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증명
류성룡의 마지막 일침("실패의 이치란... 바로 그대들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는가.")은 2025년에서 온 세 명의 '지식인' 모두의 정곡을 찔렀다. 김민수는 입을 다물었고, 류시인은 고개를 숙였다. 희성은 허탈한 실소 끝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류성룡을 마주 보았다.
"대감... 맞습니다."
다온이 놀라 희성을 바라봤지만, 이내 그의 진심을 깨닫고 류성룡에게 아뢰었다.
"… 대감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희성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5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이 '실패의 이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염병과도 같아서(다온: '역병(疫病)과도 같아서')... 나와 너를 가르고, 진영을 나누고, 결국 눈앞의 '경고'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김민수와 류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591년의 사랑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2025년에서 증오하던 '진영 논리'의 화신(化身)이 되어 있었다.
류성룡은 희성의 '자백'에 오히려 더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자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아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 '지경(智鏡)'이라는 것을 다시 보자."
희성이 태블릿을 류성룡 앞으로 밀었다. 94.7%의 데이터, 1591년과 2025년의 문장들.
"이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류성룡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미래'가 보낸 '증험(證驗, 증거)'이다."
그는 파직된 몸이었으나, 나라의 대신(大臣)이었다.
"내가... 장계(狀啓)를 올릴 것이다."
"네? 대감!" 맏아들 류담이 경악했다. "아버님! 지금 파직된 몸으로 상소를 올리신들, 조정의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오히려 강경파들의 표적이 될 뿐입니다!"
"담아. 그래서 더더욱 올려야 한다."
류성룡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 '지경'의 증험을 바탕으로, 왜적의 침략 규모와 시기를 다시 고(告) 해야 한다."
류성룡은 희성에게 구체적인 정보들을 요구했다.
"저들이 쳐들어온다면, 선봉에 설 장수의 이름은 무엇인가."
"고니시 유키나가... (다온: '소서행장(小西行長)')입니다."
"병력의 규모는?"
"제1군은 1만 8천... (다온: '일만 팔천')입니다."
류성룡의 손이 떨렸다. 자신들이 막연하게 '만 명'을 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거대했다.
그는 밤을 새워 장계를 썼다. '미래에서 온 손님' 따위의 말은 뺐다. 대신 '새롭게 입수한 첩보'와 '지경이 보여준 실패의 이치'를 인용하며, 당장 붕당을 초월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정적인 내용이었다.
"이것을 지금 당장, 한양의 영의정 대감께 전하라!"
류성룡은 가장 빠른 역마(驛馬)를 불러 파발을 띄웠다.
파발이 떠나고, 한양에서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며칠간, 사랑방의 공기는 팽팽했다. 희성은 틈틈이 태블릿 PC를 창가에 내어놓았다. 다온이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여보. 그 '태블릿'... 전기는 괜찮아요? 벌써 나흘째인데."
희성이 햇빛을 받고 있는 태블릿 뒷면을 톡톡 두드렸다. 겉보기엔 일반 유리 같았지만, 미세한 태양광 전지 패널이 내장되어 있었다.
"괜찮아. <프로젝트 징비>용 태블릿은 자가발전 충전식이야. 낮에 이렇게 해만 쬐어주면 돼.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해는 똑같이 뜨니까."
"기술은 참 좋은데..."
김민수 의원이 그 모습을 비꼬듯 쳐다봤다.
"그걸 보는 사람들이 500년 전 그대로니 문제지. 헛수고가 될 겁니다. 류 대감은 '동인'입니다. 그가 올린 장계는 '동인' 내부에서 묵살될 겁니다. 2025년의 우리가 그랬듯이."
"김 의원님!"
희성이 막아섰다.
"난 내 방식대로 하겠소."
김민수가 선언했다.
"내일 당장 한양으로 떠나겠소. '야당'인 서인들을 만나 이 정보를 넘길 겁니다. 그들만이 류 대감의 당(동인)을 견제할 수 있소."
"안 됩니다!"
이번에는 류시인이 막아섰다.
"김 의원님의 그 '개입'이야말로 역사를 망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장계의 답을 기다리며 '신중'하게..."
희성은 두 사람의 언쟁을 들으며 지독한 기시감에 빠졌다.
며칠이 더 흘렀다. 김민수는 떠날 채비를 했고, 류시인은 그를 말렸다. 그리고 마침내, 한양에서 파발이 돌아왔다. 류성룡은 떨리는 손으로 답신을 펼쳤다. 그것은 임금(선조)의 교지가 아니었다. 조정의 동료, 그가 믿었던 '동인'의 핵심 인물이 보낸 사신(私信)이었다.
류성룡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갔다. 그는 편지를 다 읽고, 그것을 조용히 다온에게 넘겼다. 다온이 편지를 받아 들고,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 대감. 어찌하여... 어찌하여 대감께서 '서인' 무리들의 망령된 말에 동조하시나이까..."
"... 혹여, 저들 '서인'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시려는 것은 아니시옵니까..."
"... 지금은 왜적보다 민심의 '분란'을 막는 것이 더 시급하오니... 부디 '신중'히 자중하시기를 바라나이다..."
편지의 모든 단어가 2025년, 류시인이 희성에게 했던 말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94.7%]의 증명이었다. 희성이 허탈하게 류시인을 바라봤다. 류시인의 얼굴도 핏기가 가신 채였다. 류성룡이 눈을 감았다.
"묵살... 묵살되었구나."
그때, 김민수 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뭐랬습니까. 이럴 줄 알았소. 류 박사, 류 작가. 당신들은 여기서 조상님이랑 '신중론'이나 더 논하시오."
그가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한양으로 가겠소. 내 방식대로 '서인'들을 만나, 이 판을 뒤집어 보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