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귤선생님 Oct 05. 2023

반장, 부반장도 대학 스펙인가

  밥을 먹는데 앞자리에 앉은 선생님 얼굴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 반의 반장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3월에 반장 선거에 나가서 말을 하도 잘하기에 반 아이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반장이 된 건데요. 이 학생이 학급 일을 안 해요. 자기 공부가 먼저인 거죠. 그 애의 말솜씨에 애들도 저도 정말 속았다니까요."

그 선생님은 오전에 급식 조사서를 제출하라고 반장에게 지시했는데 하도 안 하니까 옆에 있는 부반장이 대신 아이들에게 조사를 받아서 가져왔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오래전 내가 맡았던 학급의 1학기 반장이 바로 그런 아이였다. 보통 고등학교 2, 3학년 때는 1학년 때 보았던 모습이나 행실로 반장이나 부반장을 뽑지만 이제 막 1학년에 들어온 아이들은 같은 중학교 졸업생들 외에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첫인상이나 이미지, 그리고 선거 공약 같은 발표력을 보고 투표를 하게 된다. 그 해에 1학기 반장이 되었던 아이는 심해도 너무 심한 경우였다. 

 “그럴 거면 반장 그만둬!”

라고 말할 때마다 싱긋 웃으며,

“선생님. 죄송해요. 공부하느라 깜빡했어요. 다음부턴 절대 안 그럴게요.”

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렇게 행동하다가 그냥 한 학기가 지나간 것이다.

체험 학습 중에 버스 안에서 출결이나 이동 중에 이것저것을 시켰더니,

“선생님, 이런 거 다 생기부에 들어가죠?”

라고 묻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곧이어 그런 생각을 하는 아이가 안타까워졌다. 학교에서의 생활과 자신이 맡은 일들,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들 까지도 모두 스펙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로 구분할 정도로 너무 세상을 일찍 알아 버린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학급의 반장, 부반장이 이렇지는 않다.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반장이나 부반장, 그리고 학급의 다양한 부장 역할을 담당했던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뭔가 역할을 맡아서 아이들을 이끌고 통솔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그런 아이들은 내게 와서 생활기록부의 '생'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담임으로서 많은 시간을 들여 자세하고 꼼꼼하게 생활기록부를 작성해 주게 된다.

  

  2015년 7월 21일에  '인성교육진흥법'이 시행되었다. 올바른 국민 육성을 통한 국가 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인성을 함양한 학생들을 길러내겠다는 취지이다. 물론 그 취지는 정말 좋다. 하지만 교외 활동을 생기부에 입력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학교 내의 활동만 생기부에 입력하는 현재의 상황을 보았을 때, 과연 우리 아이들의 인성이 학교 수업이나 행사 활동에 대해 적히는 내용만 보고서 제대로 함양되었는지 아닌지를 대학교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냐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대학에서는 반장이나 부반장, 학생부 임원 등 생기부에 기재된 부분들을 통해서 알 수밖에 없다. 이 학생이 진정으로 책임감과 리더십을 가지고 아이들을 이끌고 통솔하며 내 일보다 전체 일을 더 소중히 하고 다수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아는 ‘인성’을 이러한 스펙으로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등교지도를 하거나 점심시간에 식당 관리하기, 혹은 다양한 학교의 일들에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학생부 임원 모집에 대부분 성적 우수자 아이들이 몰린다. 자신의 스펙을 위해 참여하려고 하는 학생들로 인해 정작 이런 일들을 좋아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아이들의 기회가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이 단지 스펙을 쌓기 위해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나는 성적으로는 절대 국립대 사범대에 갈 수 없는 학생을 무려 두 군대의 학교에 합격하도록 도와준 적이 있다. 도와줬다고 해도 자기소개서 조언과 교사 추천서 밖에 한 게 없었다(요즘엔 그 둘 다 거의 없어졌다). 그 모든 준비는 학생이 했다. 학생은 특유의 통솔력과 리더십으로 3년 내내 학급 반장을 했고, 2학년 때에는 전교 부회장으로 뽑혔으며, 학생회 임원으로서 각종 교내외 프로그램 활동에 참가했었다. 뿐만 아니라 앞에 나서거나 아이들을 이끄는 걸 좋아해서 학교 축제나 다양한 행사에서 진행을 맡아서 했고, 대학교나 신문사 같은 곳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워크숍에 참석했다. 고3 때에는 한 대학교에서 열리는 국제 모의 회의에 참석한다고 하길래 공부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겠냐고 내가 말하자,

