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묵살(默殺), 500년 전의 답장

가장 완벽한 증명

by 유블리안

실패의 이치, 그 정체


​류성룡의 마지막 일침("실패의 이치란... 바로 그대들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는가.")은 2025년에서 온 세 명의 '지식인' 모두의 정곡을 찔렀다. 김민수는 입을 다물었고, 류시인은 고개를 숙였다. ​희성은 허탈한 실소 끝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류성룡을 마주 보았다.


​"대감... 맞습니다."


다온이 놀라 희성을 바라봤지만, 이내 그의 진심을 깨닫고 류성룡에게 아뢰었다.


"… 대감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희성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5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이 '실패의 이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염병과도 같아서(다온: '역병(疫病)과도 같아서')... 나와 너를 가르고, 진영을 나누고, 결국 눈앞의 '경고'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김민수와 류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591년의 사랑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2025년에서 증오하던 '진영 논리'의 화신(化身)이 되어 있었다.



류성룡의 결단


​류성룡은 희성의 '자백'에 오히려 더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자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아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 '지경(智鏡)'이라는 것을 다시 보자."


희성이 태블릿을 류성룡 앞으로 밀었다. 94.7%의 데이터, 1591년과 2025년의 문장들.


​"이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류성룡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미래'가 보낸 '증험(證驗, 증거)'이다."


그는 파직된 몸이었으나, 나라의 대신(大臣)이었다.


​"내가... 장계(狀啓)를 올릴 것이다."
"네? 대감!" 맏아들 류담이 경악했다. "아버님! 지금 파직된 몸으로 상소를 올리신들, 조정의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오히려 강경파들의 표적이 될 뿐입니다!"
​"담아. 그래서 더더욱 올려야 한다."


류성룡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 '지경'의 증험을 바탕으로, 왜적의 침략 규모와 시기를 다시 고(告) 해야 한다."



한양으로 가는 장계


​류성룡은 희성에게 구체적인 정보들을 요구했다.


"저들이 쳐들어온다면, 선봉에 설 장수의 이름은 무엇인가."
"고니시 유키나가... (다온: '소서행장(小西行長)')입니다."
"병력의 규모는?"
"제1군은 1만 8천... (다온: '일만 팔천')입니다."


​류성룡의 손이 떨렸다. 자신들이 막연하게 '만 명'을 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거대했다.
그는 밤을 새워 장계를 썼다. '미래에서 온 손님' 따위의 말은 뺐다. 대신 '새롭게 입수한 첩보'와 '지경이 보여준 실패의 이치'를 인용하며, 당장 붕당을 초월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정적인 내용이었다.


​"이것을 지금 당장, 한양의 영의정 대감께 전하라!"


류성룡은 가장 빠른 역마(驛馬)를 불러 파발을 띄웠다.


분열하는 미래인(未來人)


​파발이 떠나고, 한양에서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며칠간, 사랑방의 공기는 팽팽했다. 희성은 틈틈이 태블릿 PC를 창가에 내어놓았다. ​다온이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여보. 그 '태블릿'... 전기는 괜찮아요? 벌써 나흘째인데."


희성이 햇빛을 받고 있는 태블릿 뒷면을 톡톡 두드렸다. 겉보기엔 일반 유리 같았지만, 미세한 태양광 전지 패널이 내장되어 있었다.


"괜찮아. <프로젝트 징비>용 태블릿은 자가발전 충전식이야. 낮에 이렇게 해만 쬐어주면 돼.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해는 똑같이 뜨니까."
​"기술은 참 좋은데..."


김민수 의원이 그 모습을 비꼬듯 쳐다봤다.


"그걸 보는 사람들이 500년 전 그대로니 문제지. 헛수고가 될 겁니다. 류 대감은 '동인'입니다. 그가 올린 장계는 '동인' 내부에서 묵살될 겁니다. 2025년의 우리가 그랬듯이."


​"김 의원님!"


희성이 막아섰다.


"난 내 방식대로 하겠소."


김민수가 선언했다.


"내일 당장 한양으로 떠나겠소. '야당'인 서인들을 만나 이 정보를 넘길 겁니다. 그들만이 류 대감의 당(동인)을 견제할 수 있소."


​"안 됩니다!"


이번에는 류시인이 막아섰다.


"김 의원님의 그 '개입'이야말로 역사를 망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장계의 답을 기다리며 '신중'하게..."



​희성은 두 사람의 언쟁을 들으며 지독한 기시감에 빠졌다.



500년 전의 '답장'


​며칠이 더 흘렀다. 김민수는 떠날 채비를 했고, 류시인은 그를 말렸다. 그리고 마침내, 한양에서 파발이 돌아왔다. ​류성룡은 떨리는 손으로 답신을 펼쳤다. 그것은 임금(선조)의 교지가 아니었다. 조정의 동료, 그가 믿었던 '동인'의 핵심 인물이 보낸 사신(私信)이었다.


​류성룡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갔다. 그는 편지를 다 읽고, 그것을 조용히 다온에게 넘겼다. ​다온이 편지를 받아 들고,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 대감. 어찌하여... 어찌하여 대감께서 '서인' 무리들의 망령된 말에 동조하시나이까..."
"... 혹여, 저들 '서인'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시려는 것은 아니시옵니까..."
"... 지금은 왜적보다 민심의 '분란'을 막는 것이 더 시급하오니... 부디 '신중'히 자중하시기를 바라나이다..."


​편지의 모든 단어가 2025년, 류시인이 희성에게 했던 말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94.7%]의 증명이었다. ​희성이 허탈하게 류시인을 바라봤다. 류시인의 얼굴도 핏기가 가신 채였다. 류성룡이 눈을 감았다.


"묵살... 묵살되었구나."


​그때, 김민수 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뭐랬습니까. 이럴 줄 알았소. 류 박사, 류 작가. 당신들은 여기서 조상님이랑 '신중론'이나 더 논하시오."


그가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한양으로 가겠소. 내 방식대로 '서인'들을 만나, 이 판을 뒤집어 보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