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기록할 '자격'
선조가 요동행을 포기한 그날 밤. 평양성의 절망적인 공기는 잠시 걷혔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희망이 아닌 위태로운 정적이었다. '패배주의자' 대신들은 류성룡과 500년 뒤의 '괴인' 네 사람에게 밀렸다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옥포의 승리'라는 실체적 증거 앞에서는 물러섰지만, 그들은 여전히 선조의 곁에서 '압록강'을 속삭였다.
류성룡의 사저 사랑채.
김민수와 류시인은 난생처음 '협력'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서먹하게 방구석 양 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진영'은 달랐고, 그 어색함은 1592년의 지옥 속에서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다온이 젖은 도포 자락을 여미며 물었다. 희성은 '지경(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붉은색 [실패의 이치 99.0%]라는 글자는, '옥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단 0.1%도 변하지 않았다.
"대감, [99.0%]... 그대로입니다. 이 승리 하나로는 '실패의 이치'를 깰 수 없습니다." 희성의 보고에, 류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희성." 류성룡이 다온을 통해, 희성을 조용히 불렀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 까닭이... 고작 '옥포의 승리' 하나를 위함은 아닐 테지." "..."
"그대들은 '실패의 이치'를 막으러 왔다고 하였소. 허나, 전쟁은 이미 터졌고, 우리는 실패했소. 그렇다면... 그대들이 온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희성은 류성룡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실패를 '경계'하도록 하는 것. 희성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대감. 저희는 이 전쟁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감은... 이 실패를 '기록'하셔야 합니다." "기록이라니?" "500년 뒤, 저희의 시대에도 똑같은 '실패의 이치'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대감께서 '불타버린 8조'를 쓰며 고뇌하셨던 그 '붕당'이, '신중론'이라는 이름으로 경고를 묵살했던 그 '민낯'이... 저희 시대에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희성의 목소리가 절박해졌다. "부디... 기록해 주십시오. 붕당이 어찌 나라를 망쳤는지. '융통성'과 '서열'이 어찌 군대를 무너뜨렸는지. '신중론'이 어찌 백성을 버렸는지. 그 모든 '실패'를 기록하여, 500년 뒤의 저희가... 다시는 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하게 해 주십시오." 류성룡은 희성의 말을 들으며, 도포 소매 안에서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가 자신의 고뇌('불타버린 8조')를 꿰뚫어 본 이 후손에게, 이제는 '미래의 경고'까지 전해 듣고 있었다.
류성룡이 붓을 들었다.
"...과거의 실패를 '징계(懲)'하여, 미래의 재앙을 '대비(毖)'한다..."
그가 '징(懲)'자와 '비(毖)'자를 종이 위에 적었다. <징비록>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류성룡이 '징비(懲毖)'라는 두 글자를 적는 순간, 희성의 '지경(태블릿)'이 강렬한 '녹색' 빛을 뿜었다.
[새로운 과업: '징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붉은 [99.0%] 화면 위로 새로운 창이 떴다. [귀환 조건: '실패의 이치'를 목격하고, '징비'의 의미를 각성한 뒤, '첫 번째 기록'이 시작될 때.] "여보!" 희성과 다온이 화면을 보며 경악했다. "'첫 번째 기록'...? 그게 뭐지?"
류성룡은 붓을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쓸 수가 없소." "대감?" "나는 지금 전하를 보필하여 이 난을 수습해야 할 '영의정'이오. 앉아서 글을 쓸 시간이 없소. 이것은... 패배한 자가 아닌, 살아남은 자의 몫이오." 희성은 '첫 번째 기록'이라는 단어와 류성룡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사랑방 구석에 앉은 김민수와 류시인을 바라보았다.
"우리입니다, 대감." 희성이 입을 열었다. "대감은 '전쟁'을 기록하십시오. 저희는... '실패의 이치'를 기록하겠습니다."
희성이 김민수와 류시인에게 다가갔다. "두 분이 필요합니다." "우리?" 김민수가 의아해했다. "김 의원님. 의원님은 '무기'가 왜 필요했는지, 그 '전략'의 실패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달으셨습니다. 1592년의 '전략적 실패'를 기록해 주십시오."
"..."
"류 작가님. 작가님은 '신중론'이 어떻게 '명분'을 잃게 만드는지, 그 '정치적 실패'를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각성하셨습니다. 1592년의 '정치적 실패'를 기록해 주십시오." 희성이 류성룡에게 종이와 붓을 청했다. "대감. 저희 네 사람이... 2025년의 저희가 겪은 그 '실패의 이치'와, 1592년 저희가 목격한 이 '실패의 이치'를... 하나로 합쳐, '첫 번째 징비록'을 쓰겠습니다."
김민수와 류시인은 망설였다. 2025년의 보수와 진보가, 500년 전의 종이 위에 '공동의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합시다." 류시인이 결연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이... 우리의 '징비'요." "...좋소." 김민수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희성(역사학자)이 뼈대를 잡고, 김민수(전략가)가 군사적 실패를, 류시인(논객)이 정치적 실패를 구술하기 시작했다.
다온(통역가)이 붓을 들고, 그들의 21세기 언어를, 16세기 조선의 절절한 문장으로 종이 위에 옮겨 적었다. 류성룡은 그 모습을, 자신의 후손들이 '징비'의 의미를 완성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온의 붓끝이 움직였다. 그녀는 이 모든 사태를 관통하는, 과거 하회마을에서 류성룡의 비밀을 증명했던 바로 그 문장, '불타버린 8조'의 핵심을 첫 줄에 적어 내렸다.
“아(我)와 피(彼)가 오직 당색(黨色)으로 나뉘어, 징조(徵兆)를 징조라 말하지 못하고...”
그 문장이 적히는 순간. '지경(태블릿)'이 방 안의 모든 촛불을 압도하는, 눈부신 백색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빛이 단순한 팝업창이 아니라, 방 전체를 진동시키며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귀환 조건: 달성.] [좌표 고정: 2025년 서울. 동기화 시작.] "아...!" "여보! 돌아가는 거야!" 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며, 네 사람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희성과 류시인이 류성룡을 향해 본능적으로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흙먼지 묻은 도포 자락이 바닥에 쓸렸다. "대감! 부디... 부디 강녕하십시오!" 김민수 의원조차, 이 위대한 정치인이자 조상 앞에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온이 눈물을 흘리며 류성룡을 바라보았다. "대감... 잊지 않겠습니다..." 류성룡은 빛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1년간의 기이한 만남을 담담히 마무리했다. 그는 그들이 남긴, '첫 번째 징비록'이 적힌 종이를 들어 보이며, 자신의 후손들에게 마지막 명을 내렸다. "가시오. 가서... 그대들의 '징비'를 완성하시오."
빛이 방을 삼켰다. 네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촛불이 다시 흔들렸을 때, 사랑방은 조용해졌다. 류성룡은 1년 전처럼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의 손에는, 500년 뒤의 후손들과 함께 쓴 '징비(懲毖)'의 첫 장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