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요일 Oct 18. 2023

잠(JAM) 22

SF 장편소설

22. 나중에


그들은 별 지우개의 귀환을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교류가 중단된다는 것은 신연방의 별들이 서로 고립된다는 걸 의미했다. 신연방 행성 간의 고립은 곧 신연방의 해체를 초래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신연방의 일부 정치가와 기업 연합 사이에 극비 프로젝트가 수립되었다. 시한부 프로젝트이다 보니 예방 차원에서 개설이 예정된 공간에 소멸과 상관없는 어린 별들도 미리 치운다는 명목으로 무리하게 프로젝트에 포함되었다. 우주 공간에 일직선을 긋듯이 쭉 뻗어 휘어지지 않는 효율 100% 꿈의 터널이 탄생하는 것이다.


기업 연합이 주도하여 퇴행 항성을 소멸시키고 워프 터널을 건설하여 안전한 우주 항로를 확보하는 별 지우개 프로젝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실행되었으며 신연방 시민들의 토론에서 절대 불가하다는 공론이 형성되었기에 다수의 동의를 구할 수도 없었다. 별의 소멸, 무수한 딸림별 생명체의 말살 같은 잔학무도한 일은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대체 그런 일을 누가 동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워프 터널의 운영을 무기한 중단하고 다른 대안을 찾자는 말은 신연방의 자본가들이 들을 때 정신 나간 소리였다. 은하 간 교류 중단으로 인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에는 어마어마한 자금과 언제 끝날지도 모를 긴 시간이 필요했다. 기업 연합 측에서는 별 지우개 함선을 출항시키기를 원했다. 프로젝트는 3년의 준비 끝에 막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것은 딸림별 생명체들의 수많은 가능성까지도 완전히 말살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옛 지구의 마지막처럼 그들은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별 지우개의 함선들은 각각 맡은 영역에서 프로젝트 수행을 완료하면 히든 시스템이 모든 걸 장악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그들이 소멸시킨 별들처럼 그들도 결국 예정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단지 기주의 함선은 예상치 못하게 이룬이라는 서브 시스템이 메인시스템으로 전환되면서 메인시스템이 콘트롤 가능한 영역이 남아있게 되었다. 시스템 에러.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했는데 시간은 늘 가장 필요할 때 가장 부족하다.


주린. 이게 무슨,


이룬이 마침내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주린을 보았다. 아무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주린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버지보다 오래 살기로 했어요.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주린이 인접 통신망을 찾고 있습니다.

주린.



붉은 경광등이 명멸하는 실내가 다가올 마지막을 예시하고 있었다. 이룬이 기주를 깨웠다.


기주 일어나. 기주. 일어나. 어서. 기주!

- 주린. 왜 또 이룬 흉내를 내는 거야.


기주가 머리를 흔들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수면 가스의 영향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주린. 커피 마시자.

기주. 지금 커피보다 급한 일이 있어.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조금씩 눈이 열리고 귀가 뜨인다. 온통 붉은빛의 회오리가 물결치듯 주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지잉지잉 거리는 경고음도, 시간을 헤아리는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지?

함선이 폐쇄되고 있어. 시스템이 말을 안 들어.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어. 아무래도… 자폭 명령 같아. 주린도… 이상해졌어.

- 자폭?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주린이잖아?

기주 그 이야기는 나중에, 아… 나중이라니.


나중이라니… 이룬은 할 말을 잊었다. 나중이라는 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룬이란 사실을, 왜 별 지우개의 휴머노이드가 되었는지를… 기주에게 이야기해 줄 시간은 이제 없었다. 기주의 뒤를 따라온 그 이유, 끝까지 함께 있고 싶어서. 그 마지막까지 사랑하고 있음으로. 몸을 버린 이유를.


- 주린. 이 상황을 설명해 봐.

기주. 주린은 제정신이 아니야.

- 장난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주린?


시스템 에러로 반복적인 중얼거림을 계속하던 주린이 기적처럼 기주의 부름에 응답했다


기주?

- 그래 주린. 무슨 일이냐고.

아버지를 찾고 있어요. 기주.

- 아버지?

아버지, 표현하지 않는 뜨거움. 드러내지 않는 슬픔. 꿈 없는 미래, 사랑 아닌 가족… 희망 앞의 좌절. 최선과 최악…

- 주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해.

기주. 여길 벗어나야 해. 어서!


이룬이 기주에게 소용없으니 어서 탈출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기주는 두 목소리가 확실히 다름을 깨달았다. 한목소리에서 기주는 그리움 기다림 슬픔과 사랑을 들었다.


- 누구?

기주. 누군지는 알 것 없어. 어서 벗어나야 해. 시간이 얼마 없어. 이 함선은 곧 폭발해.


이룬은 기주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차라리 모르고 떠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기주. 착륙선을 타! 보급기지로 돌아가! 어서 서둘러!


이룬이 도크를 열고 로봇을 움직여 우주복을 입힌 기주를 강제로 착륙선에 밀어 넣었다. 경고음은 이제 남은 시간이 불과 10초임을 알리고 있었다.


주린이 근접 통신망을 찾고 있습니다. 주린이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린이 근접 통신망을,


아… 이룬이 깊은 탄식과 함께 착륙선을 모선으로부터 배출했다. 곧 작은 불빛과 함께 함선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스크린에는 어리둥절한 채 우주복 속에서 모선을 보는 기주의 얼굴이 보였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룬에겐 눈물을 만들 가슴도, 눈물을 퍼 올릴 심장도, 그 눈물을 흘려줄 눈도 없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이룬에게서 안녕, 이라는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안녕, 기주.


착륙선 안에서 모선을 바라보던 기주의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긴박한 상황에서 탈출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마치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아련하지만 따뜻한, 이건 뭐지… 라고 생각하던 기주에게 자신을 착륙선으로 밀어 넣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기주. 기주우, 늦었어. 어서 일어나. 응? 어서 일어나. 기주!


아, 또 주린이? 아니야 주린이 아니야. 기주는 일부러 그 이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쾅쾅! 착륙선 벽을 쳤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헬멧의 얼굴 부분이 하얗게 젖어간다. 헬멧을 벗었다.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올랐다. 구토가 치밀어 오르는 입술을 악물었다. 아니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름. 그 이름을 악물었다. 기주의 눈이 모선으로 향했다. 모선이 소리 없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폭발하고 있었다. 폭발로 흩어지는 잔해가 마치 길 안내라도 하는 것처럼 탈출선보다 앞서서 보급기지의 땅으로 낙하를 시작했다.


트트트트트트 트트트트틋, 선체를 스치는 모선의 잔해들에서 수없이 사라져갔던 빛나는 별들과 그 딸림별에서 말살된 생명체들의 마지막 인사가 들리는 듯했다. 기주의 손이 창을 스치는 잔해를 어루만졌다.


- 아, 나의…


마지막 그 이름이 입술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잠겨 착륙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기주의 고개가 숙여졌다.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가눌 수도 없었다.


- 이…


그때 마지막으로 폭발하는 모선의 한 귀퉁이에서 반짝하며 또 하나의 조각이 배출되었다. 기주의 착륙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작은 선체는 기주의 뒤를 따라 보급기지가 있던 별로 유성처럼 끝없이 낙하해갔다.



작가의 이전글 깔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