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자, 믿어야 하는 자
"… 저희는… 500년 뒤의 미래에서 왔습니다! “
희성의 절박한 외침이 [충효당] 대청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류성룡에게는 그저 '괴이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하인들과 가솔들은 순간 얼어붙었다가, 이내 더 큰 공포에 휩싸였다.
"미, 뭐라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것 보니 첩자임에 틀림없소!"
"아니다! 첩자가 아니라 실성한 미친놈들이다!"
"대감, 저놈들이 실성하여 헛소리를 합니다! 당장 묶어 가두어야 합니다!"
희성의 고백은 최악의 수였다. '괴인'에서 '광인(狂人)'이 된 것이다.
"류 박사! 미쳤소?"
김민수 의원이 기가 차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해서 일을 망치는 거야! (류성룡을 향해) 이보시오! 우린 길을 잃었을 뿐이오!"
"대감... 대감님..."
류시인은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류성룡은 희성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자체를 '위협'으로 규정하는 듯했다.
"그대들의 행색은 기이하고 말은 교활하다. 필시 왜국에서 보낸 첩자이거나, 아니면 북방의 오랑캐가 보낸 자객일 터."
그가 손을 들었다.
"저들을 당장 광에 가두어라. 날이 밝는 대로 관아로 보내겠다."
"안 됩니다!"
희성이 외쳤지만,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왔다.
"잠시만요, 대감!"
그때, 다온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16세기 양반 사대부(류성룡)를 대하는 아랫사람의 예법을 갖춰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대감."
다온의 유창한 16세기 언어가 대청의 소란을 잠재웠다. 류성룡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는 이 시대의 말을 알고, 이들은 모르옵니다. 부디, 제가 대감과 이분들 사이의 대화를 옮겨드리겠나이다."
류성룡은 다온의 침착한 태도에 의심을 거두진 않았지만, 몽둥이를 든 하인들을 손짓으로 막았다.
"... 좋다. 하나 너희가 광인이나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증명하겠느냐."
희성이 결연하게 류성룡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온이 즉시 그의 뜻을 받아 류성룡에게 아뢰었다.
"저희 수장(首長)이 말하옵니다. 자신이... 대감의 후손이자 대감의 역사를 연구한 자로서 증명하겠나이다."
김민수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류 박사, 지금 '족보'라도 읊겠다는 거야? 이 양반이 믿어주겠어?"
류성룡은 '후손'이라는 말에 잠시 동요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 계속해 보아라."
희성이 말을 이어가자, 다온이 차분히 옮겼다.
"대감께서는 작년, 경인년 동짓달. 나라의 시급한 일을 논하는 '시무 7조'를 올리셨나이다. 첫째는 세자를 정하는 일이요, 둘째는 군율을 바로 세우는 일이요..."
"그만."
류성룡이 다온의 말을 끊었다.
"그 정도는 뜻있는 자라면 읊을 수 있는 내용이다. 그것이 어찌 증명이 된단 말이냐."
"하지만, 대감께서는 그 7조에 앞서..."
희성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다온이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 올리지 못한 마지막 한 조(條)가 더 있었지요."
순간, 류성룡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대청을 감싸던 소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희성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다온이 류성룡을 바라보며 아뢰었다.
"원래는... 일곱 조항이 아니었나이다. 그 마지막 조항은... '당론을 혁파하고 인재를 붕당에 관계없이 등용하라'는... 것이었나이다."
"..."
류성룡의 손이 도포 소매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감께서는 그 상소를 올릴 경우, 붕당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7조의 다른 내용들마저 묵살될 것을 우려하셨습니다. 그래서.."
희성이 류성룡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다온의 목소리도 그를 따라 단호해졌다.
"그 마지막 조항을... 대감께서 친히 불태우셨다... 하옵니다. 맞습니까?"
정적이 흘렀다. 류성룡의 날카로운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하인들 사이에 굳은 채 서 있는 젊은 사내, 그의 맏아들 '류담(柳襑)'이었다. 류담은 이 괴이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며, 아버지가 '불타버린 8조'라는 말을 듣고 동요하는 모습에 그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직 털어놓지 않은, 1591년 현재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아는 고뇌를, 저 괴이한 사내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류성룡이 희성을 바라보는 눈빛이 '의심'에서 '경악'으로, 이내 '알 수 없는 혼란'으로 바뀌었다.
"너는..." 류성룡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너는... 어찌 그것을..."
"대감."
희성이 무릎을 꿇었다. 류시인도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희성이 다온을 바라보며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대감께서는 훗날, 전쟁이 끝난 뒤... 이 비밀을 맏아들 류담에게만 구술로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류담 공(公)이 '징비록'의 원고 말미에 ' 종가 별지(宗家 別紙)'로 이 사실을 남겼지요. 그 기록은 오직 풍산 류씨 종손에게만 전해졌습니다. 저희가... 그것을 아는 후손입니다."
다온은 이 말을 천천히, 류성룡과 류담을 번갈아 보며 옮겼다.
"대감께서는 훗날, 이 비밀을 저기 있는 아드님께만 남기실 것이옵니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그 사실을 '종가 별지'로 기록하여, 저희 같은 후손들이 알게 되었나이다."
류성룡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19세의 아들 류담, 그리고 500년 뒤의 비밀을 말하는 희성을 번갈아 보았다. 모든 의심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몽둥이를 든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 모두 물러가라."
"대, 대감!"
"물러가라 하였다. 그리고 이분들은 '괴인'이 아니다. '빈객(賓客, 손님)'이다. 당장 안채의 사랑방을 내어드리고, 상을 차려오너라."
하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주인의 엄명에 황급히 흩어졌다. 김민수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된 얼굴로 흙먼지를 털었고, 다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류성룡은 희성을 일으켜 세웠다.
"사랑으로 자리를 옮기지."
그의 시선이 다온에게 향했다.
"그 '500년 뒤의 경고'라는 것을... 그대의 입을 통해, 자세히 들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