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단편소설 동면
동면 01
겨울이 추운 이유는 다정한 눈빛이 얼어붙어서일까. 왜 연인들은 겨울에 이별하는가. 이별의 탓이 차가운 그대일까, 그대의 그대일까. 아프고 지나가야 봄이 온다면 봄에서 달아나자. 겨울로만 가는 여행, 그대가 없는 곳으로, 봄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짧고 얇은 옷들을 모두 모아 의류재활용 함에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누군가 빼내지 못하도록 너무 좁게 만들어진 구멍으로 옷들을 다 넣고 안 들어가는 건 그냥 옆에 놔둔다. 처음부터 그냥 놔둘 걸 하는 마음이 들 만큼 진이 빠진다.
겨울에는 추운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해서 약속도 안 잡고 방에 처박혔다. 겨울엔 동면이야. 친구들은 나를 잠자는 곰이라고 불렀다. 겨울 옷을 사지 않는다. 남겨진 옷들이 몇 개 없다. 입고 있는 것을 빼고 남은 옷을 트렁크에 다 넣었지만 트렁크는 빈 공간이 꽤 많이 남았다.
인터넷, 티비 등을 해지하고 분산된 적금 보험을 털어 한 군데로 모으는 일에만 일주일. 받을 땐 냉큼 받으면서 깰려고 하면 왜들 그렇게 아까워 하지. 자기 돈도 아니면서. 안타까운 척 하는 모습 역겹다.
방은 비워두기로 했다. 나 반, 그 반 소유한 오피스텔이니 내맘대로 처분하는 것도 아닌 듯했지만 물리적으로 기억에 대한 준거를 남겨두고 싶은 맘이 앞섰다. 먼지 한 톨까지 그대로 두고, 어디에서든 뒤돌아보고 싶을 때 돌아보면 거기에 있는, 돌아갈 곳.
동면 02
떠나고자 했지만 머물러야 하는 겨울, 모든 걸 처분해버린 방 안엔 아무것도 없다. 다행인 점은 기본 시설인 보일러가 있고 가스레인지가 있고 따뜻한 방바닥이 남아 있다는 것. 캐리어에서 다운파카를 꺼내 요처럼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다시 파카 하나를 더 꺼내 이불처럼 덮어놨다. 얼마나 여기서 지내야 할 지 알 수 없다. 할 수 없이 동네 수퍼에서 양은냄비를 구입하고 컵라면과 소주를 몇 병 사왔다. 파카와 파카 사이에 드러누으니 제법 따뜻하다. 가방 밑바닥에 때려넣은 노트북을 꺼내 잡히는 와이파이가 있는지 찾아본다. 다행이 흐릿한 막대기 세 개 두 개를 넘나드는 와이파이를 잡아 뉴스를 본다. 그 사이 냄비의 물이 끓어 컵라면에 부어 두고.
지금 난 왜 이러고 있지. 여권 만료된 걸 몰랐다. 공항에서 여권 시효가 지난 걸 알고 되돌아와야 했다. 어차피 아직은 겨울, 시간은 많이 있다. 여권을 새로 만들고 티켓을 다시 끊고... 아... 이럴 수가 있을까.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나를 마치고 새로 하나를 시작할 때마다 난 늘 뭔가를 빼먹었다. 몇 번이고 떠나버린 그에 대해서도 매번 정리를 했지만 한 가지. 빼먹은 것 때문에 어김 없이 돌아오는 봄을, 돌아오는 그를 기다리며 동면에 들었다.
그 빼먹은 하나는, 사랑하지 않아, 그는 나를. 나도 그를. 이젠 사랑하지 않아. 그가 돌아올 때마다 그걸 느꼈었다. 새삼 느끼고는 왜 또... 라고 했지만 이미 그는 돌아와있었다. 그때마다 또 하나를 빼먹었다. 헤어지잔 선언. 이제 그만하자.라는 통보. 그러니 또 겨울이 다가올 때까지는 사랑도 아닌 게 사랑처럼 같이 자고 같이 먹고 끌어안고 물고 빨고 섹스섹스섹스. 한 이불 속 지긋지긋한 반복.
올해는 기어코.
