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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Oct 30. 2019

필라테스 수업의 여자들

필라테스 스튜디오에는 여자들이 많다. 그룹수업을 받는 우리 클래스만 해도 그랬다. 젊은 직장인도 있었지만 나처럼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저녁 운동을 하러 오는 주부들이 많았다. 엄마 또래의 연세가 있어 보이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매일 만나는 사이라 통성명은 안 했지만 얼굴도 운동복도 익숙했다. 저녁마다 함께 운동하고 월말이 되면 익숙해질 만한 얼굴들이 다음 달 초가 되면 새롭게 바뀌기도 했다. 그중 유독 오래 마주치는 얼굴이 몇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따로 인사는 하지 않는 어색한 관계였다. 수업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는 어색함이 오히려 익숙한 사이였다.

어느 날 역시나 자주 마주치는 오십 대의 여자 회원이 말을 걸어왔다.

“여기 좀 봐봐요”

아줌마 특유의 친화력이 느껴지는 말투로 자신의 팔뚝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런 순간은 찰떡같은 호응이 필요함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에 박혀있던 얼굴을 얼른 돌려 여자의 팔을 살펴보았다. 주먹만 한 멍자국이 있었다.

“다치셨어요? 아프겠다. 어쩌다가.....”

“응. 내가 욕실에서 안 넘어지려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팔을 욕조 모서리에 부딪혔지 뭐야.”

“어머, 욕실에서 넘어지셨어요?”

“넘어지는 순간,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머리는 부딪히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버티다 보니까 팔이 이렇게 됐어. 

그래도 죽진 않고 살았지”

“그만하기 다행이네요. 머리를 안 부딪혔다니.”

“그러니까. 아이고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니 그런데, 내가 넘어지는 순간 우리 남편이 보고 있었거든. 

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는데 쿠당탕 넘어지고 나니까 그게 웃기다고 배를 잡고 낄낄 거리잖아.”


“하아... 아이고...”

“얄. 미워 죽겠어.”

여자는 ‘얄’ 자에 감정을 쏟아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젊은 회원들은 좋겠어요. 이렇게 다들 운동을 오래해서 건강하고. 딱 봐도 운동한 사람 티가 나잖아요.”

“아니에요~ 저도 아기 낳고 몇 년을 운동장 근처에도 못 가다가 이제 운동 다시 한 지 얼마 안 된 걸요.”

“내가 운동을 좀 열심히 했으면 넘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운동을 해서 운동신경이 있으니까 그만큼 밖에 안 다친 거죠.”

“호호, 그런가?”

“그럼요~ 역시 운동하신 분은 달라요.”

나는 얼마 전 율이가 쓰는 욕조에 깔았던 매트가 떠올라 여자에게 추천해주었다. 여자는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샀을 거라며 반색했다. 그랬으면 넘어지지도 않았을 거라며 스마트폰으로 쇼핑몰 카트에 담았다.
팔뚝의 멍은 한참 후에 지워졌겠지만 마음의 멍은 조금 옅어진 것 같았다.

필라테스 수업에 오는 여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안고 왔다. 다이어트를 목표로 오기도 했고, 조금 더 튼튼해지고 싶거나, 나처럼 무기력한 일상이 이유이기도 했다. 그 무렵의 나는 밤마다 육아와 살림의 번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것이 좋았다. 그 에너지로 일상의 균형이 조금씩 맞춰지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니 좋았다. 여자의 멍자국도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필라테스를 하러 오는 여자들의 마음에 쌓인 군살이 조금 가벼워지는 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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