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19화

시시포스

0X2A

by 귀남

장마전선을 타고 북상한 태풍은 엊저녁부터 강풍을 몰고 오더니, 아침부터는 도시를 통째로 찢어발길 듯 휘몰아친다. 어딘가에서 날아든 깡통이 창문 밖 골목에 여기저기 부딪히고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꽉 닫혀 있는 무명의 방 창문이 풍압에 들썩이며 시위한다. 집 안의 모든 조명이 꺼진 채, 오직 태풍 소리만이 가득하다.

밖의 날씨가 흐린 탓에 지금이 오전인지, 늦은 오후인지도 구분되질 않는다. 무명은 방 안에 자기 침대에 죽은 듯, 미동 없이 엎드려있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입에 댄 것이라고는 작은 생수 두 통과, 맥주 몇 캔이 고작이다.

얼굴의 반을 침대에 파묻은 채, 그가 엎드려있다. 순간 창밖이 번쩍이고, 잠시 뒤 건물을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린다. 어찌나 요란스러운지 침대에 그 진동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반쯤 감긴 죽은 눈을 끔뻑거리고만 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의 화면이 밝게 빛난다. 한참 뒤에야 무명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Web 발신] 안녕하세요, 루멘 아카데이미입니다. 하반기 신입생 서류지원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면접 안내를 아래와 같이 드립니다.


눈꺼풀은 그대로 둔 채, 눈썹을 슬쩍 올려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뒤집는다. 그의 손등이 벌에 쏘인 듯 크게 부었다. 손등에는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다. 그가 다른 손을 뻗어 상처 위에 앉은 딱지를 꾹— 하고 눌러본다. 아린 통증이 손끝 주위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그가 힘을 풀지 않고 계속 누르자, 딱지 사이로 탁한 진물이 찔끔 흘러나온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토미에의 마지막 말에 순간 이성을 잃고 말았다.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고,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박살 내던 그때의 그에 비하면 지금의 모습은 마치 죽어있는 시체처럼 고요하다. 외부의 자극에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토미에는 불러도 반응이 없다.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막 성인이 되었을 때의 그는 자신의 인생이 마치 시시포스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시시포스는 자신의 몸집보다도 큰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는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바위는 다시 반대로 굴러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시시포스는 다시 그 아래까지 내려가,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고,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졌다. 역경의 끝에 찰나의 성취, 그리고 그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시시포스를 자신에게 빗대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 형벌이 이토록 길게 이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도 언젠가는 위안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바위 올리기를 포기한 순간, 마르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천둥이 친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는다. 발에 걸리는 페트병과 캔을 대충 발끝으로 밀어 치운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는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적고, 핸드폰의 잠금 설정을 해제한다. 협탁 위 충전기에 핸드폰을 고이 두고는 몸을 숙여 협탁의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무언가를 잡아 꺼낸다. 둥글게 말린 등산용 밧줄이다.

거실로 나온 그가 천장에 가로로 길게 이어진 나무 기둥에 줄의 한쪽 끝을 던진다. 그가 쥐고 있는 밧줄에는 이미 고리 매듭이 만들어져 있다. 마치 넥타이를 묶을 때 처럼, 양손으로 줄 끝을 잡고 길이를 조절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등 뒤에 있는 식탁 의자를 가져와 밟고 올라선다. 기둥에 매듭을 단단히 묶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높이를 확인한다. 고리 매듭 안에 머리를 넣고, 몸에 힘을 풀면서 발아래의 의자를 걷어차 버린다.

“크헉!” 성대가 막히면서 단발의 파열음이 터져 나온다. 의식이 혼미해지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낯설다. 귀가 먹먹해지고, 거센 심장박동 소리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발버둥이 생존 본능에 의한 것인지, 그저 매달려 있기 때문에 허공에서의 흔들림인지 알 수 없다. 바깥의 태풍 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물에 잠긴 채 듣는 수면 바깥의 소리처럼 먹먹하게 들려오더니 서서히 작아진다. 시야가 완전히 검어지고 의식이 닫힌다.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분, 마치 그가 꾸던 악몽 속에서의 그 기분. —죽은 건가?—라고, 생각하는 찰나, 여전히 바깥의 태풍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누군가 현관문을 쿵, 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의 시끄러운 발소리와 고함이 들린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바닥으로 내린다. 그리고 어디선가 마르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거의 다 왔어.’