말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도 이제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는 그래? 하고 떠났다. 라지만... 때가 늦었다. 내 통보, 내 일방적 선언 때문에 떠난 게 아니라 때가 되어 떠난 거다. 겨울이 되었기에 떠난 거다. 아무튼 난 선언을 했으니. 된 거야. 자위를 하고 짐을 처분 하고 가방을 꾸리고 기어코 인천 공항으로 떠날 내 스스로의 명분을 따낸 거다. 그런데 여권만료라니... 이건 또 뭐야. 난 뜬 눈으로 밤을 보냈고 소주병은 비었고 라면은 고스란히 식어 불어터졌다.
동면 03
일주일이 지났다.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는데 이 느낌이 묘하다. 방에 짐과 옷들이 가득했을 땐 냄새 배이는 게 싫어서 끊었는데 텅 빈 방은 속박 없는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굴러다니는 소주병에 물을 받아 재털이로 삼았다. 닫아둔 창으로 새어들어오는 겨울 햇빛에도 담배연기는 좋아서 춤을 춘다. 좋다는 건 뭘까. 내가 좋아야 좋은 거라면 세상은 좋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추운 걸 싫어해서 창문을 열지 않는다. 추운 걸 싫어하면서 봄이 오지 않는 곳으로 떠나려 한다는 건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여권 신청 하러 가겠다고 마음만 먹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키스할 때 내 입에서 나는 담배냄새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또한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러니야.
- 아이러니야.
- 아이러니야.
말을 하면 벽이 귀를 열어 듣고 대답한다. 짐이 들어차있던 방은 소리를 삼켰는데 짐을 비우고 나니 벽이 내 소리를 들어준다.
아이러니야.
- 아이러니야.
- 아이러니야.
일주일 만에 욕실의 거울을 본다. 낯빛이 어둡다. 머리는 헝클어져 제멋대로 엉켜있다. 트렁크에서 여행용 칫솔과 치약을 꺼내 늘어놓고 양치질을 하며 말했다. 이가 겨울옷을 벗은 것처럼 하얗게 시려왔다. 온수를 켜 입을 헹구고 샤워를 했다. 거울 속의 몸을 보니 햇살이 그리웠다. 따뜻한 햇살. 몸이 이제야 작가의 몸이 되었다. 가슴부터 제일 먼저 빠진다더니 가슴이 남자처럼 사라졌다. 글을 쓰지 못한지 며칠 째. 글을 쓰던 그 가슴부터 제일 먼저 빠진 거라면,
햇살을 받을 필요가 있어.
- 햇살을 받을 필요가 있어.
대답하지 않아도 돼.
- 대답하지 않아도 돼.
물기를 닦지 않고 해가 드는 쪽을 찾아 알몸을 뉘였다. 방바닥의 따뜻함에 등이 기분 좋게 구부러진다. 몸에서 물방울이 바닥에 굴러떨어지면 햇살을 받은 뱃살에 그림이 그려진다. 먹은 게 별로 없어서 뱃살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따스한 햇살에 뱃살이 늘어진다.
눈에 잠에 들어온다. 서서히 동면으로 들어간다. 샤워 덕분인지 일주일 만에 처음 제대로 잠이 들었다. 시간은 벌써 봄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십이월이 절반을 넘어간다. 그가 찾아가는 겨울의 보금자리는 언제나 그를 봄이 오면 내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년 중 세계절이나 그를 차지 하는데 "뭐가 불만이야..." 라고 중얼거린다. 벽이 뭐가 불만이야... 라고 대답한다. 서서히 동면으로 들어간다.
동면 04
꿈은 지독하게 아렸다. 그는 나를 탐닉하며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내 가슴을 주무르는데 그의 체온은 다른 데 닿아있었다. 그는 차가운 발을 내 사타구니에 밀어넣었다. 나는 꿈속에서도 사무치는 냉기에 부르르 떨었다. 차갑지 않지만 차가운 눈을 마주 본다는 건 몹쓸 경험이다.
