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잃은 등대에 대한 소고
그 사람이 요즘 다시 이슈가 되고 있다. 누가 봐도 참 멋지고 화려한 서른을 보냈음직한 시집으로 회자된 그 사람이 유독 언급하며 탑뉴스로 떠오르게 만든 사람은 한국 시단의 등대 같은 분이었다. 등대는 그 모양이 어떻게 생겼든 묵묵히 불빛을 보내 험한 바닷길을 잡게 하고 뭍이 가까웠다며 힘을 내게 하는 존재이다.
오늘 제이티비씨는 그 시인이 영국 언론과 한 인터뷰를 가식적인 것인양 보도하고 왜 자신들이 미투를 적극 취재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였다. 그 취지에 대하여 나는 적극을 넘어 더 큰 박수와 열정으로 동조한다. 권력을 빌미로 한 사람의 인격체를 망가뜨려왔던 또 망가뜨리려는 존재들은 성을 넘어 마땅히 그 대가를 분명하게 치러야 하고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인권에 대한 명확한 경각심을 아로새겨야 한다.
다만, 왜 하필 그였을까. 등대가 꺼지는 순간 바다를 건너는 이들은 길을 잃고 역류를 만나도 헤쳐나갈 힘을 얻지 못할 것이며 뭍에 닿아 그리움을 풀어낼 희망으로 바람과 비와 암초를 이겨내던 이들의 의지를 꺾고 말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그분은 그런, 존재 아닌 존재가 아니었던가.
걱정하던 중에 추행의 장소로 언급되었던 그 술집 주인의 반박글이 중앙일보에 올라왔다. 자신이 본 바 그 시인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며 정말 그랬는지 증거를 갖고 와야 할 것이라는 기고문이다. 아 그래. 맞아. 왜 사람들은, 왜 언론은 타당한 증거가 없이, 정확한 취재에 의한 앞뒤 논리와 명쾌한 증빙이 없이 그저 일방의 말뿐으로 등대의 기름을 말려 불이 꺼지게 하고 있을까.
무대에서 내려온 톱스타는 오래도록 그 스포트라이트와 환호의 환각 환청을 잊지 못하여 깊은 우울에 빠진다고 한다. 그는 어쩌면 다시 새로운 서른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오랜 세월 무심히 빛나던 등대를, 스스로도 험한 바다를 헤치고 지금으로 이르게 해주었던 그 등대 불을 바다로부터 자신에게로만 향하게 하려는 것인가.
물론 내 이 글은 완전히 나의 허상일 수도 있고 또 나의 부족한 식견에서 나온 단상일뿐이며 그가 완전히 옳고 그분이 완전히 잘못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미 등대는 방향을 잃었고 바다는 길을 잃었다. 뭔가 무섭고도 왜인지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