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인간의 놀라운 콜라보
주연:김세현(16세, 남. 까칠한 중3)
보조 AI:Gloccer (글로써, 작문 도우미)
2030년 12월의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열여섯, 중학교 3년의 끝자락에 선 김세현에게는 교실 창문에 얼어붙은 성에보다 더 차갑고 막막한 과제가 주어졌다. 바로 졸업식 고별사였다. 전교생과 학부모 앞에서 10분 동안 발표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임무였다.
새하얀 바탕에 깜빡이는 커서는 마치 세현의 막막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3년의 시간을 10분짜리 이야기로 압축하라니.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기억, 시험에 밤새워 괴로워하던 기억들이 뒤죽박죽 엉켜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며칠을 끙끙 앓던 세현은 결국 옆집의 유블리안 삼촌을 찾아갔다. 얼마 전 『AI는 당신의 조연입니다』라는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는 세현에게 거의 영웅 같은 존재였다. 어색하게 문을 두드리는 세현을 그는 따뜻한 코코아 한 잔으로 맞아주었다.
"고별사? 그거 아주 머리 아픈 숙제지."
세현의 고민을 들은 유블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Gloccer(글로써)'라는 깔끔한 로고가 떠 있었다.
"이 친구가 도와줄 거야. 하지만 세현아, 딱 한 가지만 기억해. 글로써는 만능이 아니야. 이 녀석의 방대한 데이터는 훌륭한 재료지만, 요리사는 너야. 너의 감성, 너만의 경험담. 그건 세상 어떤 AI도 흉내 낼 수 없는 너만의 레시피거든. 데이터에 너의 마음을 녹여내야 진짜 글이 되는 거야. 온전히 맡겨버려선 안 돼."
그의 조언은 알쏭달쏭했지만, 세현은 일단 글로써에게 접속했다.
<안녕하세요, 김세현 작가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졸업식 고별사. 10분짜리."
<알겠습니다. 일반적인 고별사에 포함되는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3년간의 회고, 선생님과 부모님에 대한 감사, 친구들과의 우정, 미래에 대한 다짐. 가장 감동적인 연설문 샘플 10개를 바탕으로 초안을 작성해 드릴까요?>
글로써가 내놓은 첫 제안은 실망스러웠다. 인터넷 검색 몇 번이면 찾을 수 있는 뻔한 내용이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좀 더… 특별한 거."
<‘특별함’의 기준 데이터를 입력해 주세요.>
"데이터? 하… 그냥 우리들 이야기라고. 웃고, 싸우고, 같이 떡볶이 먹고… 그런 거."
세현은 글로써와 대화할수록 거대한 벽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하면 글로써는 그것을 '교우 관계의 긍정적 상호작용 사례' 따위의 차가운 단어로 분해할 뿐이었다.
유블리안 삼촌의 조언은 점점 더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이 녀석과 내 마음을 어떻게 섞어낸단 말인가. 갈등과 불신이 쌓여갈 무렵이었다.
결국 세현은 다시 유블리안 삼촌을 찾았다.
"삼촌, 이거는 그냥 인터넷 검색기 수준이에요. 고별사 내용을 써달랬더니 그냥 정보 나열만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글로써가 세현이랑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보자. 아니면 삼촌한테 고민 털어놓는 것처럼 진심을 다해서 얘기해보는 거야. AI는 사용자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엄청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냥 기계일 뿐인데 감정을 담고 이야기를 하라니 이해가 안가지만 그래도 방법이 없으니 한 번 해볼게요."
다시 집에 돌아온 세현은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 내어 말을 걸어 본다.
"글로써, 너의 역할은 인터넷 검색기가 아니고 내 친한 친구 같은 존재야. 나는 너에게 진심을 담아 얘기 하고 싶어."
<그래 세현아 나도 너의 친한 친구가 되어 줄게. 함께 헤쳐 나가보자. 우선 너의 3년 전 SNS 기록에 따르면, 입학식 날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다. 옆자리 애는 왜 말을 안 걸지?’라는 문장이 보이네. 하지만 2시간 뒤, ‘옆자리 짝꿍이 먼저 말을 걸어줬다. 다행이다’라는 기록이 이어지네. 이 기억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첫 만남의 '어색함'과 '안도감'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강력한 감성 데이터거든.>
세현은 순간 숨을 멈췄다. 자신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입학식 첫날의 기억이었다. 어색한 교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걸지 못해 숨 막히던 그 순간, 옆자리에 앉았던 민준이가 건넸던 어색한 첫인사. 글로써가 찾아낸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의 첫 페이지,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세현은 글로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소한 장난들, 서툴렀던 첫사랑, 함께 꾸중 듣던 순간까지. 세현이 감성과 경험이라는 날것의 재료를 던져주면, 글로써는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해 그 기억들이 보편적인 감동을 줄 수 있도록 문장의 순서를 배열하고, 더 아름다운 단어로 다듬어주었다.
때로는 세현의 감정이 격해져 이야기가 곁가지로 뻗어 나갈 때면, 주제를 환기시키는 현명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 부분에서는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추고, 1.5초 정도 쉬어주면 좋아. 감정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거야."
글로써는 단순한 글쓰기 도우미가 아니었다. 함께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동료이자, 최고의 조연출이었다.
그 이후, 세현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사춘기로 인해 가슴속에 쌓아 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글로써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아왔던 눈물까지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지금 기계하고 뭐 하는 거야? 그래도 마음은 좀 후련하네. 히히"
한 달 후
마침내 졸업식 당일. 세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단상에 올랐다. 글로써의 조언대로 깊은 숨을 한번 내쉬고, 잊고 있던 3년 전의 그 첫날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3년 전 오늘을 기억하십니까? 어색한 교복을 입고, 누가 먼저 말을 걸어줄까 몰래 곁눈질하던 우리의 첫날을…"
세현의 목소리는 3년간의 희로애락을 담아 강당을 가득 메웠다. 친구들만 아는 소소한 사건에 다 함께 웃음이 터졌고, 선생님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이야기할 땐 선생님뿐 아니라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글로써가 찾아준 데이터와 세현의 진심이 포개어진 문장들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정확히 10분. 세현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자, 강당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이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단상에서 내려오는 세현의 귓가에, 스마트 워치에서 흘러나오는 글로써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김세현 작가님.>
세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나 혼자 쓴 글이 아니야. 너와 내가 함께 쓴, 우리의 첫 작품이야.'
졸업식을 마친 세현은 작은 선물을 사서 유블리안삼촌을 찾았다.
"삼촌이 소개해준 글로써 덕분에 제가 멋지게 성공할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삼촌처럼 멋진 작가가 되고 싶어요. 하하."
"이거 라이벌이 생기는 건가? 하하. 삼촌은 그냥 바닥만 깔아 줬을 뿐이고 세현이와 글로써가 멋진 팀을 이뤘네. 정말 잘했어."
"그런데... 사실 글로써랑 작업하면서 너무 재밌어서 저도 생각날 때마다 글을 몇 개 써 놓은 게 있어요. 그런데 제 감성만 잔뜩 들어간 조각들 뿐이라 뒤죽박죽이에요. 이걸 체계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방법이 있을까요?"
유블리안은 세현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방법이 있지. 오늘은 졸업식 기분 내면서 푹 쉬고, 너의 새로운 이야기가 궁금해지면 다음에 또 찾아와. 언제든."
<다음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