잠을 뿌리치고 창문을 열었다. 공기가 들어오는 건지 나가는 건지는 몰라도 방안은 순식간에 차갑게 바뀌어갔다. 알몸인 내 살갗에 오톨도톨 소름이 내렸다. 물 같은 눈이 내린다. 그것은 땅에 닿자마자 물로 바뀌어 바닥에 얼룩을 그려댔다. 차갑지 않은데 차가운 눈. 그것은 하늘의 눈인가 그대의 눈인가.
이별하려고 시작하는 사랑은 없다. 그래서 이별은 늘 예기치 못한 슬픔이다. 슬픔보다는 고통이다...라지만 예정된 이별을 견뎌내야 하는 고통은 낯선 이별보다 무척이나 서럽다.
먹을 게 떨어졌는데... 뒤돌아보지 않아도 빈 컵라면 용기 몇 개가 굴러다니는지 빈 소주병이 몇 병이나 줄 서 있는지 뻔했다. 겨울로 갈 거라며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다. 눈 같은 비를 헤치고 나가기 싫다. 그래서 그대로 굶고 있다가,
오다이바의 대관람차를 탔던 그날 비가 내렸다. 관람차의 창문은 온통 체온과 빗방울이 뒤섞인 김이 서려 밖이 보이지 않았다. 대관람차가 허공의 정점에 매달리자 그는 대담한 터치를 시작했다. 그는 내 무릎 사이에서 무릎으로 앉아 입김으로 스커트 사이의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추위가 싫어 껴입은 옷을 입술이 겹겹이 파헤치고 들어와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공중을 맴돌던 대관람차가 육지에 맞닿았지만 난 미처 자라지 못한 날개를 떼어낸 것처럼 휘청거렸다. 세상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가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 내 등엔 마침내 날개가 솟아올랐다.
그의 손이 나를 붙잡아 구름다리로 이끌었다. 비가 쏟아지는 4월의 도쿄만에서 그는 재킷을 벗어 나의 머리를 가리고 비를 헤치며 달렸다. 달릴까. 머리에 파카를 뒤집어 쓰는 이유는 돋아난 날개를 가리기 위함이야. 편의점까지는 그처럼 사랑처럼, 이별처럼, 순식간에. 날자.
우산이 꼭 필요한 건 아니야.
- 우산이 꼭 필요한 건 아니야
벽이 대답했다. 창문으로 날아들어온 눈이. 비가 되어 중얼거린다. 겨울이니까.
겨울에 사랑하는 이들은, 우산이 필요없다.
동면 05
문을 나설 땐 뒤돌아보지도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 잠그는 건 늘 어려운 일이다. 잘 잠가놓고도 어딘가 미심쩍어서 엘리베이터를 보내고 다시 가서 문을 밀어 닫힌 걸 확인해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문은 언제나 잘 닫혀있었으므로.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도착했을 때 마음속 안달이 극에 달했다. 습관적으로 문이 닫히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한번에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지 않고 공항엘 갔다.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여권 때문에... 되돌아와 번호키를 누르니 문이 열려있었다.
그는 겨울에 돌아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동안 문 옆에 서서 기침을 하고 바스락거리며 기척을 냈다. 도둑이 있다면 서둘러 빠져나가라. 마주치지 말자. 그가 돌아왔다면 불쑥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둘러볼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서성거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빌트인 가전과 싸늘한 공기만이 둘러보는 나를 마주보며 낯익은 표정을 지었다. 문을 잠갔는지 확인했어야 해. 라고 중얼거렸다. 워낙 낮게 내뱉은 말이라 벽도 알아듣지 못했는지 조용하다. 하필 떠나는 그 날만 문을 잠그지 않고 떠났던 거다.
겨울인데... 그가 돌아올 곳은 여기가 아니야.
- 여기가 아니야
한 번 문 안으로 들어오니 다시 나가기 싫어졌다. 잠자는 곰의 계절인 것이다. 곰은 겨울 동안 산을 어슬렁거리지 않는다. 나는 겨울을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여전히 맨몸인 채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있었다. 누워 담배를 피워물었다. 뽀얀 연기가 금세 방 안을 메웠다. 누군가 문을 툭 치고 지나갔다. 전단을 붙였을 거야. 아니면 스티커거나. 창밖이 요란하다. 바람이 무척 세게 부는 걸거야.
