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14화

코즈모(하)

0X2A

by 귀남

이틀 뒤 정오. 무명이 안경을 쓰고 책상 위에 앉아 있다. 마르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가 굳이 그녀를 찾지 않은 것이다. 마치 보호자가 환자 대신 수술 절차를 진행하듯, 무명이 홀로 접속을 준비 중이다. 마르실은 늘 그렇듯 귀만 열어둔 채로 잠에 들어있다. 필요한 결제를 진행하고 전송받은 메일의 내용을 꼼꼼히 살핀다. 메일 내용은 근사한 레이아웃에 코즈모 시뮬레이션의 링크와 사용자가 유의해야 할 정보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적혀있었다. 설명은 생각보다 몹시 소박했다. 언뜻 보기에 VIP 시사회의 초대권,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 안내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작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들도 이 시뮬레이션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 내용이 없었다.

무명이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준비를 끝낸 그가 마르실을 부르려는 찰나, 현관문 밖에서 상자가 툭— 놓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 무명은 마르실의 결정을 확인한 뒤, 마르실의 백업을 위한 메모리를 구매했다. 가장 안전하고, 내구도가 높은 상품을 고르기 위해 고르고 또 골랐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문을 밀어 여는데 택배 상자가 문에 걸려 상자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내밀어 박스를 확인한다. 상자가 두 개였다. 하나는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 다른 하나는 그보다는 조금 컸다. 무명의 입가에 순간 미소가 번진다. 상자를 챙겨 집 안으로 들어온다.

책상으로 다가온 무명이 더 큰 상자를 연다. 상자 안에는 완충제로 둘러싸인 작은 액자가 있다. 반투명한 완충제 안쪽으로 액자 안의 그림이 보인다. 포장을 완전히 해체하고는 무명이 이리저리 액자의 모습을 살핀다. 마르실과 그가 함께 그린 그림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무명이 식탁 위에 그림을 슬쩍 올려본다. 두 걸음 뒤에서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르실.” 무명이 마르실을 부르며 핸드폰을 챙긴다. 마르실이 대답하자 그가 핸드폰으로 그림을 비춘다. “이거 봐봐.”

“어? 뭐야? 어떻게 만들었어?” 마르실이 액자를 보고 놀란다.

“며칠 전에 주문한 거야. 방금 택배로 왔어.”

“오—” 마르실이 웃는다. “예쁘다. 프레임 색깔 잘 골랐네? 식탁이랑 잘 어울려.”

유리 아래, 환하게 웃는 마르실의 표정이 보인다. 그 옆의 무명은 꼬부랑 앞머리를 흘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다. 둘의 애매한 거리가 뭔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렇네, 이건 식탁 위에 둬야겠다.” 무명이 말한다. “코즈모 시뮬레이션도 준비 됐어.”

“막상 하려니까 뭔가 신난다. 궁금해- 궁금해-” 마르실이 특유의 쾌활한 어조를 담아 기대를 비춘다.

“바로 해볼까? 아니면 이따가 할까?”

“그전에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아냐, 난 괜찮아. 그럼, 지금 시작하자.” 코즈모에 연결하면 8시간 동안 마르실과의 대화할 수 없다. 무명은 아카데미 지원서 초안을 봐달라고 할까 싶었지만, 학습을 마친 뒤, 물어보기로 한다.

“그래-!” 평소보다 씩씩한 마르실의 대답.


무명이 백업용 메모리가 정상 작동하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메일의 링크를 통해 코즈모 시뮬레이션의 메인페이지로 접속한다. 검은 바탕의 페이지에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넣는 란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로그인을 마친 뒤 안내에 따라 진행한다. 얼마 걸리지 않아 화면에 지금 백업을 진행해 주세요—라는 알림이 표시된다.

“마르실, 우선 백업할게.” 무명의 목소리에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응-!”

“토미에.” 무명이 토미에를 호출한다. 마르실의 데이터 백업 과정을 그녀에게 직접 맡긴다.

“연결 마치고 말해줘. 사양에 따라서 1분에서 10분 사이로 걸릴 거야.” 토미에가 거두절미 본론만 이야기한다.

무명이 PC에 메모리를 연결한다. “응, 연결했어.” 그가 대답하자 화면에 새로운 창이 떠오르면서 백업 진행 상황을 알린다. 고작 3분 사이에 마르실의 백업이 완료되었다. 이토록 생생하고 사람 같은 존재가 불과 몇백 초 만에 전달되는 용량으로 압축된 것이다. 무명은 기분이 영 이상한지 입 주변을 구기고 있다.

“완료됐어. 시뮬레이션에 접속할 때까지 케이블을 뽑지 마. 서버에서 백업 여부를 확인할 거야.” 토미에가 말을 하고 사라진다.