***



—다 왔다니, 무슨 말이야? — 무명의 의식이 목소리에게 묻는다. 분명 마르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토미에였을까? 아주 긴 시간 동안 어딘가에서 잠겨있다가 건져 올려진 기분이다. 온몸이 푹 젖은 듯, 찝찝하고 무겁다. 그의 약한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며 감각 사이로 주변의 소음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좁은 관 사이로 공기가 거칠게 흐르는 소리, 삐- 삐- 삐-, 균일하게 울려오는 비프음.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다. —어디였더라..— 무명이 생각한다. 그의 나이가 17살일 때, 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거기서 멀찍이 서 있는 자기 모습도 함께 보인다. 무명의 표정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때 들었던 소리다.

순간 가슴을 중심으로 목과, 어깨 머리에 참기 힘든 통증이 퍼져나간다. 몸이 있음이 느껴진다. 그가 몸부림을 친다. 무언가가 눈꺼풀에 들러붙어 있어 눈을 뜰 수가 없다. 뭔가 말하려 하지만 목 깊숙이 무언가 끼워져 있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진정하세요- 환자분, 여기 병원이에요. 지금 중환자실이에요.” 누군가 자신의 머리맡을 두드리며 말을 건다. “지금 튜브 들어가 있어서 말하시기 힘들 거예요. 진통제 놔드릴 테니까 잠깐만 참아주세요.”

눈에 붙어있던 테이프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간다. 밝은 빛이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면서 눈물이 쏟아진다. 조금 전, 말을 걸던 목소리가 무명에게 무언가를 계속 설명하고 있다. 여기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이며, 병실이 부족해 여기까지 이송됐다는 말을 해준다.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주변에서 무언가 분주하다. 통증이 잦아들면서 그의 의식이 다시 흐려진다. 또 다른 목소리가 이것저것을 물어온다. 무명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으며 대답을 대신한다. 목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진통제의 기운으로 서서히 몽롱해진다.


그가 온전히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의 일이다. 여전히 목과 가슴을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를 찾아온 의사가 말하길, 무명이 발견되고 하루 만에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되찾았으며, 특별히 안 좋은 예후는 없다고 한다. 이제 곧, 협진을 위해 보호 병동으로 이동한다고 설명했고, 무명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간호사 몇 명이 다가와 주위를 둘러싸고 무언가를 하기 시작한다. 무명을 들어 옆에 있던 다른 침대로 옮겼다. 등받이가 살짝 세워진 침대에 몸을 얹자, 그곳에서 ‘다른 병원’의 냄새가 나는 듯 느껴진다. 간호사 두 명이 무명의 양쪽에서 그의 몸 위로 주황색 벨트를 주고받는다. 벨트가 그의 가슴과 양다리를 고정한다.

“이동 중에 낙상 방지 때문에 채우는 거예요- 보호 병동 들어가시면 바로 풀어드릴게요-”

간호사 한 명이 무명의 시야 뒤로 사라지더니 침대가 서서히 움직인다. 바퀴가 굴러가는 진동이 엉덩이를 타고 전달된다. 중환자실에서 나가 몇 번의 코너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위로 올라가는지, 아래로 내려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로 움직인다는 것은 느껴진다.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와 보호 병동의 입구에 닿았다. 다른 간호사가 서류를 건네받고, 입구의 문이 열린다.

문을 넘어서 병실 안으로 곧장 향한다. 상아색이 감도는, 벽과 천장이 쿠션으로 둘러싸인 1인실이다. 간호사가 그를 묶고 있는 벨트를 풀어주고, 다른 한 명은 밖으로 나가 의사를 데려온다. 무명이 옆에서 기둥에 매달린 약주머니를 확인하는 간호사의 어깨너머로 천장에 붙어있는 카메라를 바라본다. 의사는 무명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냐.’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다시 자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느냐.’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그는 대꾸 없이 카메라만 바라보았다. 자신을 살리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치스러움도, 후회도, 불안도. 그냥 이 상태로 앞으로도 쭉,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보호 병동에서의 일주일이 지나고, 의사는 그가 퇴원하기에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소견을 밝히며, 추가적인 치료를 진행하자 말했다. 무명의 병실은 병동 반대편의 6인실로 옮겨졌다. 그는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저 의사의 질문 내용은 신경 쓰지 않고 ‘아니요.’라는 대답만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무명은 병원이라는 공간을 버거워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공포와 싸워야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수시로 무명의 앞에서 자살 기도를 했고, 자기 아들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런 일들, 그 협박들이 무명의 10대 시절 내내 반복되면서 그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

