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름없이 저녁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거실에서 놀던 아이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뒤돌아보니 식탁 너머로 두 눈을 내밀고 나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손에 쥔 무언가를 내민다.
“맛없어”
아이가 내민 것은 양초였다. 생일날 쓰려고 사둔 미키마우스 모양의 빨간 초다. 흡사 막대사탕 모양과도 비슷하다. 초를 막대사탕인 줄 알고 먹었나 보다. 이미 미키마우스의 양쪽 귀는 반쯤 사라진 상태였고, 초 여기저기 아이의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얼굴에도 초를 먹은 흔적이 가득했다. 얼른 아이의 입 속을 살폈다.
“패 패 해봐~삼키면 안 돼!!”
들여다본 입 속은 깨끗했다. 빨간 생일 초의 조각들은 이미 아이의 식도를 통과해 위를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비상상황이다. 아이를 키우며 온갖 비상상황을 겪어봤지만 먹으면 안 되는 무언가를 삼키는 일은 가장 두려운 비상상황 중 하나였다. 잘 못 했다가는 위 세척이나 수술이라는 더 걱정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119에 전화를 걸까 하다가 인터넷으로 먼저 정보를 확인했다. 비누를 삼킨 아이부터 엄마 립스틱을 먹었다는 아이까지 온갖 것을 먹은 아이들이 있었다. 초를 먹은 아이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한 카페의 의사 선생님을 통해 초는 비교적 안심해도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면 응급실에 갈 필요 없이 며칠 잘 지켜보라고 했다.
걱정이 수그러들자 분노가 치밀었다. 엄마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든 말든 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밀며 명랑하게 재잘거리고 있다. 해맑은 모습에도 전혀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율, 이리 와”
“매? 매? 우슨닐 이떠?” (왜? 왜? 무슨 일 있어?)
“너 초를 먹으면 돼 안돼! 안돼!
엄마가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
엄마 엄청 화났어! 너 삐뽀삐뽀 타고 병원 갈 거야?
주사 꽁 맞을래?
초는 먹는 거 아니야! 절대로 먹지 마! 알겠어?”
“매? 매?”
“그냥 안 되는 거야!”
그렇게 한참 드래곤처럼 분노의 불길을 뿜어냈다. 아이는 입을 삐죽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울어도 달래주지 않았다.
네 살이 된 아이는 나이만큼 호기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신기한 맛, 신기한 모양, 신기한 사람들 세상에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가 보다. 같이 길을 걸으면 신기해~, 귀여워~, 엄청 웃겨 같은 감탄사를 내뱉기도 한다.
아이의 신기한 세상에 맞장구 쳐주는 쿨한 엄마는 언제쯤 될 수 있을까. 나의 아이가 아닌 네 살의 너로 인정해주는 숙제가 내 앞에 놓였다. 엄마가 할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