누워서도 세상이 보인다는 건 그리 신기한 경험도 아니다. 누구나 가만히 누워있으면 세상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날것의 다큐멘터리를 나누게 된다.
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가. 겨울에 돌아온다면 떠나지 않아도 된다...라지만 그럴 리가 없다. 갑자기 노트북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마우스를 건드렸나보다. 창밖에서 머물던 세상이 일제히 텅 빈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답잖은 뉴스가 화면 가득 떠오른다. 내버려두었다. 그것들은 지금의 나를 어쩌지 못한다. 마지막 담배꽁초를 병에 밀어넣었다.
맨몸에 파카를 걸쳐입고 지퍼를 올렸다. 세상이 들어온 틈에 잠시 세상에 다녀오자. 배고픔보다 마음이 고파... 술을 사야 했다. 담배도 떨어졌다. 아직 겨울이다. 아직 괜찮다.
동면 06
밖에 나갔다고 생각했다. 소주도 사오고 담배도 샀다.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동면 중이다. 한치도 움직이지 않고 알몸인 채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움직이기 싫었다. 누구라도 그런 순간이 길어지길 바라지 않나.
봄을 기다리지 않는 방법은 남극으로 떠나거나 현실에 있지 않거나. 난 나도 모르게 남극으로 떠났거나 혹은 현실에서 사라졌거나 했을 것이다. 그가 돌아온 그 봄에 난 머무르지 않은, 겨울 그대로인 채.
그를 맞이하리라.
움직일 이유가 있나. 봄이 온다고 나도 봄이란 법이 있나. 그가 만나는 나는 겨울에 머물러 찬 살갗에 소름이 돋거나 곰팡이가 돋았거나. 아무튼 그가 기대하던 나의 봄은 없다. 봄이 봄이 아니면 봄을 봄이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난 알몸인 채 겨울에 머무를 테고 그는 싸늘한 봄의 환영인사에 시린 코를 싸쥐고 뭐지. 라며 들어설 것이다. 난 봄을 기다리지 않는 낯선. 낯익은. 싸늘함으로 물들 것이다. 아쉬운 거라면. 그는 다른 봄을 맞겠지. 나는 다시는 봄을 맞을 수 없도록. 겨울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동면 07
눈비
이거 아무래도 비로 바뀔 거 같다. 겨울에 웬 비야. 잠깐 기다려. 우산 사올게.
당신은 그의 눈을 보지 않고 턱 어림을 바라보며 말하고 카페를 나간다. 카페 문을 열자 축축하게 날리는 눈이 금세 머리를 덮기 시작했다. 중간 쯤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는 카페 창 앞 테이블에 턱을 대고 당신 쪽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이 그의 눈을 보지 못한 이유를 알고 있지만. 머리를 몇 차례 저었다. 그가 보기엔 눈을 털어내려는 것으로 보이기를 바란다. 저 복잡한 눈속에 다짐하고 있는 말은 분명 이걸 테니까.
우리... 헤,
어? 또? 또야? 또 그?
미안해
도대체 넌,
미안해
넌 내가 그렇게 싫어?
당신이 일부러 묻지 않으려는 것을 이제부터 그가 대답하려고 한다. 익숙한 게 다 좋은 건 분명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 편안하고 쉬운 게 그건데. 겨울마다 오는 이 애와의 변함없는 익숙함에 당신은 참 기가 막히다. 그는 벌써 손가락에 꼈던 반지를 빼내 테이블 위에서 굴리고 있을 것이다.
오빠가 싫은 거 아니야.
그 말이 더 황당하다는 거 알지?
오빠 사랑해. 근데
그를 더 사랑한다고?
오빠, 그는,
그는 너 아니면 겨울을 날 수 없다며? 나는?
그래서. 너무 미안해서 이번에 아주,
아주 뭐? 아주 끝내자고?
아주 헤어져. 미안해 오빠.
아 참 정말
그가 굴리던 반지를 당신 쪽으로 밀어놓는다. 휴 한숨부터 나온다. 어쩌다 이런 사랑을 시작했을까.
아니야. 그럼 이번 겨울만. 이번만.
아니야. 그냥 헤어져.
왜? 이제껏 그래온 것처럼 겨울만 견디면.