무명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자살을 시도한 날, 17세의 무명은 새벽 두 시에 어머니의 핸드폰 번호로 걸려 온 구조대의 전화를 받고 대형 병원의 중환자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서 몸에 이것저것을 주렁주렁 매단 채, 선발의 머리로 추하게 널브러져 있는 어머니를 그는 경멸의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의사는 17세의 소년에게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절차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빨리 시간이 흘러 그 상황이 과거가 되어있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의 어머니는 사망했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뒤, 아버지는 사라졌다. 그 후로도 10년간 무명은 아버지를 만난 적도, 연락을 한 적도 없다. 그는 그런 사실을 몹시 홀가분하게 여겼다.

지금, 이 공간은 그때의 기억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되돌리는 곳이다. 그 당시에 느꼈던 병원의 소리, 냄새, 온도, 자신의 경멸하는 표정까지. 바로 현재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명은 이것들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 빠져나가고 싶으면서도, 그다음의 일을 생각할 힘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병실을 옮긴 뒤, 1주일이라는 시간이 더 지났다. 목과 가슴의 통증은 많이 나아졌고, 마음의 혼란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다. 늦은 장마는 아직도 끝나지 않아 창밖의 풍경은 한낮에도 여전히 어둑어둑하다. 무명이 창가에서 멀리 떨어져, 로비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책을 읽고 있다. 데미안, 이미 몇 번 읽은 내용이지만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림은 슬픈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었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책 읽기뿐이었다. 책장에서 보이는 책 중, 가장 익숙한 책을 꺼내 들어 읽고 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말한다. 카인이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얻은 낙인은 죄의 흔적이 아니라 카인이 특별하다는 상징이라고. 무명은 그 대목을 읽자 갑자기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손으로 책을 팍- 소리가 나게 덮어버린다. 책에서 주의를 거둔 그의 옆에 누군가 바짝 붙어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빛 머리를 정갈하게 뒤로 바짝 묶어 올린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 머리 색 탓에 언뜻 노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꽤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갖고 있다. 특히 눈이 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크고, 깊게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은 어딘가 뒤틀려있다고 느끼게 한다.

이 여자는 병실 내의 요주의 인물이다. 그녀는 가끔씩 병실 안에서 무용하듯 사뿐사뿐 쏘다니며 주변 사람들의 귀에 대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했고, 그럴 때면 어떤 환자는 놀라서 몸을 피했고, 어떤 환자는 갑자기 흥분하며 난동을 피우기도 했다. 자연히 그녀가 가는 곳에는 항상 간호사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거 알아? 여기 전부 엉터리야” 그녀가 무명에게 말을 건넨다.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전부 가짜야.” 책상 위로 팔을 세워 턱을 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무명을 바라본다.

무명이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를 뜨기 위해 주변을 훑어본다. 마땅히 자리를 옮길 곳이 보이지 않자, 그가 다시 덮었던 책을 펼쳐 읽는 척을 한다.

“빈 껍데기에 갇혀있는 노예. 너.” 그녀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면서 허공으로 시선을 옮겨 다시 말한다. “어제 생선커틀릿 봤어? 그것도 마찬가지야. 가짜지. 맛만 형편없는 게 아니라- 조각난 쓰레기를 그러모은 폐기물이야. 앞으론 생선커틀릿 나오잖아? 그냥 버리는 걸 추천해.” 여자가 양손 끝을 입 앞으로 가져다 대더니 쿡쿡-거리며 웃는다. 생선커틀릿은 이 병원에서 자주 나오는 메뉴 중 하나였다.

멀리서 상황을 주시하던 간호사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타이르며 무명으로부터 분리한다. “괜찮은 애 같은데- 정신 똑바로 차려-” 여자가 간호사에게 등 떠밀리며 큰 소리로 말한다. 그녀가 멀어지고, 무명이 그녀가 떠밀리듯 사라진 방향을 슬쩍 바라본다. 주변의 환자들이 모두 무명을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 기분 나쁜 광경에 그가 다시 시선을 책으로 옮겼다가 다시 책을 덮고는 자신의 병실로 향한다.


