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론'의 대가는 '신뢰'의 붕괴다
"타임머신 타고 온 애국자 납셨네!",
"1592년 망상가들, 안동 종갓집이랑 짜고 국민 기만!",
"정신 감정이 시급하다."
다음 날, 언론과 인터넷은 네 사람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94.7%의 경고는 '사실'로 증명되었지만, 정부가 "5.3%의 다른 맥락"과 "신중론"을 내세우며 그 '권위'를 묵살해 버리자, 여론은 '가장 자극적인' 부분(타임슬립)만 물어뜯었다. '진짜 위기'는 가십 뒤로 사라졌다.
김민수 의원의 휴대폰은 '제명'을 요구하는 동료 의원들의 문자와 당원들의 비난으로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류시인 작가는 자신이 평생 쌓아온 '진보 논객'이라는 명성이 '변절자', '노망'이라는 단어들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그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들은 1592년의 지옥보다 더 차가운 2025년의 '고립'을 마주했다.
"… 끝났군요."
김민수가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다.
"우린 '배신자'가 됐고, '미치광이'가 됐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아요." "아니… 우리가 '실패의 이치'에 졌어요." 희성이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가 절망한 것은 여론이 아니었다. 94.7% 숫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95.3%… 96.8%… 98.4%…"
"여보…!"
다온이 희성의 팔을 붙잡았다.
"정부의 '마지막 묵살' 때문이에요."
희성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저들의 '신중론'이… 1592년 전쟁 직전과 완벽히 동기화되고 있어요."
모니터의 숫자가 99.9%에서 멈췄다. 불길하게 깜박였다.
"방법이… 없단 말인가."
김민수가 주저앉았다.
"… 있습니다."
희성이 결연하게 일어섰다.
"데이터도, 기록도 소용없다면… 우리가 직접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김민수와 류시인을 바라봤다.
"우리는 1592년 평양성에서, '보수'의 전략과 '진보'의 명분이 하나 되었을 때 '실패의 이치'를 깼습니다. 지금 정부는 무능합니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서, '초당적 위기관리 체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은 명백한 '정치적 반역'이었다.
"…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징비'입니다."
김민수가 희성의 손을 잡았다.
"합시다. 어차피 우린 '배신자'입니다."
류시인도 희성의 다른 손을 잡았다.
"다온 씨."
희성이 아내의 손을 잡았다.
"1592년의 '비명'과 우리가 찾은 '희망'을… 세상에 전해주세요."
다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연구실의 모든 장비를 동원해, 전 세계로 송출될 긴급 라이브 방송을 준비했다. 희성, 김민수, 류시인이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섰다. 다온이 그 옆에서 1592년의 참상을 증언할 준비를 했다.
"… 시작합니다."
희성이 방송 시작 버튼을 누르려던 바로 그 순간.
“끼이이이이익-!”
연구실의 모든 모니터가 찢어지는 듯한 소음을 냈다.
99.9%라는 숫자가 100.0%로 바뀌며 화면 전체를 뒤덮었다.
[패턴 동기화: 100.0%]
[위협 실행: 2025년의 '파천(播遷)'이 시작되었습니다.]
네 사람은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봤지만 다행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잠시 내쉬었다. 바로 그 순간, 연구실의 모든 TV 화면이 일제히 지지직거리며 속보 자막을 띄웠다.
"방금, 전국 전력 노동조합과 운수 노동조합이… 정부의 '위기 묵살'에 항의하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뭐…?"
김민수가 얼어붙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앵커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노조는… '정부가 1592년의 교훈(AI 경고)을 '망상'으로 치부하며 국민 안전을 외면했다'며… '정부가 위기 대응 시스템을 정상화할 때까지 파업을 멈추지 않겠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지금 서울 지하철과 KTX 운행이 전면 중단됐습니다! 병원의 필수 전력 공급마저 위태롭다는 소식입니다!"
희성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94.7%의 경고는 '외부의 공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들은 이 경고를 받고도 '진영 논리' 때문에 스스로 묵살하고, 결국 국민의 신뢰를 잃어 사회 시스템이 붕괴될 것이다"라는 '알고리즘' 그 자체였다. 정부의 '신중론'이, '망상'이라는 마지막 묵살이… 2025년의 '파천'을 불러온 것이다. 1592년 백성들이 불을 질렀다면, 2025년 백성들은 시스템을 멈춰 세웠다.
뉴스 속보가 이어졌다.
"총파업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생필품 사재기에 나서면서 마트와 주유소가 아수라장이 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에 대한 불신이 폭발하면서… 지금 이 시간, 전국 각지에서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동시다발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경찰과의 충돌도 격화되고 있습니다!"
창밖, 평화롭던 서울의 풍경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멈춰 선 지하철역에는 사람들이 갇혀 아우성쳤고, 도로 위에는 기름을 넣으려는 차들이 뒤엉켜 경적을 울려댔다. TV 화면 속에서는 광화문 광장으로 분노한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1592년, 왕이 도성을 버린다는 소식에 궁궐로 몰려가 돌을 던지던 그 혼란이 2025년에 재현되었다.
"이게… 이게 2025년의 '파천'이야…"
류시인이 창밖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그의 얼굴에 1592년 임진강의 진흙이 다시 묻어나는 듯했다. TV 화면 속 정부 대변인은 여전히 "모든 것은 류희성 박사 일행의 선동 때문"이라며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연구실로 들이닥치는 물리적인 위협은 없었다. 정부조차 이 혼란 속에서 무력해진 것이다. 희성이 절망적인 눈으로 100.0% 화면과 창밖의 아비규환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의 마지막 '징비'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