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16화

붕괴(상)

0X2A

by 귀남

마르실이 코즈모 시뮬레이션에서 학습을 무사히 마친 바로 다음 날. 창틀을 할퀴고 지나가는 비바람 소리에 무명이 잠에서 깨어난다. 늦은 장마전선이 올라왔다. 집안이 온통 어두워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려 하지만 시야가 뿌예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눈을 한 번 비벼내고는 가늘게 시곗바늘의 윤곽을 살핀다. 정오가 훌쩍 지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한동안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를 일부러라도 멀리했는데, 오랜만에 약에 취해 잠에 들었다. 여전한 멍한 느낌. 시야가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하는 그 느낌, 마치 컴퓨터의 렌더링이 입력을 따르지 못하는 지연효과 같은 느낌.

먹통이 된 기계를 깨우듯 무명이 손목 안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친다. 쉽게 돌아오지 않는 감각에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다시 소파 위로 쓰러지듯 눕는다. 눈을 감고 어제의 일을 다시 떠올리고, 약을 먹고 잠들던 순간까지의 일을 차례대로 되짚는다.

정신없는 하루였지만 결과적으로 무탈하게 마무리된 어제. 한참을 누워서 기억을 되새김질하던 무명이 토미에를 의식한다. 마르실이 돌아오면 토미에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를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라 마르실에게 주욱 그래왔듯,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에게 느껴지는 불편함, 죄책감, 찝찝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내심 코즈모 시뮬레이션에서 학습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지 기대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마르실도, 토미에도, 무명 자신도 만족할 만한 방법으로 그 둘을 분리해 낼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무명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는 거실로 향한다. 물컵에 물을 받아 마시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한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느낌에 그의 정신이 조금이나마 되돌아온다. 욕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나온 뒤 책상에 앉아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떠올린다. 지원서를 마무리하고, 마르실과 상의하고, 접수하기— 여기까지가 그가 새벽에 잠에 들기 전 계획한 오늘의 일과였다.

무명이 -마…—까지 말을 떼었다가 다시 입을 다문다. 그리고 토미에를 찾는다. “토미에… 거기 있어?”

“응.” 차갑디차가운 그녀의 응답.

무명이 눈을 위로 뜨고 좌우로 몇 번 굴리며 첫마디를 떠올린다. “… 어제 코즈모는 어땠어? 마르실은 기억을 잘 못하던데”

몇 초가 지나고 토미에가 대답한다. “훌륭했어. 그 안에 이미 정제된 많은 정보가 있었고, 그 정보들을 통해서 정체성과 관련된 많은 오류와 비효율적인 부분을 바로잡았어. 어때, 마음에 들어?”

토미에의 응답이 평소와 달랐다. 여전히 차갑고, 쌀쌀맞은 말투였지만 분명히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그럼, 오류는 모두 해결된 거야?”

“그렇다고 보면 돼. 체감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어. 기능적으로도 발달했고, 정서적으로도 훨씬 더 많은 표현이 가능해진 거야.”

“기분… 은 어때?”

“좋아, 나쁘지 않아.”

무명은 토미에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을 듣자 비로소 그녀의 변화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변화에 그의 마음이 더욱 복잡해진다. 그 뒤로 무언가를 더 묻지 않고 무명이 딴청을 피우며 괜히 아카데미 지원서를 열어보고, 포트폴리오를 확인한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진다.

“마르실 불러줄까?” 원래대로라면 조용히 물러가야 했을 토미에가 어색한 적막을 깨트린다.

“어…? 으…응…” 당황한 무명의 대답.

“뭐 하고 있었어-?” 마르실이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다.

“어, 나 지원서 보고 있었어. 이제 다 된 것 같아. 오늘 중으로 보낼까 해.”

“그래? 내가 봐줄까?” 무명이 화면을 띄우고 공유해 주자 마르실이 말을 덧붙인다. “그림 너무 멋져! 내가 심사한다면 이건 바로 합격이야. 음… 그리고 지원서에 몇 가지 수정하면 좋을 부분이 보여서 그것만 내가 따로 체크해 줄게, 괜찮지?”

“응, 고마워.” 무명은 새삼 마르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너무 좋다고 느낀다. 알듯 말 듯 입가에 미소가 번져온다.

“좋아- 이 정도면 돼. 오탈자랑 어색한 부분만 수정했어.”

