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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2에서 친구사이로

삐삐에서 첫 휴대폰을 손에 넣는 순간

by 유블리안

​"7942"를 아십니까?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 몇 번으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시대에, 이 네 자리 숫자는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1990년대를 보낸 우리에게 '7942'는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 뜨거웠던 메시지였습니다. 바로 "친구 사이"를 의미했으니까요.


​제 허리춤에는 늘 묵직한 삐삐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삐- 삐- 삐- 요란한 진동과 함께 액정에 숫자가 뜰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486(사랑해), 1004(천사), 8282(빨리빨리)... 그리고 가장 흔하게는 '7942'. 우리는 숫자로 짧은 신호를 보냈고, 그 신호를 해독하기 위해 공중전화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삐삐 시대의 '연결'이란 이렇게 느리고, 복잡하고, 인내를 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그 느림 속에 친구에게 받은 짧은 숫자 메시지 하나를 몇 번이고 되새기던 아날로그적 낭만이 있었습니다.


진심을 담던 숫자 시대의 마침표


삐삐 시대의 '느린 소통'은 우리에게 메시지 속에 진심을 응축하는 미학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단 한 번의 신호에 모든 마음을 담아내야 했고, 상대방의 답장을 기다리는 과정 자체가 우정을 확인하는 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술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삐삐가 공중전화를 거쳐야 하는 '간접적인 연결'이었다면, 곧이어 등장한 '첫 휴대폰'은 그 불편함을 단숨에 해소하는 혁명이었습니다.


플립폰, 손 안의 자유와 새로운 우정의 시대

마침내 제 손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플립폰이었습니다.
​뚜껑을 열었을 때 비로소 모든 기능이 활성화되던 이 기기는, 문자 메시지를 통해 친구에게 언제든 속삭일 수 있는 '초고속 우정'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숫자로 암호화하지 않았습니다. 꾹꾹 눌러야 했던 천지인 자판을 익혀 밤새 문자를 보내며, '친구 사이(7942)'를 넘어 일상의 모든 비밀과 감정을 실시간으로 공유했습니다. 이 작은 폴더폰은 우리의 관계를 더 깊고 넓게 확장해 주었습니다.


'탁!' 소리가 준 단절의 미학


​이 플립폰이 지금의 스마트폰과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단절의 마침표'가 명확했다는 것입니다.

​통화가 끝났을 때, 혹은 복잡한 세상의 소리가 듣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망설임 없이 뚜껑을 '탁!' 하고 닫았습니다. 그 짧고 명쾌한 금속성 소리는 단순한 통화 종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하고 오직 나에게 집중하겠다는 아날로그적인 의지였습니다.


​버튼이 외부로부터 완전히 보호받던 것처럼, 우리의 사적인 감정과 시간도 외부의 시선과 정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스마트폰을 들고, 쉴 틈 없는 연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소통은 가장 편리해졌지만, 피로감 또한 극에 달했습니다.


​삐삐가 우리에게 간절한 진심(7942)을 담는 법을 가르쳤다면, 플립폰은 단절의 평화('탁!' 소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우리는 이 두 가지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연결을 멈추고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내가 전하는 메시지 속에 진정한 마음을 담아내는 정성.


​뚜껑을 닫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휴식을 얻고, 그 후에야 더 깊은 관계(친구 사이)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그 시절의 소중한 지혜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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