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징비(懲毖), 기록의 시작

'실패'를 기록할 '자격'

by 유블리안

승리 뒤의 불안


​선조가 요동행을 포기한 그날 밤. 평양성의 절망적인 공기는 잠시 걷혔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희망이 아닌 위태로운 정적이었다. '패배주의자' 대신들은 류성룡과 500년 뒤의 '괴인' 네 사람에게 밀렸다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옥포의 승리'라는 실체적 증거 앞에서는 물러섰지만, 그들은 여전히 선조의 곁에서 '압록강'을 속삭였다.


류성룡의 사저 사랑채.
김민수와 류시인은 난생처음 '협력'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서먹하게 방구석 양 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진영'은 달랐고, 그 어색함은 1592년의 지옥 속에서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다온이 젖은 도포 자락을 여미며 물었다. 희성은 '지경(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붉은색 [실패의 이치 99.0%]라는 글자는, '옥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단 0.1%도 변하지 않았다.



​'징비록'의 탄생


​"대감, [99.0%]... 그대로입니다. 이 승리 하나로는 '실패의 이치'를 깰 수 없습니다." 희성의 보고에, 류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희성." 류성룡이 다온을 통해, 희성을 조용히 불렀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 까닭이... 고작 '옥포의 승리' 하나를 위함은 아닐 테지." "..."
"그대들은 '실패의 이치'를 막으러 왔다고 하였소. 허나, 전쟁은 이미 터졌고, 우리는 실패했소. 그렇다면... 그대들이 온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희성은 류성룡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실패를 '경계'하도록 하는 것. ​희성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대감. 저희는 이 전쟁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감은... 이 실패를 '기록'하셔야 합니다." "기록이라니?" ​"500년 뒤, 저희의 시대에도 똑같은 '실패의 이치'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대감께서 '불타버린 8조'를 쓰며 고뇌하셨던 그 '붕당'이, '신중론'이라는 이름으로 경고를 묵살했던 그 '민낯'이... 저희 시대에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희성의 목소리가 절박해졌다. "부디... 기록해 주십시오. 붕당이 어찌 나라를 망쳤는지. '융통성'과 '서열'이 어찌 군대를 무너뜨렸는지. '신중론'이 어찌 백성을 버렸는지. 그 모든 '실패'를 기록하여, 500년 뒤의 저희가... 다시는 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하게 해 주십시오." ​류성룡은 희성의 말을 들으며, 도포 소매 안에서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가 자신의 고뇌('불타버린 8조')를 꿰뚫어 본 이 후손에게, 이제는 '미래의 경고'까지 전해 듣고 있었다.


​류성룡이 붓을 들었다.


"...과거의 실패를 '징계(懲)'하여, 미래의 재앙을 '대비(毖)'한다..."


그가 '징(懲)'자와 '비(毖)'자를 종이 위에 적었다. <징비록>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귀환의 조건


​바로 그때였다. 류성룡이 '징비(懲毖)'라는 두 글자를 적는 순간, 희성의 '지경(태블릿)'이 강렬한 '녹색' 빛을 뿜었다.
​[새로운 과업: '징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붉은 [99.0%] 화면 위로 새로운 창이 떴다. [귀환 조건: '실패의 이치'를 목격하고, '징비'의 의미를 각성한 뒤, '첫 번째 기록'이 시작될 때.] ​"여보!" 희성과 다온이 화면을 보며 경악했다. "'첫 번째 기록'...? 그게 뭐지?"



500년을 뛰어넘은 공저(共著)


​류성룡은 붓을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쓸 수가 없소." "대감?" "나는 지금 전하를 보필하여 이 난을 수습해야 할 '영의정'이오. 앉아서 글을 쓸 시간이 없소. 이것은... 패배한 자가 아닌, 살아남은 자의 몫이오." ​희성은 '첫 번째 기록'이라는 단어와 류성룡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사랑방 구석에 앉은 김민수와 류시인을 바라보았다.


​"우리입니다, 대감." 희성이 입을 열었다. "대감은 '전쟁'을 기록하십시오. 저희는... '실패의 이치'를 기록하겠습니다."
​희성이 김민수와 류시인에게 다가갔다. "두 분이 필요합니다." "우리?" 김민수가 의아해했다. ​"김 의원님. 의원님은 '무기'가 왜 필요했는지, 그 '전략'의 실패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달으셨습니다. 1592년의 '전략적 실패'를 기록해 주십시오."
"..."
"류 작가님. 작가님은 '신중론'이 어떻게 '명분'을 잃게 만드는지, 그 '정치적 실패'를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각성하셨습니다. 1592년의 '정치적 실패'를 기록해 주십시오." ​희성이 류성룡에게 종이와 붓을 청했다. "대감. 저희 네 사람이... 2025년의 저희가 겪은 그 '실패의 이치'와, 1592년 저희가 목격한 이 '실패의 이치'를... 하나로 합쳐, '첫 번째 징비록'을 쓰겠습니다."



좌표, 그리고 작별


​김민수와 류시인은 망설였다. 2025년의 보수와 진보가, 500년 전의 종이 위에 '공동의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합시다." 류시인이 결연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이... 우리의 '징비'요." "...좋소." 김민수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희성(역사학자)이 뼈대를 잡고, 김민수(전략가)가 군사적 실패를, 류시인(논객)이 정치적 실패를 구술하기 시작했다.


다온(통역가)이 붓을 들고, 그들의 21세기 언어를, 16세기 조선의 절절한 문장으로 종이 위에 옮겨 적었다. 류성룡은 그 모습을, 자신의 후손들이 '징비'의 의미를 완성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온의 붓끝이 움직였다. 그녀는 이 모든 사태를 관통하는, 과거 하회마을에서 류성룡의 비밀을 증명했던 바로 그 문장, '불타버린 8조'의 핵심을 첫 줄에 적어 내렸다.


​“아(我)와 피(彼)가 오직 당색(黨色)으로 나뉘어, 징조(徵兆)를 징조라 말하지 못하고...”


​그 문장이 적히는 순간. '지경(태블릿)'이 방 안의 모든 촛불을 압도하는, 눈부신 백색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빛이 단순한 팝업창이 아니라, 방 전체를 진동시키며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귀환 조건: 달성.] [좌표 고정: 2025년 서울. 동기화 시작.] ​"아...!" "여보! 돌아가는 거야!" 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며, 네 사람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희성과 류시인이 류성룡을 향해 본능적으로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흙먼지 묻은 도포 자락이 바닥에 쓸렸다. "대감! 부디... 부디 강녕하십시오!" 김민수 의원조차, 이 위대한 정치인이자 조상 앞에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온이 눈물을 흘리며 류성룡을 바라보았다. "대감... 잊지 않겠습니다..." ​류성룡은 빛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1년간의 기이한 만남을 담담히 마무리했다. 그는 그들이 남긴, '첫 번째 징비록'이 적힌 종이를 들어 보이며, 자신의 후손들에게 마지막 명을 내렸다. ​"가시오. 가서... 그대들의 '징비'를 완성하시오."



​빛이 방을 삼켰다. 네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촛불이 다시 흔들렸을 때, 사랑방은 조용해졌다. 류성룡은 1년 전처럼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의 손에는, 500년 뒤의 후손들과 함께 쓴 '징비(懲毖)'의 첫 장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