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의 느림과 시티폰의 추억
지금은 휴대폰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그 당시(90년대)에 휴대폰은 둘째치고 삐삐 하나만 있어도 부러움의 대상이던 시절이었다. 012, 015로 시작하는 삐삐 번호에 1004, 486, 8282 같은 숫자가 찍히면, 온 신경이 그 작은 액정에 쏠리던 기억이 난다.
이 숫자들이야말로 우리만의 '암호'였다.
17171771: I LUV U (숫자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486: 사랑해 (글자 획수)
8282: 빨리빨리
1004: 천사
11010: 흥 (90도로 돌려 보면 비로소 보인다.)
그럼 여기서 퀴즈 하나.
이처럼 숫자 하나로 암호를 해독하듯 메시지를 전달하던 낭만이 있었다. 사서함에 저장된 메시지를 듣기 위해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줄 서던 기억도 있다. 단순 음성 메시지인데도 굳이 음성으로 답장하던 기억도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서함에는 설렘만 담겨있던 것은 아니다. 군입대를 앞둔 11월 어느 날, 삐삐 음성사서함으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듀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 친구는, 故 김성재 소식을 듣고 오열하며 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바로 전화해서 달래 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처럼 처음에는 숫자만 전달하던 삐삐는 음성 사서함 기능을 더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혁신적인 진화를 이룬 아이템이 등장한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 늘어선 긴 줄 옆에서, 여유롭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통화하는 사람들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바로 휴대폰의 조상이자, PCS(Personal Communication System)의 선배 격인 시티폰이다.
시티폰은 공중전화 기지국 근처, 파란색 'City Phone' 마크가 붙어있는 곳이면 바로 전화를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아이템이었다. 발신만 가능한 폰이므로 수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수신만 할 수 있는 삐삐와는 '찰떡궁합'이었다.
줄 서지 않아도 바로 걸 수 있는 시티폰이야말로 그 당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삐삐는 '느림의 미학'이었지만,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가며 여유가 없어지는 지금이다. '8282(빨리빨리)'라는 숫자가 이미 모든 것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01577이라는 초고속호출 서비스도 이런 '빨리빨리'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문자의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 것에 초조해하는 지금, 그 당시를 되돌아보면 어쩌면 그 느림과 기다림의 미학이 낭만이던 시절이었다. 숫자 암호를 해독하고 공중전화를 찾아 급하게 뛰어다니던 그 '느린 연결'이 주던 설렘을 추억할 수 있어 행복하다. 지금 우리에게, 어쩌면 그 숫자 '1'이 사라지기를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