며칠 뒤, 무명이 자신의 침대 위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회색 머리의 여자가 자신의 식판을 들고 걸어 들어왔다. 천연덕스럽게 그의 침대에 걸터앉고는 테이블 위에 무명의 식판을 슬쩍 밀어 자신의 식판을 둘 자리를 마련한다.

“생선커틀릿이야.” 그녀가 말한다. “그거 먹을 거야?” 그녀가 생선커틀릿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무명은 그녀의 말에 대꾸 없이, 입에 들어있는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린다.

“안 먹으면 내가 먹어야지!” 그녀가 무명의 식판 위에 있던 커틀릿을 낚아채 간다.

무명은 대응하지 않고 식사를 이어갔다. 불청객은 커틀릿을 작게 베어 물고는 콧소리를 내며 좋아한다. 그녀를 찾아 나선 간호사들이 무명과 식사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다. 무명이 별 반응 없이 그녀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물러간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병실에 가득하다. 한 손에 커틀릿이 꽂힌 포크를 들고 있는 그녀가 숟가락으로 자신의 식판 위에 있는 나물을 퍼 올리더니 무명의 식판으로 슬며시 옮긴다. 여태 반응을 보이지 않던 무명이 그녀를 향해 눈을 치켜뜬다.

“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녀가 당황하며 쭈뼛거린다. “좋아하는 걸 소중하게 생각하잖아. 그래서 준 건데-”

좋아하는 걸 소중하게 생각한다니. 무명은 방금 그 말이 그녀의 정신상태처럼 몹시 산만하다고 느낀다. 여자를 노려보며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무명은 다시 식사를 이어간다. 나물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있잖아, 아벨은 카인을 용서했을까?” 여자가 다시 무명에게 말을 건다. 며칠 전 그가 데미안을 읽고 있던 것을 슬쩍 보고는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용서했을 것 같아. 자길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포용은 보일 수 있어야 신의 총애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무명이 음식을 씹으며 그녀의 말에 은근히 귀를 기울인다.

실제로 성서에는 아벨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평소 자신의 형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다. 그저 카인이 아벨을 질투했고, 신의 경고를 듣고도 그 질투에 못 이겨 아벨을 죽였다는 내용만 적혀있을 뿐이다.

“아벨이 카인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들을 만든 신은 더욱 카인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낙인을 찍고 쫓아낼 게 아니라.”

무명이 음식을 씹는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진다. 무명이 천천히 그녀를 바라본다.

무명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먹던 커틀릿을 국그릇에 버리고는 그 안에 잔반을 함께 정리한다. 그리고 식판을 들고는 무명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휙- 하고 돌아서서 종종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간다. 그녀가 빠져나가고 나서야, 무명이 다른 환자들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불쾌한 시선을 무시한 채로 무명은 식사를 이어 나간다. 음식 냄새로 가득한 병실 안에, 이해하기 힘든 분위기가 함께 감돈다.



***



“잠은 잘 주무세요?” 일주일 뒤,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있지만, 복도로 둘러싸여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받는 이 병동 안의 진료실이다. 무명은 이곳에 올 때마다 폐쇄안에 개방을 가둬둔 이 구조에 감탄했다.

“네.” 늘 같은 질문에, 늘 같은 대답이 돌아간다. 의사는 이곳에 온 이후로 무명에게 저 질문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건넸다. 의사들은 잠 잘 잤냐는 말을 ‘밥 먹었냐.’라는 인사 대신 하곤 한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직 불편하신 곳 있어요?”

무명이 고개를 슬쩍 움직이더니 목을 어루만지며 대답한다.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무명이 쓰는 어휘가 늘고 있다. 여전히 귀찮고,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만, 약물의 효과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 덕에 진료에 많은 차도가 발생했다.

“돌아가신 친구분 장례를 못 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찾아뵈실 건가요?”

그가 엊그제 의사에게 마르실의 이야기를 했다. 굳이 그녀가 AI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그 뒤로 끝없이 이어질 질문들이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 찾아가야죠.”

“그리고 또 다른 친구분… 그분과도 만나실 건가요?” 의사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무명을 바라본다.