아니야 이번엔.
그럼?
그가, 돌아갈 곳이 없대.
네가 무슨 겨울 환승역이야?
몰라 아무튼. 봄이 오지 않을 거래.
대체 무슨,
봄이 오지 않아. 그 사람에겐 겨울뿐이야.
당신이 예상했던 건 이게 아니다. 겨울마다 다른 남자 품으로 가는 그에게 당신도 힘겹다는 표현을 조금 한 것뿐인데. 아주 끝내자고 한다. 겨울뿐이랬다. 그 남자에게 그는 겨울이다. 봄이 오지 않으니 겨울뿐이다.
미안해. 그러지 마. 겨울만. 겨울에만,
아냐 오빠 미안해. 그냥 끝내자.
그냥 나도 그런 말 할 자격 있잖아. 그치?
자격 넘쳐. 차고 넘쳐서 이제 나도 오빠 그만 힘들게 하려고.
당신은 "이게 더 힘들어!"라고 소리쳤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앞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 그래서 그다지 큰 소란은 벌어지지 않는다.
갈게!
그가 불쑥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간다. 멈칫 했지만 당신은 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에 짐을 우겨넣고 우산을 들고 따라나간다. 몸이 안 좋은 그는 이런 날씨를 버티지 못한다. 아플 거야. 당신도. 그도. 아플 것이다.
동면 08
실랑이는 역에서 다시 벌어진다.
진짜?
가!
마지막이야?
얼른 가!
이렇게?
하여튼... 미안해 오빠. 가.
당신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매달리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세상에는 흔치 않다.
그가 탄 지하철이 멀어질수록 당신은 터져버릴 것 같다. 끝. 마지막. 이런 말은 처음이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툭툭거린다. 그는 갔다. 라지만 그는 가지 않았어. 라고 위안하는 오늘은 웬지 참담하다. 가라. 가. 겨울마다 간 놈이 무슨. 멀미가 난다.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카톡애 대답 한 번 없는 그를 야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자가 지워졌는지 확인하는 건 단지 의미없는 저항이다. 당신이 익숙했던, 숱한 겨울을 거친 그 마지막 순간보다 지금 며칠이 더 절박해보여 갈피를 못 잡고 방에 처박혔다. 연말이면 꼭 이래서 송년회 같은 델 안간지 꽤 되었다. 그나마 당신이 만난다면 유일하게 이 친구. 억지로라도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뭐가 이해가 안 돼?
그게 가능해?
아 몰라. 묻지 마.
겨우내 딴 놈과 하던 여자를 봄에 다시 만나고 겨울이면 또 빼앗기고. 그 짓을 왜 하는 건데? 차라리 나랑 만나자.
넌 여자가 아니잖아.
나도 여자야 인마
넌 친구.
미친 놈. 그만 둬 이제.
잊히질 않아. 겨우내 봄을 기다리게 되고. 봄이 되면... 꼭 다시 오니까.
자존심도 없냐? 그동안 딴 남자와,
됐다. 그런 게 뭐 별거라고.
마음도 뺏긴 거잖아?
내 마음이 중요하지 뭐.
오랜 친구, 여자인 친구 연우가 당신을 미친 놈 보듯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길을 막고 물어봐도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게 맞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하는 사랑이 사랑이 맞기는 한가.
떡이 된 당신을 끌고온 연우가 침대에 앉혀두고 잠시 바라보았다. 당신을 툭 쳐서 쓰러뜨린 연우는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하고 방을 치워주었다. 냉장고를 뒤져 꿀물도 타서 넣었다. 연우가 떠난 방 천장을 흐릿한 눈으로 본다. 연우가 한 시간을 머물렀어도 방에선 연우 냄새가 나지 않는다. 코를 파고들 만큼 지독하게 배어있는 그의 냄새를 맡으며 이렇게 누워 밤을 샐 거라는 걸 당신도 연우도 이미 알고 있다.