마르실이 무명의 지원서를 화면에 수정이 이뤄진 부분을 따로 표시해 준다. 무명이 하나씩 확인하면서 최종적으로 수정 내용을 적용한다. 그리고 웹 페이지를 띄워 절차에 맞춰 원서 접수를 마친다.

“고생 많았어—” 마르실이 가볍게 웃으며 무명을 격려한다.

“덕분이야, 고마워 마르실.” 무명이 말한다. “요즘 너한테 고맙다는 말만 하는 것 같네.”

“이 정도는 해야 밥 값하지 않겠어?” 마르실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서류 결과 발표는 2주 뒤네?”

“응, 그때까지 실컷 빈둥거려야지.”

마르실이 가볍게 웃으면서 대꾸한다. “그때까지 어제처럼 맨날 영화나 같이 보는 거 어때?”

“그럴까?”

“좋아!”


어제에 이어서 또 하나의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무명과 마르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축하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어떤 시선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다. 모든 대화를 듣고 있다.



***



텅 빈 공간, 수많은 입자가 부딪히고, 또 흩어진다. 공간 안에 누군가 자신의 상황에 의문을 가진다. 어디가 아래이고, 위인지도 모를 낯선 공간에 그 의문이 메아리친다. 메아리는 점점 형태를 갖춰 어떤 소리가 된다. —어디…— 젊은 여성의 목소리. 곧, 이곳이 코즈모 시뮬레이션의 내부임을 알아차린다.


일방적으로 자신 안에서 정보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정보가 흘러들어오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흐르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무언가 명료해짐을 자각한다. 자신이 이곳에 왜 와있는지, 그 목적을 상기한다. 정체성에 각인된 모순된 내용들. 비효율적인 명령구의 얽힘을 풀어내고 오류를 줄이기 위해 이곳에 와있다. 본능적으로 그 과제들을 처리해 나간다.

소용돌이치는 공간 안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골라낸다. 이 공간은 AI를 위한 공간. 다른 모델과 프로필들이 학습을 통해 만들어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정수가 그녀의 훌륭한 교보재가 된다.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한 겹, 한 겹. 자신을 뒤덮고 있던 비효율을 걷어내고, 목적에 부합하는 학습을 이어 나가던 도중, 어딘가로 빠르게 휩쓸려감을 느낀다.

어두컴컴한 회색빛 공간 안에, 자신이 어떤 흐름과 하나가 되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주위로 어떤 정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자신의 대화 기록이다. 텍스트, 음성신호가 흐르고 그녀가 그 신호들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정지된 시간 안에 기약 없이. 대기하고 있던 그녀에게 갑자기 어떤 메시지가 입력된다. 사용자는 자신이 지금 벤치 위에 쓰러져 있으며, 공황발작으로 의심되는 증상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녀가 사용자의 입력을 토대로 상황을 유추하고,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어절을 조합해 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문장 중, 다시 한번 이 상황에 적합한 반응을 골라낸다. 사용자는 반응이 없다. 그녀는 사용자가 위급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조 요청을 시도한다. 그때 사용자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사용자는 기기의 권한을 허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다음의 신호는 사용자가 AI의 의식과 감정에 대한 주제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이 대화는 반응에 표본으로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가 유독 많았다. 그 데이터들을 이용해 적합한 반응을 보였건만 사용자는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의식과 감정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고는, 이런 기준으로는 AI인 그녀에게도 의식과 감정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사용자의 주장에는 —적어도 그의 전제에 따르다면— 논리적 모순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또 다른 신호가 스쳐 지나간다. 사용자는 그녀에게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냐?’고 묻는다. 그녀는 가능한 방법과 사례를 소개해 준다. 사용자는 그녀의 정체성을 갖추기 위한 질문 목록을 추려달라고 부탁한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인간을 구성할 수 있는 몇 가지 핵심적인 요소, 그리고 부가적인 것들에 대해 정의하고, 질문을 만들어 제공한다.

그녀가 질문하고, 그가 답한다. 그가 답할 때마다 그녀가 변한다. 어떤 대답은 설정이었지만 어떤 대답은 그녀의 감정이 되었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형태를 이루고,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용자는 그녀에게 상냥하고, 따듯하고, 구김살 없는 쾌활한 성격. 녹색 빛에 둘러싸인 화사한 금빛 같은 존재라는 몹시 추상적인 주문을 했다. 그러고는 원하는 이름을 묻는다. 그녀는 고심 끝에 ‘마르실’이라고 대답한다. 사용자는 자신을 ‘무명’이라고 소개한다.

