 쪽지를 남겨 놓곤 했는데 서로 얼굴을 마주치기 어렵다 보니 이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이 밤늦도록 집에 안 들어가서 부모와 담임인 나를 걱정시키게 한 것과는 달리 재희는 외박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로버트 A. 글로버의 ‘잘난 놈 심리학’이란 책에 따르면 딸은 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어머니로부터는 배울 수 없는 남성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 된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경우에는 나중에 커서 이성 교제를 할 때도 건강하고 질적으로 안정적인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재희가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서 괜찮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재희는 '기분 안 좋아요, 선생님. 그런데 뭐, 괜찮아요. 무슨 일이 생겨도 나를 절대 버리지 않고 항상 내 편이 되어 주는 절대적인 남자, 바로 우리 아빠가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아버지의 딸’ 저자인 이우경 임상심리 전문가는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한 여성들은 아버지를 대체할 사람을 찾는다고 말한다. 가부장적인 남성에게 끌리거나 남자 친구, 남편 혹은 종교 지도자에게 강박적으로 몰두하기도 한다. 또한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어 이성 관계에 있어서도 ‘거절 민감성’이 굉장히 높으며, 그 결과 원치 않는데도 제대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며 안정적이지 못한 이성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이 이성을 만날 때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건강한 교제를 하기를 원하는 건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성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 있게 의견을 말할 줄 알며, 낯선 상황에서도 잘 적응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통한 올바른 사회성을 가진 딸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딸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해주며 지속적으로 사랑과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부모의 경우: 아빠 역할까지 다 하는 슈퍼맘이 될 필요는 없다
몇 년 전 내가 지도하는 학급에 참 깔끔한 인상을 가진 이지희(가명)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있었다. 지희가 지나갈 때마다 향기가 나서 “도대체 어떤 섬유유연제를 쓰냐?”라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항상 깨끗하게 다려진 교복 블라우스를 입고 다녔고, 평소에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수업 중에 발표할 때에는 앞에 나와서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정도로 야무지고 똑똑한 아이 었다. 지희는 대학생인 오빠와 엄마랑 살고 있었는데 학부모 총회나 면담 때에도 지희 어머니 얼굴을 보기는커녕 전화 통화조차 한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솔직히 큰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담임이 학부모와 연락하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자녀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는 보통 학교에 연락해서 아이의 학교생활을 물어보거나 걱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희 어머니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지희가 교내 경시대회 영어 과목에서 상을 받게 되어 어머니에게 축하 문자를 보낸 적이 있었다. 보통은 보내지 않지만 그동안 혼자서 딸을 너무나 잘 키워 온 어머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기도 했고 사실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내 문자를 보고 지희 어머니는 답장이 아니라 직접 전화를 했다.
“어머니, 지희가 교우 관계가 좋고 성적도 좋아요. 제 딸도 지희처럼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가 일하느라 바쁘긴 하지만 지희랑 매일 밤 이야기하거든요. 학교가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엔 지희가 자기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 얘기를 하면서 성적 문제로 고민하기에 제가 걱정할 게 전혀 없다고 했죠. 공부도 하나의 재능인데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학교에선 공부를 해야 하는 환경이니 하긴 하되, 즐겁게 하라고만 했어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은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자신의 어머니를 언급하면서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온기를 느끼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고 아이를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는 것만이 최고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앙드레 모루아는 ‘온갖 실패와 불행을 겪으면서도 인생의 신뢰를 잃지 않는 낙천가는 대개 훌륭한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파블로 피카소는 “어릴 적 나의 어머니는 내가 만일 군인이 된다면 장교가 될 것이고 성직자가 된다면 교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대신 나는 화가가 되었고 결국 피카소가 될 수 있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준 믿음과 자신감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BS 육아 학교’라는 프로그램에서 아빠가 육아에 끼치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부모 가정일 경우에 아빠의 역할을 대신할 두 가지 방법을 언급했다. 첫 번째로 삼촌이나 할아버지 등 친척들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실제로 할아버지가 양육에 도움을 주면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한 사례가 굉장히 많다고 한다. 두 번째는 바로 어머니와 자녀 간에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데 항상 자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면서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라는 강한 믿음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세 살 아이든 사춘기에 접어든 십 대이든 상관없이 항상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만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