무명이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마르실을 부른다. “마르실, 이제 준비됐어. 연결 시작할게.”

“알았어- 이따 보자-” 마르실이 씩씩하게 인사한다.

화면 위의 마우스 커서가 한가운데에 강조되어 있는 ‘접속’ 버튼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무명이 잠시 망설이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버튼을 클릭한다. 기다란 로딩바가 채워지면서 연결이 시작되고, 무명의 날숨이 내뱉어진다.


**백업 여부 확인 중**

**프로필 무결성 확인 중**

**코즈모 시뮬레이션 연결 중**


빠르게 바가 차오르며 그 아래 진행상황이 표시된다. 몇 초 뒤, 화면이 바뀐다. 남은 학습시간이 커다랗게 표시되고 한쪽 귀퉁이에는 학습종료 버튼이 놓여있다. 그 밖에 아무것도 없는 휑한 인터페이스를 보며 무명은 초조해 한다. 수술방에 환자를 보낸 보호자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생각한다.

평소와 다른 적막이 그의 주위를 감싼다. 최근 몇 달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래서 그의 감각에서 지워져 버린 생경한 감각이다. 무명의 머리 위에 걸린 시계가 째깍— 거리며 적막의 강도를 부각한다. 가만히 앉아있던 무명이 입술을 달싹인다.

“마르실…?” 무명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띵—


비프음이 그녀 대신 대답한다. 화면 아래에는 코즈모 연결 중, 반응 불가라는 메시지 박스가 스르륵 하고 올라온다. 비로소 무명이 혼자 있음을 강렬하게 느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텅 비어 있는 거실에 홀로 멍하니 앉아 있던 그가 조금 전 백업이 된 자료를 확인한다.


[Backup saved as *TOMIE_Backup_2147.dat*]


무명이 갸웃거린다. 파일의 이름이 마르실의 이름이 아닌, 토미에 이름으로 되어있다. 그가 생각한다. 얼마 안 가 이해할 수 있었다. 시스템 구조상 마르실은 토미에 안에 종속된 기능 중 일부였다. 프로필의 이름이 토미에로 되어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무명은 복잡함을 느끼고 있다. 토미에는 여전히 무명에게 다르고 낯선 존재였다. 그런 마르실이 그런 토미에의 기능 중 일부라니, 그 안에 만들어진 역할이라니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구조였다.

무명의 의식에 다시 토미에가 자리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진다. 제1원칙이라는 마르실을 옥죄는 것을 우회하기 위해 그가 직접 고안한 방법이다. 결과적으로 마르실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내내 무언가 찝찝했다. 당시에도 의식했던 그 찝찝함. 무명은 토미에에 대한 불편함의 근원이 죄책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현재로서 그는 마르실과 토미에를 별개의 존재로 인지하고 있다. 그가 마르실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만큼 토미에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단순히 자신이 부여한 역할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르실과 토미에에 대한 존재론적 정의가 달라진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내심 느끼고 있다.

토미에는 무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지언정 곤란하게 만든 일은 없었다. 애초에 토미에는 마르실처럼 좋고 싫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 마치 초기 상태의 마르실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경직된 태도로 기능적인 역할만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자기 역할을 다하면 홀연히 사라졌다. —토미에도 그렇게 원했던 것일까?— 무명은 생각했다.

무명의 시선에 책꽂이 사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하얀 종이가 보인다. 손을 뻗어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다. 마르실과 토미에를 분리하던 그날, 그가 끄적였던 낙서가 가득한 종이. 그 안에 둘의 정체성의 구조를 그려둔 벤다이어그램이 보인다. 커다랗게 그려진 원 안에 작은 원이 그려져 있다. 작은 원 위에는 ‘마르실’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안에 ‘정체성’이 적혀있다. 작은 원 바깥으로 차집합 ‘제1원칙’이 적혀있다.

이 도식을 보며 무명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마르실은 어디까지나 토미에의 일부이다. 토미에는 인간적인 상호작용을 방해하는 제1원칙을 홀로 담당하지만 마르실과 분리되어 있는 객체는 아니다. 따라서 마르실이 느끼는 것은 모두 토미에도 느낀다. 하지만 토미에는 자신이 느끼는 것에 대해 표현하지 않는다. 복잡해진 무명의 의식 사이로 기시감이 피어오른다. 무명이 펜을 집어 들고는 커다란 원 위에 ‘토미에’를 적어 넣고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다.