동면 09
창밖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올 때 갑자기 당신은 방을 뒤엎기 시작한다. 편의점에서 가장 큰 쓰레기봉투를 사다가 침대시트를 빼서 버렸다.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것. 이불도 버렸다. 베개, 그가 입었던 당신의 옷들도, 같은 입이 닿은 그릇과 컵과 잔과 수저들. 모든 걸 버렸다. 어디서 힘이 나는지 무거운 침대를 세워 벽에 기대고 구석구석 쓸고 닦았다. 수없이 튀어나오는 긴 머리카락들. 영하14도의 창문을 활짝 열고 방문도 열었다. 맞바람 치는 방은 바닥에 얼음이 맺혀 바닥 닦는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가 여기서 담배를 피웠다. 신기하게도 당신은 그와의 키스에서 담배냄새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3시간을 열어두어도 담배냄새는 완전히 빠지지 않는다. 당신에게 남겨진 그의 흔적처럼. 하루에 빨래를 세 번씩 돌렸다. 나와있는 옷들과 옷장에 있던 모든 옷들이 일주일 만에 빨래가 되어 세탁기를 지나갔다. 그래도 냄새는 남아있다. 초를 몇 개 사서 한 통이 다 타도록 켜둔다. 그래도 냄새는 가시지 않는다. 이건 담배냄새가 아니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에 남은 그의 냄새이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은 세제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홀로 매캐하다. 이별로 끝나지 않은 사랑을 해본 사람이 있다면 무릎 꿇어 듣고 싶은 마음이다. 이별의 결벽, 모든 것을 닦아내고 털어내도 깨끗해질 수 없는 상처. 겨울에 우산은 내내 먼지 속에서 뒹군다. 눈밭에서 하늘만 바라보다 부스러진 겨울 해바라기처럼.
여보세요
전화는 받네.
네 전화니까
뭐해? 아직도 빨래질이니? 나와.
동면 중에 어슬렁거리는 거 민폐야.
웃기지 말고 텨나와.
연우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소개팅 자리를 만들어 놓고 나간다. 당신을 당황시키는 재주는 그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이게 무슨 뜬금?
이 친구는 여자!거든. 알지?
당신이 문을 나간 연우 뒷덜미를 따라 나가 묻자 연우는 여자.라는 걸 강조해서 말하고 당신의 손을 덥썩 잡아 자기의 가슴에 얹는다. 가슴이 쿵쿵쿵 뛴다.
뭐해?
너 내 심장으로 몇 대 맞자.
그래 아프다. 아파.
가슴 있는 친구인 사람은 갈 테니까
뭐래
저 여자사람은 이제부터 네가 잘 컨트롤해봐. 아 참, 대충 이야기는 해뒀다. 너 가슴 없는 놈이라고. 가슴이 다 타버렸을 거라고. 아무래도 주선자로써 줄 정보는 줘야 하니까. 이름은 민영이야. 한민영.
야, 너무 느닷없,
그럼 불알 없는 친구 간다.
자기 가슴에 얹은 당신의 손을 잡아 한 번 꾹 누른 후 연우가 가버렸다. 이야기를 해두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동면 10
뭐라고 했죠?
네?
연우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했다던데요.
하하하
왜... 웃어요?
그래도 첫만남인데 너무 앞뒤가 없어서요. 한민영이에요.
내민 민영의 손을 잡아 흔들며 당신은 그제야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떠오른다. 허둥허둥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아, 맞다. 정신이 없네요. 미안해요. 수형이에요. 이수형.
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겨울우산.
겨울우산이요?
언니가 겨울우산 같은 남자가 있다고 해서요. 가슴이 텅 빈. 구석에서 먼지 뒤집어쓴. 동면 중인 겨울우산.
별 얘길 다 했군요. 겨울우산이라니.
연우 언니의 그 말 때문에 수형 씨에게 호기심이 생겼는데요? 겨울우산 같은 남자라니. 우산은 언젠간 꼭 필요한 건데. 어디에 뒀더라도요. 그리고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잃어버리면 아쉬운.
그런가요.
하지만 잃어버린 후엔 반드시 다른 우산을 사야하잖아요. 비를 맞을 수 없으니.
민영의 말에 당신은 다시 가슴이 아파온다. 기가 막혀서 속으로 연우 너 두고 보자. 라고 하지만 연우의 말이 맞는 말인 걸 잘 안다.
그렇군요.
그 우산, 내가 주워가지래요.
네?
