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진흙탕 속의 각성

'신중론'과 '무기'의 대가

by 유블리안




임진강(臨津江)의 진흙탕


파천(播遷)의 길은 '왕의 행렬'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패주의 행렬'이었다. 밤새 내린 비로, 개성으로 향하는 길은 질척이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2025년에서 온 네 사람은 1년 만에 처음으로 뼈를 깎는 '굶주림'과 '추위'를 겪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어색한 도포 자락은 흙탕물에 젖어 무겁게 늘어졌다. 수레가 진흙에 빠지고, 짐을 버리고, 서로를 밀치는 아비규환 속. 2025년의 '엘리트'라는 자의식은 씻겨나간 지 오래였다. ​"물… 물 좀…" 류시인이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그는 네 사람 중 가장 체력이 약했다. "일어나시오, 류 작가!" 김민수가 그런 류시인의 멱살을 잡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지금 여기서 퍼지면… 그냥 죽는 거야. 2025년이고 나발이고 없어!" 김민수는 1592년의 생존법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류시인의 각성: '신중론'의 대가


​그들이 임진강 나루터에 겨우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생지옥이었다. 왕과 고관들이 먼저 강을 건너기 위해, 수많은 피난민과 병사들이 강변에 갇혀 절규하고 있었다. ​"배를… 배를 내어달라!" "전하가 우릴 버렸다! 저들이 우릴 버렸다!" ​그때, 한 무리의 피난민이 류성룡의 행렬을 알아보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1년 전 '신중론'을 외쳤던 조정 대신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감!"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이 류성룡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다온이 그 말을 굳은 얼굴로 듣고 있었다.

"대감들께서는… 이리될 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어찌하여… 어찌하여 '신중'하시다며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으셨나이까!" "…"

"조정이 '신중'한 덕분에… 내 새끼는 이 꼴이 되었소!"

​'신중(愼重)'이라는 단어. 그것은 2025년, 류시인 자신이 희성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것은 불과 1년 전, 류성룡 대감의 피 끓는 장계를 '공격의 빌미'라며 묵살했던 바로 그 단어였다. 류시인은 그 여인의 원망 어린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가 2025년 서재에서 '맥락'이라 떠들던 '신중론'의 대가가, 지금 눈앞에서 흙탕물에 절어 울부짖고 있었다.

​"아…" 류시인이 무릎을 꿇었다. "희성아…" 그가 넋이 나간 채 희성을 바라봤다. "내가… 내가 틀렸다. '신중론'이 아니었어. 저 여인 말이 맞아… 그냥… '묵살'이었어. '책임 회피'였어… 내 진영의 논리가… 틀렸던 거야."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념'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김민수의 각성: '무기'의 대가


​강을 건너는 배 위. 김민수는 강 건너편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강가에 버려진 한 젊은 병사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총에 맞은 듯 가슴이 뻥 뚫린 병사. 그의 손에는 창대만 남아있고, 날카로운 창날은 부러져나가고 없었다. ​"무기… 무기가 없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패잔병의 울음소리. "활은 비에 젖어 시위가 늘어지고… 칼은 부러지고… 저들에겐 조총이 있었는데… 우린 '무기'가 없었소…"


​'무기(武器)'.


그 단어가 김민수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쳤다. 2025년, 그는 희성의 [94.7%] 데이터를 '정부를 공격할 완벽한 무기'라고 불렀다. 그는 '국가 안보'를 외쳤지만, 사실은 '정치적 무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가 원했던 그 '무기'가 없어서, 지금 500년 전의 병사가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의 '진영 논리'가 진짜 '무기'를 만들 시간을 갉아먹은 것이었다. ​"하… 하하…" 김민수가 흙탕물 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무기'… '공격할 무기'…" 그의 웃음소리가 이내 울음으로 변했다. ​"이게… 이게 내 '무기'의 결과였어. 데이터가 아니라… 피였어. 그냥… 피였구나…" '보수 야당'의 투사였던 그는, 처음으로 '정치'가 아닌 '국가'의 죽음을 보며 절규했다.



징비(懲毖)의 다음 단계


​희성과 다온은, 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비로소 '각성'하는 두 정치인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때, 배 반대편에서 이 모든 참상을 지켜보던 류성룡이 희성에게 다가왔다. "그대들의 '실패의 이치'가… 뼈에 사무치는구나." 그의 시선이 무너진 김민수와 류시인을 향했다. "저들은… 이제야 깨달은 게로군." ​류성룡은 그들처럼 절망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징비'의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지옥 속에서 수습을 시작한 유일한 대신이었다. ​류성룡이 희성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온을 통해 물었다.

"허나, 희성. 우리는 '징비'를 해야 하질 않는가." "…네?" "그대들의 '지경(태블릿)'에… 혹…" 류성룡의 목소리에 희미한 희망이 어렸다.


​"혹, '이순신(李舜臣)'이라는 자의 이름도…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