“그런데 선생님. 너무 하고 싶어요. 학교 대표로 나가서 제가 준비한 걸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과 토론하는 게 너무 좋아요”

라도 대답할 정도였다. 결국 이 아이는 두 군대의 국립대 윤리교육과에 수시로 당당히 합격했다. 합격을 축하하면서 3년 동안 다양한 스펙을 쌓느라 정말 애썼다는 나의 말에 학생은 이렇게 답했다. 

"일부러 스펙을 쌓으려고 한 게 아니라 하고 싶어서 했어요. 저는 앞에 나가서 뭔가 주도적으로 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


  영어 교사인 나는 영어 에세이 대회, 영어 말하기 대회, 시 창작 대회, 우리 문화 영어 해설사반, 영어 멘토-멘티 학습 동아리 등 다양한 학과 관련 활동을 만들어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학년 말에는 교내 영어 잡지도 만들어 발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활동은 생기부에 입력이 되기 때문에 아이들의 참여율은 굉장히 높고 호응도 좋다. 


  하지만 이런 대회들이 생기부에 기재되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지금처럼 열렬하게 반응할까? 수업 중에 나는 이런 질문을 했고, 아이들은 놀랍게도 “네!”라고 대답했다.

“하루 종일 학교 공부만 하면 재미없어요.”

“영어 말하기 대회 나가기 전에 준비도 많이 했고 진짜 떨렸었는데요. 기분은 좋았어요. 말하기 끝나고 내려오는데 심장이 막 터지려고 하면서 저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어 잡지에 기사를 쓰면 영어 잡지 무료로 준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거  평생 간직할 거예요. 고등학교 기념으로요.”

“영어 시 창작 대회에 좋아하는 팝송 가사를 살짝 제 식으로 단어만 바꿔서 나갔었어요. 팝송을 시처럼 읊는 연습을 했더니 랩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대회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그 후에 제가 랩에 관심이 많아져서 지금은 래퍼가 꿈이에요.”

“영어 잡지 기사 제목을 ‘교장 선생님과의 인터뷰’로 하려고요. 이때 아니면 언제 교장선생님과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진짜 재미있을 거 같아요.”

  

  아이들과 대화를 하고 난 뒤, 그동안 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어른들이-  대학 입시를 위한 스펙 쌓기 용으로 학교에서 많은 행사와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내의 활동을 그런 스펙 쌓기로 생각했던 건 아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윤리교육과에 합격한 학생 역시 단지 자신이 좋아서 여러 활동에 참여하다 보니 자기소개서에 쓸 내용이 많아졌다고 말했을 뿐인 것처럼 말이다.


  오전 8시 30분 1교시 시작종이 울리고 난 뒤 저녁 6시 보충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그리고 밤 10시 자율학습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다. 어른들조차도 그렇게 못할 텐데 말이다. 이러한 아이들에게 있어서 교실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경험하게 하는 활동은 그 자체로도 꽤나 즐거운 일인 셈이다. 따라서 단순히 스펙 쌓기 용으로 교내 대회를 실시하고 아이들에게 참여를 독려한다기보다 학교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에게 뭔가 새롭고 가슴 떨리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생각을 하려고 한다. 어른들이 무조건 자신의 눈높이에서만 아이들을 바라보고 그에 맞춰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년에 ‘영어 팝송 대회’ 개최를 하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에이, 그거 노래 대회인 거잖아. 대학교 스펙 쌓는데 별로 도움 안 될 텐데 애들이 참여하겠어?”라는 주변 선생님들의 말 때문에 대회를 개최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올해는,

“얘들아, 이번에 영어 팝송 대회를 개최할 거야. 정말 신나겠지? 노래 부르면서 스트레스도 풀어봐.” 

라고 말하면서 한번 개최해 볼까, 생각해 본다.

(결국 영어 팝송 대회가 개최되었고,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학년별로 대회를 따로 나눠서 하게 되었다)




학습의 내재적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발견감을 주어야 한다.

-글밭갈이-



이전 04화 내 아이는 지금, 교실에 혼자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