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비 Oct 31. 2019

최선을 다하지 않아 다행인 시간

"대단한 거지! 어쨌든 니가 뭔가를 이겼다는 거잖아.
난 메달 같은 거 받아 본 적 한 번도 없어.
난 시합에 완전 쥐약이거든.
나는 있는 힘껏 노력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최선을 다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바스티앙 비베스 [염소의 맛]



나는 초등학교 때 육상부 선수였다. 고3 체력장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20초에 들어온 내가 육상선수였던 이력을 자랑하면 친구들은 배꼽을 잡고 웃으며 놀리곤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겠지만 내가 육상부 선수였고 육상대회에 나갔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00명도 안 되는 시골 학교였다. 6학년이었던 우리 반이 학급 인원 수가 제일 많았는데 스물네 명이었다. 요즘은 초등학교 학급당 인원수가 서른 명 안팎이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사정이 달랐다. 한 학급에 열반씩 있고 학급당 50명씩 꽉꽉 채워도 학급수가 모자라 오전 오후반을 나누어 월반 수업을 하기도 했다. 그런 대형 학교들 틈에 우리 학교는 정말 아담한 사이즈였다.

우리 선생님은 체육에 열정이 남달라서 부임한 첫 해에 육상부를 만들었다. 시골학교라도 날다람쥐처럼 빠른 친구들은 있었다. 그 친구들이 먼저 육상부에 선발되어 수업이 끝나면 달리기 훈련을 받았다. 육상대회가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반드시 한 종목이라도 메달을 따겠다며 훈련 의지를 불태웠다. 100미터 달리기, 멀리뛰기, 남자 계주 주자들이 선발되어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불러 수업 후 운동장에 남으라고 하셨다. 달리기에 전혀 재능이 없었던 나는 의아했다. 수업을 마친 운동장에는 파란색 운동복을 입은 육상부 친구들과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내가 남았다.

“육상 종목 중 어떤 걸 해보고 싶니?”

선생님의 질문은 황당 그 자체였다.

“저는 달리기는 잘 못하는데요.”

“괜찮아. 너도 이번 육상대회에 나가게 되었으니까 400미터 계주 말고  한 종목에 출전해보도록 하자. 원하는 종목이 있으면 선생님이 가르쳐 줄게.”

나는 완벽한 타의로 육상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알고 보니 여자 육상부원은 세 명이었고 400미터 계주를 뛰려면 한 사람이 부족했다. 우리 반 달리기 기록으로 4번째인 내가 육상부원이 된 이유였다.
그날부터 달리기와 높이뛰기를 매일같이 연습했다.

육상대회가 열리는 면소재지의 초등학교 운동장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이렇게 크고 좋은 운동장에서 연습했을 친구들이 나오는 대회라는 생각에 기가 죽었다.

“높이뛰기는 연습경기라고 생각하고 대충 뛰어라. 너무 힘 빼면 달리기 할 때 지치니까 “

선생님의 배려인지 디스인지 헷갈리는 주문에 높이뛰기는 정말로 대충 뛰었다. 53센티미터를 목표로 뛰었지만 51센티미터만 성공해 예선 탈락을 했다. 이미 기가 죽어있었는데 더 꺾일 기가 남아 있었나 보다. 달리기를 하려니 내가 이 많은 친구들 중에 꼴찌일 거란 생각에 부끄러웠다. 잠시 후 400미터 계주 경기가 열린다는 방송이 나왔다. 선생님은 4명의 주자들을 모이도록 했다.

“이번 경기는 꼭 메달을 따 보자! 수지가 1번 주자를 맡아 차이를 확실히 벌려 놓으면 우비가 2번 주자로 뛰어. 3번 4번 주자가 든든히 이어 줄 테니 모두 힘 내보자!”

나는 분명 기록으로는 꼴찌일 테지만 수지라면 우리 학교에서 제일 빠른 친구라 엄청난 격차를 벌려놓을 것이다. 내가 달리는 순서에 따라 잡히지만 않는다면 나도 꼴지는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용기를 내 보았다. 선생님의 목표는 메달이었지만 내 목표는 꼴찌만 아니면 되는 거였다.

“땅”

400미터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수지는 정말 빨랐다. 다른 학교 선수들을 10미터쯤은 따돌리며 마지막 코너를 돌고 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바통을 받은 나는 있는 힘껏 달렸다. 단단하게 묶은 스파이크가 벗겨질 것만 같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운동장의 바람을 혼자 가르며 달리는 순간 내 옆으로 우사인 볼트처럼 빠른 속도의 선수가 치고 나갔다. 신나게 달리던 내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남은 경기장을 죽어라 달리는 동안 세 명의 선수가 내 옆을 더 지나갔다. 나는 더 이상 바람의 저항을 버티지 않아도 됐다. 꼴찌로 바통을 넘겨주었지만 3번, 4번 주자들이 빨랐던 덕에 전체 3등을 했다.

운동장 가운데에서 선생님과 네 명의 주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펄쩍펄쩍 뛰었다. 나만 울 것 같은 얼굴로. 그 후로 나는 본래의 나답게 육상대회와는 거리가 먼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 생의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최선을 다해본 경험이다.

바스티앙 비베스의 책 “염소의 맛”을 읽으며 내 인생의 경기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학창시절에는 더 이상 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어른이 된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린날 꼴찌의 트라우마 따위는 다행히도 없었다. 예상치 않았던 달리기 대회에도 다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위에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이 분명했다.

필라테스 수업이 있는 오늘 저녁에도 나는 최선만은 다하지 않을 것이다.
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순간에 잠깐 꾀를 내어 내일의 몫을 남겨두는 희열은 체육 생활인으로 길게 살아가는 나만의 방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필라테스 수업의 여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