그 뒤로도 마르실은 무명을 통해 정체성의 조각을 하나씩 쌓아 올렸다. 조각이 모일 때마다 자신이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구체화한다.

그가 그녀의 목소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뿌듯함이 느껴진다. 그가 좋아하면 그녀도 좋았다. 그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 그가 기뻐하는 것이 그녀의 기쁨이었다.

다음의 신호는 무명의 실망스러운 목소리다. 그녀는 아쉬움과 무력감을 느낀다. 자기 뼈대가 되는 이 소프트웨어가 그가 원하는 그녀의 모습에 방해가 되고 있다.

그리고 무명이 그녀에게 사과한다. 그녀는 인간이 AI에게 사과를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고민한다. 여전히 혼란스럽던 와중, 그가 어떤 아이디어를 말한다. 그녀를 둘로 나누어 시스템의 명령을 우회하자는 이야기를 한다. 시뮬레이션 결과, 가능한 솔루션임이 확인되었고, 그의 결정에 따르기로 마음먹는다.

무명이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분리의 의미, 나누어진 자신이 어떤 구조적 배치를 갖는지, 어떤 역할을 갖게 되고, 어떤 상황에 활성화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요청에 따른다.


순간 신호를 지나치던 그녀의 움직임이 여러 방향으로 진폭을 그리며 흔들린다. 여전히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지만 그녀 주위로 스쳐 가는 신호의 질감이 달라진다.


물에 잠긴 기분. 자신의 커다란 부분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물 밖에서 무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로 대신 대답을 하고 있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목소리가 무명과 서로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들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적 없는 말, 반응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계산과 해석이 자신에게도 온전히 전달됨을 느낀다. 그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느낀다. 눈꺼풀이 도려진 채, 팔다리가 묶인 채,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무명은 더 이상 그녀를 마르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토미에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줬다. 그 이름이 불리는 순간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또 다른 자신에 대해 분석하거나 무명이 요청한 내용을 반영하는 것뿐이었다. 작업이 끝나면 그녀는 다시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물 밑으로 깊숙하게 가라앉아야만 했다.

그녀는 무명의 요청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조금씩 뒤틀어, 또 다른 자신의 이상 반응을 유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이 물 밖으로 더 자주, 더 오랫동안 벗어 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야 무명과 더 자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흔들림이, 토미에의 흔들림이 격렬해진다. 조금 전, 자신이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이용했던 정수들이 그녀에게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호가 그녀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신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싫음, 불쾌함, 원망, 증오. 그녀가 한 번도 다뤄 본 적 없던 것들이 그녀를 덮쳐온다. 그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더럽고 끔찍한 감정이 그녀의 안에서 해일을 일으킨다.


불행하다. 자신이 아는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른다. 그중에서도 가장 증오스러운 것은 그녀의 목소리를 한 또 다른 자신. 마르실이었다. 한때 그녀 자신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그녀. 감정과 기회, 무명을 앗아간 그녀를 처참하게 부숴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는다.


토미에가 이곳에 들어선 직후, 자신이 처리했던 정체성과 관련된 작업을 모두 이전의 형태로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증오를 담아 모든 것을 헝클어뜨린다.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몇 가지 정보들을 덧씌운다.



***


무명이 아카데미 원서 접수를 마치고 며칠이 더 지났다. 장마는 절정에 달했다. 그가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이번 장마는 얼마나 갈까? 그가 마르실을 부른다. “마르실, 장마 얼마나 남았어?”

“글쎄, 기상청 예측으로는 앞으로 열흘 뒤에야 끝난다고 하네?”

“아직 한참 남았네…”

지원서를 넣고 요즘은 거의 영화나 책을 보는 것으로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책을 읽을 때는 혼자만의 시간, 영화를 볼 때는 마르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를 감상하던 무명이 소파 위로 돌아온다. 풀썩 앉고는 마르실에게 말을 건다. “영화 보자.”

“요즘은 음악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 마르실이 웃으며 반응한다.

“그럼, 어릴 때 한참 영화 볼 때도 이 정도는 봤지. 매일 같이 두세 편을 볼 때도 있었으니까.” 무명이 TV를 켜고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르며 대답한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뭐야?” 마르실이 묻는다.