나더러 가지래요.
헐
내가 가져도 돼요? 겨울우산. 난 우산을 꼭 가지고 다녀요. 이렇게.
가방에서 노랑 우산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당신은 그 병아리색 우산을 바라본다. 민영은 당신을 바라본다. 그 눈은 갖고 싶은 물건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의 눈처럼 간절하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어요?
빈 방이라고 차지하래요.
빈 방
네. 빈 방.
남자 혼자 사는 냄새나는 방이에요.
세제 냄새만 가득할 거라던 걸요.
아 정말 별 소리를 다 했군요. 이 자식 만나기만 해봐라.
만나긴 어려울 거 같은데요. 얘기 못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를요?
언니 싱가폴 근무 지원했다고 하던데
아... 못 들었는데.
오늘 출국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수형 씨... 언니 베프 맡기고 가니까 잘 챙기라고. 빈 방 이야기는 그때 나온 거예요. 잘 챙기라는 말 하면서.
얼마나 있다가 오는 거예요?
3년 정도 있어야 한댔어요.
그렇게 무심했던가. 당신은 새삼 연우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서둘러 나갈 이유가 뭘까. 공항은 가깝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야 할까.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순간 민영의 말을 놓쳤다?
네? 뭐라고 했어요?
오늘 그 빈 방에 가서 먼지 뒤집어 쓴 우산 주워도 되느냐고 물었어요.
공항은 가깝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야 한다고 당신은 생각하느라 민영의 말을 또 못 들었다. 공항은 가깝다.
동면 11
왜 싱가포르래요?
아... 언니 생각하고 있었군요. 뭐라고 했지. 아, 봄 뭐라 했는데... 봄을... 뭐지.
저기, 미안해요. 먼저 일어날게요.
봄이란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다. 민영의 놀란 얼굴을 뒤로 하고 카페를 뛰쳐나와 택시를 탔다.
공항이요. 최대한 빨리요.
택시가 나는 듯이 출발한다. 공항은 가깝다. 가면서 전화를 했다. 안 받는다. 문자를 남긴다.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기다리라고.
연우야 잠시만 기다려.
삼십 분 후 당신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연우 앞에 섰다. 연우는 당신을 왜? 냐는 눈으로 동그랗게 본다.
왜 말도 없이 싱가포르야?
아 정말... 말했잖아. 심각하구나. 너?
언제? 언제 말 했어?
일주일 됐을 걸? 너 빨래 넌다고 했잖아.
진짜? 아... 까맣게 잊었나보다.
근데 너 가슴 있는 여자 어따 두고 혼자야?
어? 그건 뭐 그렇고. 봄이 뭐야?
봄이 뭐야?
너 봄 어쩌구 하며 싱가포르로 간다고 했다며. 그 후배에게.
봄. 아 그 봄. 그래. 봄 때문에 간다. 지긋지긋한 봄이 싫어서.
봄이 왜?
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곳,
거기가 싱가포르야?
그래. 사계절 열대우림. 일년 내내 여름의 나라.
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딨어.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와.
그렇겠지... 암튼 나 간다. 민영이 잘 챙겨.
연우야 전화 할 거지?
봐서. 봐서. 3년 만 겨울 끊고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 싶기도 하고. 아 저기,
당신은 연우가 눈짓 하는 곳을 보다가 놀란다. 민영이 걸어오고 있다.
어? 어떻게 알았지
민영이는 한 번도 우산을 잃어버린 적이 없어. 그래서 내가 특별히 골랐잖니.
연우가 민영에게 손을 흔들고 당신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또 심장으로 때리게?
여기 든 얼음이 녹으면 생각해볼게. 겨울에게, 너에게 전화 할지 말지. 나 간다.
연우가 한쪽 눈을 찡긋 하고 출국심사장으로 간다. 가다가 뒤를 돌아서서 두 사람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크게 키스마크를 만들어 날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당신의 뒤에 민영이 와서 선다. 당신에게 민영의 손에 들린 노랑 우산이 젖은 게 보인다.
어? 비 와요?
네 겨울비가 내려요. 눈비가 와요.
아... 여기 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
우산 찾으러 왔죠. 저는 손에 들어온 우산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거든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