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을 향해 쏘다
2025년, 네 사람이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첫 번째 폭탄은 류시인 작가가 터뜨렸다. 그의 칼럼이 주요 언론사 1면에 대서특필되었다. 제목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1592년의 묵살을 목격했다 : 2025년 정부에게 고함]
칼럼의 내용은 '진보 진영'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이었다.
"… 본인은 1년간 현 정부의 '신중론'을 옹호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이었다. 현 정부가 '위협 축소'를 위해 사용하는 '신중론'이라는 단어는, 1592년 임진왜란 직전 류성룡의 경고를 묵살했던 '동인 강경파'의 논리와 94.7% 일치한다… (중략) …'보수 야당의 공세'라는 핑계로 이 경고를 묵살한다면, 우리는 1592년의 불타는 궁궐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맥락'이 아니라 '생존'을 논할 때다."
'진보 진영'은 패닉에 빠졌다. 가장 강력한 스피커가 적에게 투항한 셈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그를 '변절자', '노망', '김민수에게 포섭됐다'며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국회. 두 번째 폭탄은 김민수 의원이 터뜨렸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보수 야당'의 의원들은 그가 드디어 류희성 박사에게 받은 94.7% 데이터를 '무기'로 휘두르길 기대하고 있었다.
"동지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김민수가 단상에 섰다.
"저는 오늘,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기자회견장이 술렁였다.
"류희성 박사의 94.7% 경고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야당 의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김민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정치 공세'의 무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 안보'의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 순간부로, 이 사안에 대한 모든 '정치 공세'를 중단할 것을 선언합니다!"
야당 의원석에서 "미쳤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오히려… 나는 정부에게 '초당적 협력'을 제안합니다. 지금 당장 '안보 위기'를 인정하고 대비책을 마련하십시오! 우리 당은 이 문제에 한해, 그 어떠한 '진영 논리'도 없이 정부의 대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할 것입니다!”
'보수 진영' 역시 패닉에 빠졌다. 가장 강력한 투사가 적에게 백기를 든 셈이었다.
연구실, 희성과 다온이 이 모든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었다.
"… 해냈어요. 두 사람이." 정부(청와대 혹은 내각)는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실패의 이치'가 작동하려면, '야당(김민수)이 공격'하고, '여당(류시인)이 방어'해야 했다. 그런데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여당 스피커(류시인)'가 내부에서 공격하고, '야당 수장(김민수)'이 외부에서 옹호를 선언했다. '신중론'과 '정치 공세'라는 두 개의 방패가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오후 2시.
정부 대변인(2025년의 '동인 강경파')이 굳은 얼굴로 긴급 브리핑에 나섰다. 그는 류시인과 김민수를 동시에 비난했다.
"…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보의 논객과 보수의 수장이 마치 사전에 모의라도 한 듯, 국가 안보를 빌미로 현 정부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는… '비상식적인 야합'이며, '국정 동력을 마비'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브리핑을 보던 희성의 눈이 번뜩였다. 94.7% 모니터는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희성 씨?"
"저 사람입니다, 다온 씨."
희성이 정부 대변인의 얼굴을 가리켰다.
"실패의 이치'는 '진영' 그 자체가 아니었어요. 그 '진영' 뒤에 숨어, '신중론'과 '분란'이라는 단어로 경고를 묵살하는… 바로 저 사람. 저 '시스템' 그 자체였어요."
1592년, 류성룡의 장계를 묵살했던 '동인 강경파'. 2025년, 류시인과 김민수의 '협력'마저 '야합'으로 몰아붙이며 묵살하는 '정부 핵심부'.
"김 의원님과 류 작가님은 '진영'을 깼습니다. 하지만 '실패의 이치'는 아직 저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희성이 김민수와 류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분, 수고하셨습니다. '1차전'이 끝났습니다."
"…1차전?" (김민수)
"이제 '2차전'입니다. 저들은 '보수'와 '진보'의 협력을 '야합'으로 규정했습니다. 저들을 논파할… 500년 전의 '원본'이 필요합니다."
희성은 1592년 평양성에서, 류성룡 대감이 그들에게 건네주었던 '첫 번째 징비록' 사본(寫本)을 품에서 꺼냈다.
"우리가… 1592년에 '다녀왔다'는 것을 증명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