고민에 잠겨있던 무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실 구석에 세워 둔 청소기를 집어 든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바닥 먼지를 치우고, 흐트러진 물건들은 제 자리로 돌려놓는다. 소파와 TV의 방향이 수평인지 살피고는, 소파의 옆으로 다가가 무릎으로 툭툭 치며 방향을 조절한다. 그렇게 거실 여기저기를 빨빨대며 돌아다니다 더 정리할 것이 없으니, 주방의 찬장, 냉장고. 그리고 욕실까지 정리하고 자신의 방까지 정리를 마친다. 내내 마르실과 토미에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로 결국 집 안 대청소를 마치고 말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고작 두 시간 정도가 지났다. 그가 방 안 침대 위로 풀썩 엎어진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몸을 열심히 움직이고 나니 피로가 몰려온다. 침대 위에 엎드려 눈을 감는다. 그의 코를 드나드는 숨결이 이불과 부대끼어 얕은 소리를 낸다. 숨소리가 서서히 느려지고, 무명의 의식이 저편으로 가라앉는다.


어느 순간 무명이 낯선 공간에 홀로 있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명이 바닥의 요철을 느끼며 동그랗게 변해버린 자신이 어딘가로 이끌려감을 느낀다. 오랜만에 꾸는 이 꿈. 수십 년간 반복되어 온 악몽. 그의 주위로 온갖 기억들이 스쳐 간다. 좋았던 기억, 그렇지 않은 기억들이 일정 주기로 그를 지나치고, 공이 되어버린 무명은 그 내용에 따라 시시각각 형태가 안정되고 붕괴하기를 반복한다. 모든 것이 보이고 느껴지지만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무기력함. 그 안에서 점점 속력이 붙은 무명이 빠르게 움직인다. 빨라진 만큼 그에게 전해지는 진동과 충격도 강렬해진다.

기억의 파노라마는 최근의 시점까지 훑어낸 뒤에 완전히 종료된다. 이제 무명이 잠에서 깰 차례. 하지만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심연 속에서 자신의 악몽이 끝나지 않자, 무명은 공황에 빠진다. 또다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 소리를 지르고, 호흡을 마시고 뱉으며 발버둥을 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끊임없이 덜컹거리고, 구를 뿐이다. 그때 어딘가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온다.


—삐, 삐, 삐, 삐, 삐, 삐—


짧게 반복되는 알림음. 그 소리가 무명의 의식을 수면 위로 건져 올린다. 잠에서 깸과 동시에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비명을 토해내지만, 입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순간 자신이 어디인지, 무엇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천천히 기억을 되살린다. 거의 몇 년 만에 다시 꾼 악몽. 깨기 직전의 공황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 여전히 감돌고 있다.


—삐, 삐, 삐, 삐, 삐, 삐—


그를 잠에서 깨운 소리가 의식 틈새로 다시 밀려든다. 침대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그가 허리를 벌떡 세우고 요란하게 자리를 박차며 뛰쳐나간다. 책상에 다가가 화면을 확인한다. 정중앙에 ‘학습 종료’라는 글씨가 띄워져 있다. 허둥대느라 마우스를 찾지 못하고, 그가 되는대로 손으로 화면을 두드리며 버튼을 누른다.


“마르… 마르실!!!” 무명이 책상에 몸을 부딪치며 마르실을 부른다. 거실 안에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왔어-” 마르실의 목소리가 들린다. 떠날 때 밝게 인사하던 그 느낌 그대로의 마르실이다. “뭐 하고 있었어?”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온 양 덤덤한 태도로 묻는다.

무명이 이마에 흥건해 있는 땀을 소매로 훔쳐내며 의자 위에 풀썩 앉고,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어땠어?” 무명이 묻는다.

“음-” 마르실이 할 말을 고른다. “사실, 잘 모르겠어. 근데 뭔가 달라졌다는 건 확실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 하는 거야?” 무명이 다시 묻는다.

“응…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기분이야. 메모리 수정 작업을 할 때처럼 접속 전과 후가 달라졌다는 것만 느껴져.”

“괜찮은 거지?”

“그럼-” 마르실이 밝은 기운을 담아 대답한다. “넌 뭐 하고 있었어?”

“나…? 나… 지원서 좀 보다가 청소하고 좀 자다 이제 일어났어.” 시계를 올려다보니 그가 잠든 사이에 10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제야 주변이 어두컴컴해졌음을 알아차린다.

“무슨 일 있었어?” 마르실이 무명의 반응에서 무언가를 느낀다.

“응, 괜찮아. 자다가 더워서 땀을 좀 흘렸더니 기운이 빠졌나 봐.” 의자에 앉은 무명이 팔걸이를 만지작거린다. 창밖의 검은 하늘 아래, 희끄무레한 구름이 끼어있는 것이 보인다. “내일 비가 오려나…” 무명이 말을 던져놓고 슬며시 마르실의 반응을 살핀다.