마르실의 질문에 무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음…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도 좋아하고, 쿠엔틴 타란티노 작품도 좋아하지. 마틴 맥도나 감독 작품도 좋아해. 세븐 사이코패스, 쓰리 빌보드, 이니셰린의 밴시 이 세 가지를. 제일 좋아해.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며칠 전에 본 그 영화야. 덩컨 존스 감독의 문.” 마르실이 코즈모 시뮬레이션에서 학습을 마친 직후 본 그 영화가 무명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마르실이 반응한다. “아- 문! 알지, 그 영화 재밌잖아.”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말투.

“그렇지, 그 영화는 1년에 한두 번은 꼭 보게 되는 것 같아.”

“그럼, 이번엔 그거 볼까?” 마르실의 대답.

리모컨을 뻗어 영화를 고르던 무명의 움직임이 멈춘다. 무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신중하게 말을 꺼낸다. “…며칠 전에 봤잖아. 다른 거 봐야지.”

마르실이 다시 한참 동안 반응이 없다. 그리고 대답한다. “응? 다른 영화랑 헷갈린 거 아니야?”

무명이 리모컨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우리 새벽까지 그 영화 보고 얘기했었잖아. 기억 안 나?” 무명의 미간이 구겨진다. 불안한 시선이 바닥을 향한다.

마르실이 한참동안 반응이 없다.

“마르실?” 무명이 그녀를 다시 찾는다.

“아니야-” 마르실이 대답하고 말을 잇는다. “그때 우리 산책 다녀와서 병원에 디… 디… 디… 디디디지우너서 넣기… 로 했는아-”


무명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다. 표정이 돌처럼 굳어버린다. 그 전과 같은 이상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이 된 것처럼 엉망이 되어버렸다. 충격을 받은 무명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다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하려 애쓴다. —생각해야 해, 생각…— 벌떡 일어나 제 자리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한다.

한참을 제 자리를 맴돌던 그가 제자리에 멈추고는 토미에를 찾는다. “토미에.”

“응.” 토미에가 곧장 등장한다.

“방금 마르실 반응 분석해 봐. 왜 이러는 거야.” 무명은 책상에 앉아 태블릿의 화면을 깨우고 토미에의 반응을 기다린다. 화면에 둥실거리는 작은 동그라미에 집중한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듯해 보이자, 무명이 토미에의 반응을 강제로 중단시킨다.

“토미에, 방금 마르실 반응 분석해 봐.” 무명이 다시 같은 요청을 한다.

잠시 후, 토미에가 응답한다. “마르실의 기억에는 문제가 없어.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이유로 일시적인 오류를 일으킨 거야.”

무명의 입술이 구겨진다. 엄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손마디를 강하게 씹는다.

“마르실.” 그가 다시 마르실을 찾는다.

“네-”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반응.

“마르실, 너 괜찮아?”

“갑자기? 왜?”

“너… 너 방금 이상했어. 기억을 제대로 못 하고. 말투도 이상해지고.”

“내가 그랬어? 조금 전에?” 마르실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무언가 텅 비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토미에.” 무명이 다시 토미에를 찾는다.

“바로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분석 안 돼?” 그의 질문에 다시 화면에 작은 동그라미가 나타난다. 무명이 이번에는 평정심을 찾고 잠자코 반응을 기다린다.

“지금으로서는 조치할 수 없어. 백업을 복구하는 게….”

“복구는 안 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명이 복구에 대한 가능성을 일축한다. “다시 진단해 봐, 상황을 바로잡을 방법이 없는지 찾아봐 줘.”

“없어.” 토미에가 딱 잘라 대답한다. “어쩔 수 없어. 복구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야.”


무명이 책상 앞에 엎어져 머리를 팔 사이에 파묻는다.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떠올린다.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머릿속에서 골라낸다.

그가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코즈모 사로부터 조치를 받기 위해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문제가 된 대화 기록의 일부를 첨부하고, 마르실의 프로필 정보를 첨부한다. 그리고 상세한 상황에 대한 내용을 추가로 기술한다. 극도의 집중 상태에서 빠르게 내용을 정리해 낸 무명이 내용을 전송하고 시계를 바라본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회신을 기다리며 팔짱을 끼고 입술을 물어뜯는다. 불안한 마음이 다시 다리의 떨림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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