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버텼다'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나를 지키는 아주 작은 승리의 기술

by 유블리안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 나에게 칭찬해, 토닥토닥.”


김일상 대리는 오늘 하루를 잘 버틴 것에 대해 스스로 칭찬하며 퇴근 준비를 한다. 돌이켜보면 그의 하루를 ‘성공’이나 ‘성취’ 같은 달콤한 단어로 요약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늘 의문이다. 그저 ‘버팀’, ‘무사함’ 정도면 다행인 날들이 이어진다. 우리 모두 거대한 꿈을 안고 입사했지만, 현실은 마치 오징어 게임처럼 상대를 쓰러뜨려야 내가 사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그렇다면 반대로, 오늘 김 대리가 거둔 ‘아주 작은 승리’는 없었을까? 아마 선뜻 떠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어떻게 우리만의 ‘작은 승리’를 챙취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려 한다.


불편한 진실: 우리는 어떻게 길들여지는가


김일상 대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회사는 잘 짜인 시스템보다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도록 아주 작은 전투를 끊임없이 던져준다. 어느새 옆에 있는 동료는 함께 싸우는 전우가 아니라 이겨야 할 적이 된다.


“김 대리, 본인은 열심히 하는데 옆에 양 대리는 뭐 하는지 모르겠어. 김 대리가 고생이 많은데, 양 대리가 조금만 더 거들면 김 대리가 좀 편할 텐데. 아쉽네.”


“양 대리, 김 대리가 본인한테 불만이 아주 많은 것 같아. 나한테 와서 양 대리가 일을 안 해서 힘들다는구먼.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양 대리가 일을 못한다는 건 아니고.”

그뿐인가? 보고서 문구 하나를 가지고도 전쟁은 시작된다. 보고서 격식에 맞지 않는 문장을 썼다는 잔소리가 이어지고, 별 내용도 없는 시간 끌기용 회의에 불려 가 ‘왜?’라는 질문을 던질 에너지조차 고갈되어 버린다.

이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회사가 내미는 보상은 달콤하게 느껴진다. ‘방해받지 않는 점심시간’, ‘휴가 기간에 한 통도 울리지 않는 전화’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은 당연히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임에도, 어느새 특별한 보상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달콤함에 취해 더 크고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한 걸음 더: 팀장은 왜 악마가 되었을까?


하지만 잠시 멈춰 생각해 보자. 우리를 괴롭히는 팀장과 우리를 길들이려는 회사는 정말 악의 축일까? 어쩌면 그들 역시 거대한 시스템의 또 다른 부품일지 모른다. 팀장의 이간질은 사실 그의 상사에게서 받은 실적 압박과 불안감에서 비롯된, 가장 미숙하고 손쉬운 관리 방식일 수 있다. 그 또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또 다른 ‘김일상’ 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보고서 양식과 끝없는 회의는 개인을 통제하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줄이려는 시스템의 생존 본능이다. 회사는 개개인의 창의성이나 자율성보다 시스템의 안정적인 작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이 다른 두 존재(개인과 조직)의 본질적인 차이다.


​이것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려준다. 우리의 적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개인을 부품으로 만들려는 ‘시스템의 논리’ 그 자체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의 저항은 감정적인 분풀이가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지적인 생존 기술이 된다.


아주 작은 반란을 시작하라


거창한 선언이나 드라마틱한 저항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스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아주 작은 반란'은, 어쩌면 나의 일상을 조용하고 단단하게 재구성하는 과정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우선 시스템이 정해준 '성과'의 잣대에서 벗어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해낸 '아주 작은 승리'를 스스로 인정해 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퇴근 후에는 업무 생각을 차단하는 심리적 경계선을 긋고, 모든 일에 100%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대신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의식적으로 힘을 빼보는 것이다.


이것은 소모적인 투쟁이라기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의 주인이 나임을 선언하는 가장 지혜로운 생존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은 버틴 게 아니라, 싸워서 이겼다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우리가 매일 거두는 승리는 어쩌면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외부인 눈에는 그저 당연한 것을 지켜낸 것에 불과할 수도, 혹은 힘든 하루를 버텨낸 소심한 자기 위안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이것은 더 이상 '길들여짐'의 증거가 아니라,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저항'의 표시다. 나만의 기준으로 승리를 재정의하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시간의 영토를 지켜냈으며, 전략적으로 에너지를 분배해 나를 방어했다. 이 모든 것이야말로 시스템이 그어놓은 선을 보란 듯이 넘어선, 용감한 반란의 기록이다.


그러니 이제 퇴근길에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고 되뇌는 대신, 이렇게 외쳐보는 건 어떨까. ‘오늘도 나는 멋지게 싸워 이겼다’고. 그 아주 작은 승리야말로,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고 온전한 ‘나’로 존재한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