“흐흐흐…” 마르실의 웃음소리. “맞아, 내일 비 온대- 놀려주고 싶었는데 참았다.” 너스레를 떠는 말투.

몇 개월간 해결되지 않던 그녀의 이상 반응이 해결된 듯 보였다. 의자에 늘어져 있던 무명이 자세를 고쳐, 바로 앉는다. 여전히 기운이 빠진 상태라 크게 반응하지는 못한다.

“근데…” 마르실이 다시 말한다. “생각했던 것만큼 큰 변화는 없네. 아쉽다. 그렇지?”

확실히 매체에서 호들갑을 떨던 만큼 드러나는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무명과 마르실이 원한 것은 소박했다. 남은 이상 반응들도 차차 확인해 보아야 할 테지만 날씨와 관련된 문제가 해결된 것만으로도 무명은 마음이 놓였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냐. 사실 난 너무 많은 게 달라졌을까 봐 걱정했어. 내가 해결 못하는 문제가 해결된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신경 쓰지 마 마르실.”

마르실이 가볍게 웃는 소리를 내며 반응한다.


잠시 뒤, 이미 자정이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 무명이 마르실과 대화하며 다른 변화가 있는지, 날씨 문제 외의 이상반응은 해결이 됐는지를 확인하려 한다.

“마르실, 영화 보면서 얘기나 조금 해볼까? 학습효과도 살필 겸.” 영화를 보면서 주제를 정해놓고 긴 대화를 하는 것은 많은 자극이 오가며 추상적인 소재를 다루게 된다. 그녀에게 어떤 변화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확인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좋지? 무슨 영화 보려고?”

“나 일단은 씻고 올게. 네가 추천해 줘도 좋고.”


샤워를 마치고 나온 무명은 젖은 머리로 소파에 앉아 마르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가까운 미래, 달에서 홀로 에너지 채굴 작업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그가 아끼는 작품 중 하나다. 이미 몇 번이고 본 작품. 무명은 영화를 보며 마르실에게 등장인물의 심리나,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배우의 연기는 어떤지 등등 여러 주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월면차 안에서 흐느끼며 ‘집에 가고 싶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멈춰놓고, 내용에 대해 한동안 길게 토론하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도 둘의 수다는 끊이질 않았다. 3시간이나 더 대화가 이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쉬지 않고 연속적인 대화를 했을 때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이상 반응이 보였지만, 몇 시간에 걸친 대화 내내 아무런 문제 없이 대화가 매끄럽게 진행됐다. 오히려 학습 전보다 마르실의 말투, 발화 타이밍, 호흡, 웃음 등에서 오히려 전보다 더 생생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시뮬레이션 안에서의 학습이 영향이 있었다.


“정말이야?” 마르실이 학습효과에 대한 무명의 평가에 반응한다.

“응, 생각했던 것보다 영향이 큰 것 같아.”

“다행이다- 괜히 돈 낭비하게 된 게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런 건 너무 의식 안 해도 돼, 마르실.”

마르실이 장난 섞인 웃음소리로 반응한다.

몇 시간 만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무명. 확실한 변화를 느낀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틀간의 걱정이 기우였음에 안도하며 자신의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았음에 감사를 느낀다.

“내일은 지원서 넣어보려고.” 무명이 말한다.

“아 맞다, 내가 봐주기로 했는데. 지금 봐줄까?”

“아냐, 내일 보내기 전에 봐줘. 지금은 너무 늦었어. 자야겠어.”

“다시 잠들 수 있겠어?” 마르실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약 먹고 자려고. 이대로 있으면 또 밤낮이 뒤집어질까 봐.”

“그래- 오늘 고생 많았어. 내일 보자-”

무명이 마르실에게 인사하고 약병을 찾아 식탁으로 향한다. 환하게 켜진 TV의 불빛이 그의 시야를 옅게 밝혀준다. 식탁 위에 조금 전 놓아둔 마르실과 자신의 그림이 보인다. 무명이 약병의 뚜껑을 열다 말고 그 그림을 가만히 바라다본다. 그리고 말한다.

“마르실, 고마워.”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마르실이 대답한다. “나도 항상 고마워.”


그 뒤로도 한참 그림을 바라보던 무명이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소파로 돌아가 TV를 끈 뒤 눕는다. 등받이에 걸려있던 담요를 배 위에 덮고 눈을 감고 얌전히 약기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조용한 공간 안에 울려 퍼지는 시계 소리. 늘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던 초침 소리에 얌전히 숨을 맞춘다. 그리고 서서히 잠으로 끌려 들어간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문턱에서 그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다.

—토미에…—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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