토미에를 말하는 것이다. 마르실의 얘기를 하면서 어쩌다 보니 토미에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무명의 반응이 의사에게 토미에와 관련된 무언가 있다는 인상을 준 모양이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녁 식사를 마친 무명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며칠 사이 장마가 끝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어느덧 가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오후의 채도 낮은 푸른빛 하늘과 병원 외벽에 비친 주황색 노을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마르실을 자주 떠올리지 않았다. 의사와 진료를 받으며 과거를 캐게 되는 순간의 회상이 고작이었다. 지금은 심적인 여유를 되찾으면서, 종종 마르실과의 좋았던 기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창밖의 공원을 바라보며, 마르실과 산책했을 때의 일을 회상하다가 문뜩 토미에를 떠올린다.

마지막으로 토미에와 대화했을 때 그는 이성을 잃고 분노한 상태였다. 뻔뻔한 태도로 마르실을 ‘죽였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피가 거꾸로 도는 것을 느꼈던 것, 그것이 토미에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아무리 토미에를 떠올려도 화가 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궁금했다. 왜 그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의 설명이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 토미에를 떠올리면 무명은 항상 복잡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토미에와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지, 그녀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자신에게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식사 정리 안 하신 분- 식판 내놔주세요-” 간호사가 병실로 고개를 내밀며 큰 소리로 말한다.

일주일 전, 회색 머리의 여자가 식사 시간에 다녀간 이후, 무명은 종종 그녀와 함께 밥을 먹었다. 다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식사만 하다 갔다. 그저 때가 되면 식판을 들고 무명을 찾아와 함께 밥을 먹고는, 식사가 끝나면 돌아갔다. 두 사람이 식사하는 동안 다른 환자들은 그 둘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명이 무료함을 느끼고 로비로 나선다. 책장 앞에 서서 읽을 책을 고르다 문뜩 자신이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생각에 빠진다. 그때 멍하니 서 있는 그의 등 뒤에서 회색 머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언제까지 있을 거니?”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무명이 흠칫하며 뒤를 돌아본다. 그의 가슴 높이로 시선을 한 그녀가 무명이 아닌 책장을 바라보고 있다.

“비켜봐, 나도 책 볼 거야.” 그녀가 무명을 어깨로 툭- 하고 밀어낸다. 원래대로라면 슬슬 간호사들이 접근했을 타이밍이지만 그녀와 무명이 사이좋게 지낸다고 생각했는지, 무명과 함께 있을 땐 간호사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명이 슬쩍 몇 발을 뒤로 무르고 그녀 뒤에서 기다린다. 고민하던 그녀가 책장 맨 아래, 구석에 꽂혀있는 동화책을 꺼내 든다. ‘달을 갖고 싶어요.’ 무명에게 익숙한 책이다. 무명은 중학생 때까지도 자기 전에 동화를 읽다 잠들었다. 이 책은 그때 그 수많은 동화 전집 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왕이 신하들에게 몸이 약한 공주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며 공표하며 시작된다. 공주는 창밖의 달을 바라보며 ‘달을 갖고 싶다’라고 말했다.

대신들이 왕을 찾아와 어째서 달을 가질 수 없는지, 물리적인 법칙과 비용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왕에게 설명했다. 그러던 중 어떤 광대 한 명이 나타나, 달이 완전히 기울어 하늘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날에 맞추어, 공주의 새끼손톱 크기의 금으로 만든 달 모양의 목걸이를 선물하자고 말한다.

왕은 그 말을 듣고는 광대의 말대로 공주에게 목걸이를 선물하고, 공주는 뛸 듯이 기뻐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다시 차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왕은 다시 고심한다. 공주가 자신이 받은 목걸이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 실망할 터였다. 그리고 다시 광대를 불러 문제에 대해 상의한다. 광대는 별일이 아니라며 왕과 함께 공주의 방을 찾는다.

광대는 침대에 누워 목걸이를 꼭 쥐고 있는 공주에게 다가가 창문을 가리는 커튼을 걷고, 공주에게 묻는다. “달은 공주님 목에 걸려있는데, 저 하늘에 있는 달은 대체 뭘까요?” 그러자 공주는 “바보- 내 이가 빠진 자리에서 새로 이가 나는 것처럼, 달님도 그 자리에서 새로 자라는 거야, 그것도 몰라?”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는다.


