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이치는 바로 당신들이다
류성룡을 따라 옮긴 사랑방은 [충효당] 대청과는 달리,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밀실이었다. 류성룡은 맏아들 류담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물렸다. 방 안에는 1591년의 류성룡 부자(父子)와 2025년에서 온 네 사람이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유일한 통역가인 다온이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류성룡의 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류성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 서려 있던 날카로운 경계심은 사라지고, 지독한 혼란과 자신의 비밀을 꿰뚫어 본 이들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대(다온)의 입을 통해, 그 '500년 뒤의 경고'라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아야겠다."
희성이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류성룡과 류담의 눈이 칠흑 같은 유리판에 커졌다. 희성이 화면을 켜자, [경고: 94.7%]라는 붉은 팝업창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이것이 저희가 만든 <프로젝트 징비>입니다."
다온이 류성룡을 향해 아뢰었다.
"대감, 이것이 저희가 가져온 '경고'의 핵심이옵니다 저희는 500년 뒤의 기술로... (태블릿을 가리키며) 이 지경(知鏡, 지혜로운 거울)을 통해, 1591년의 조정과 2025년 저희 시대의 정부가... 똑같은 '실패의 이치'를 94.7% 따르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류성룡은 '지경'이라는 단어와 그 안에 뜬 1591년의 문장(자신이 익히 안는 동인 강경파의 발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실패의 이치?"
류성룡은 태블릿 속의 알 수 없는 글자(94.7%)들 보다, 조금 전 자신을 '후손'이라 주장한 희성의 얼굴과 곁에 앉은 맏아들 류담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굳었던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허허. 과연... 그대와 내 아들 담을 이리 나란히 두고 보니..."
류성룡이 턱을 쓰다듬었다.
""너희 둘은 어찌 이리 닮은 것 같으냐. 이리 인물들이 좋은 것 보니, 내 핏줄이 맞긴 맞는 것 같구나. 허허."
류성룡의 갑작스러운 농(弄)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맏아들 류담이 얼굴을 붉혔다.
"당치 않사옵니다. 아버님."
희성과 류이인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류담을 바라봤다. 정말... 닮은 것 같기도 했다.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조상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이곳에 떨어진 이후 줄곳 굳어 있던 류시인이 그제야 긴장을 풀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평화를 깬 것은 김민수 의원이었다.
"류 박사, 지금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있소?"
김민수 의원이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그는 1591년에 떨어졌다는 충격보다, 2025년의 '정치적 임무'를 잊지 않은 듯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원님?"
"내가 2025년에 류 박사한테 뭘 원했소? '무기'요. 현 정부를 공격할 무기! 그런데 이분은 누구요?"
김민수가 류성룡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다온이 이 무례한 대화를 차마 통역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분은 1591년의 '집권 세력'인 동인(東人) 이시오. 이미 '경고 묵살'에 동조했거나, 최소한 막지 못한 당사자란 말이오!"
"김 의원님!""
류시인이 소리쳤다.
"조상님 앞에서 이 무슨 망발이오!"
"망발? 사실을 말하는 거요!"
김민수는 멈추지 않았다.
"류 박사! 이분은 2025년의 '진보 정부'와 똑같은 포지션이야! 이분께 매달릴 게 아니라, 당장 한양으로 가야 합니다!"
"한양이라뇨?"
"이분의 보고를 묵살했던 '서인(西人)'측 인사들을 만나야 한단 말이오! 황윤길 대감이나, 이항복, 이덕형 같은 사람들! 1591년의 '야당'은 그들이고, 그들만이 이 경고를 '무기'로 써서 조정을 뒤집을 수 있소!"
김민수는 2025년의 '진영논리'를 1591년에 그대로 대입하고 있었다. 류성룡에게 데이터를 주는 것은 '여당' 에게 데이터를 주는 꼴이니, '야당'인 서인에게 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김의원 님 지금 제정신입니까? 여긴 2025년 국회가 아니에요!"
이번에는 류시인이 김민수를 막아섰다. 희성은 류시인이 방금 전 조상의 따뜻한 농담에 '진영 논리'에서 벗어났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류시인의 다음 말은 그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김 의원님의 방식은 틀렸소. 하지만..."
류시인이 희성을 바라보았다.
"희성아 너도 마찬가지야."
"... 형님?"
"우리가 지금 500년 전 과거에 떨어졌어. 우리가 함부로 이 시대에 개입하면... 나비효과가 어떻게 될지 알아? 2025년의 '맥락'이 통째로 뒤틀릴 수가 있어. 우리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희성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2025년 류시인이 희성의 94.7% 데이터를 막아섰던 논리와 똑같았다.
"형님, 지금... '신중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건 '묵살'이 아니라 '신중'해야 할 문제야! 500년 뒤의 기술(태블릿)을 보여주고, 역사를 바꾸려 드는 건 너무 위험해! 우리는 최대한 개입을 자제하고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해!"
희성은 허탈했다. 2025년 연구실에서의 3자 대면이, 1591년 류성룡의 사랑방에서 완벽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 김민수(보수) : 역사를 바꾸기 위해 '서인(야당)'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극적 개입론]
- 류시인(진보) : 역사가 뒤틀릴까 봐 '개입 자체를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 [소극적 관망론]
- 류희성(역사학자) : '류성룡(징비록)'을 도와 '실패의 이치'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 [본질적 해결론]
세 사람이 격렬하게 언쟁을 벌이는 동안, 다온은 차마 이 부끄러운 대화를 통역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조용히 모든 것을 듣고 있던 류성룡이 손을 들었다.
사랑방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류성룡의 시선은 방금 전의 따뜻함은 사라지고, 다시 '태블릿 PC'의 94.7%라는 숫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온이라 하였는가?"
"... 네, 대감."
"저들(김민수, 류시인)이 지금... 무슨 일로 다투는 것인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옮겨 보아라."
다온은 망설였지만 류성룡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2025년에서 온 두 정치인의 주장을 조심스럽게 통역했다.
"한 명은 당장 한양의 서인들을 만나 이 경고를 알려야 한다 하고, 다른 한 명은, 역사를 바꾸는 것은 위험하니 신중해야 한다 하옵니다."
모든 말을 들은 류성룡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허탈함'이었다.
그는 세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대들, 500년 뒤의 사람이라 하였는가?"
"네, 대감."
"헌데 어찌 그대들의 모습이 지금 한양의 조정과 이리도 똑같은가?""
류성룡의 시선이 희성을 향했다.
"그대가 말한 '반복되는 실패의 이치'란 바로 그대들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