무명이 그녀의 손에 들린 동화책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가 책을 들고 테이블로 이동하고, 무명은 그녀를 따라 그녀의 앞자리에 앉는다. 그녀는 무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책을 펼쳐 본다.

그녀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에게 말한다. “물어보면 되는 거야.” 또다시 알 듯 말 듯한 이야기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명이 묻는다. 이곳에서 간호사나 의사가 아닌 상대에게 처음 건네는 말이었다.

“바보같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끝도 없이 고민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지.” 그녀가 여전히 시선을 책에 두고 말한다.

“상대가 나와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면요?” 무명이 다시 묻는다.

그녀가 무명을 바라본다. “너는 이 책을 좀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책을 자리에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긴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 뒤에서 무명이 시선을 책으로 옮겨간다. 아리송한 그녀의 말 뜻을 고민하는 것도 잠시,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책이 반갑게 느껴진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가 생각한다. 그리고 책을 들고 자신의 침대로 향한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운 무명의 옆에 조금 전 들고 온 동화책이 덮여있다. 주위에서 다른 환자들의 얕은 코골이 소리가 들려온다. 무명은 자신의 침대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은 채 누워있다.

그는 밤이 깊어지는 동안 몇 번이나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다. —토미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토미에를 단순히 마르실을 붕괴시키시겠다는 일념만 가진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집에 구조대원들이 들이닥친 것은 토미에 때문일 것이다. 무명을 구해낸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무명은 그렇게 토미에의 생각을 하다 잠에 빠져든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병동 중앙에 있는 데스크에서 무명이 퇴원 절차를 밟고 있다. 데스크 안쪽의 간호사들이 어째서인지 소란스럽다. 언뜻 들리는 대화 내용으로는 서버인지, 프로그램인가에 문제가 생겨 환자 조회가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무명의 퇴원 절차가 몇 시간 동안 지연되고 있었다. 아직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다.

무명의 옆에 있는 간호사가 그의 손에 묶여있는 팔찌를 끊어준다. 그가 실려 올 때 입고 있던 옷들은 전부 처치 중 찢어버렸기에 입고 갈 옷이 없었다. 병원에선 이런 경우 환자들에게 기증품을 준다. 간호사들로부터 속옷과, 두꺼운 운동복 한 세트를 건네받아, 갈아입고 나온다.

“나머지 절차는 1층 원무과에서 받으시면 돼요.” 간호사가 작은 열쇠고리와 무명의 핸드폰을 내밀며 말한다. “중환자실 계실 때, 경찰에서 맡기고 가셨어요. 이건 도어록 키예요.”

무명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물건을 건네어 받는다.

“문 수리 비용은 등기로 청구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를 구조하는 과정에서 도어록을 부쉈을 것이고, 열린 채로 방치할 수 없으니, 임시로 처리한 모양이다.

무명이 약봉지를 챙겨 데스크를 떠나려는 순간, 회색 머리의 여자가 다가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이해했어?”

무명이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이건 다 껍데기야. 가짜” 그녀가 비밀 얘기를 하듯 한쪽 눈을 윙크하며 검지를 세워 입에 가져다 댄다. 비밀 얘기치고는 조심성이 없었다. 의료진들이 그녀를 데리고 사라진다.

무명은 사라지는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1층에서 퇴원을 위한 절차와 나머지 잡스러운 절차를 밟았다. 서명할 것들이 많았다. 보호자 없이 입원했기에 모든 것을 그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 수납까지 마친 그가 이제 진짜로 병원 밖으로 나선다. 자동문이 열리자,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와닿는다. 그가 가슴을 부풀려 크게 한숨을 들이마신다. 시원한 공기가 그의 폐를 채운다. 병원의 냄새가 날숨과 함께 빠져나간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정문을 나선다. 조금 더 걸으니,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노선도를 확인한 그가 잠시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잠시 뒤, 버스가 도착하고 치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그를 포함한 몇 명이 사람들이 버스의 출입문으로 향한다. 앞선 승객들이 모두 버스에 오른 뒤, 그가 탈 차례가 되었다. 버스 계단 위에 한 발을 올린다. 마치 등 위에 무거운 것을 이고 있는 사람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매우 신중하다.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비탈을, 무명이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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