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025년의 징비록(懲毖錄)

전략과 명분이 나라를 구한다.

by 유블리안


1592년 평양성의 데자뷔

​​​국가 시스템은 마비되었다. '실패의 이치'를 상징하는 정부는, 1592년 평양성의 선조처럼 '남 탓(희성 일행)'만 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연구실에 갇힌 네 사람은 1592년 평양성의 류성룡과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
​"어떻게 해야 하죠? 정말… 이제 끝인 건가요?"
절망 섞인 목소리로 다온은 물었다. 희성은 방전된 '지경(태블릿)'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한다.​
"아니요. 해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1592년 평양성에서, 우리가 선조의 '요동행'을 막았던 것처럼."
​김민수와 류시인이 희성을 바라보았다. 1592년, 그들이 처음으로 '협력'했던 그 순간.
​"김 의원님." 희성이 김민수를 바라봤다. "그때, 의원님은 옥포 해전의 '전략적 의미(보급로)'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류 작가님."
희성이 류시인을 바라봤다.
"작가님은 그 승리의 '인문학적 의미(명분, 희망)'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희성이 100.0%가 뜬 모니터를 가리켰다.
"지금 2025년의 '시스템(국가 기능)'이 마비됐습니다. 그리고 2025년의 '명분(신뢰)'이 무너졌습니다."


'배신자'들의 마지막 임무


​김민수와 류시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 내 차례군요."
김민수(보수 전략가)가 일어섰다.
"지금 정부는 마비됐습니다. 하지만 '사회 필수 시스템'은 살려야 합니다."

그는 '제명'도 두려워하지 않고, '배신자'의 신분으로 '보수 야당'과 '주요 노조 위원장'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정부를 공격할 때가 아닙니다! 국민의 생명이 달렸습니다! 당장 파업을 풀고 '초당적 위기관리'에 동참해 주십시오! 내가… 내가 1592년의 '전략'을 알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제 차례죠."
류시인(진보 논객)이 노트북을 열었다.
"지금 국민들은 '희망'을 잃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1592년의 의병(義兵)처럼, 국민을 '명분'으로 묶어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통신망(SNS)을 통해, '변절자'의 신분으로 '진보 진영'과 '국민'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해선 안 됩니다. 1592년의 백성들이 나라를 구했듯… 지금은 '각성한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를 '질서 있는 요구'로 바꾸어야 합니다! '신중론'이 아닌 '행동'이 필요합니다!"


'실패'했기에 '승리'한다


​'실패의 이치'를 상징하는 정부는 "저 미치광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다!"라며 그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김민수의 '전략적 호소'에, 총파업을 주도했던 노조가 "국민 안전을 위해 필수 인력은 복귀한다"며 한발 물러섰다. 류시인의 '명분 있는 호소'에, 거리로 나섰던 시민들이 폭력이 아닌 '평화 시위'로 정부의 퇴진과 '위기관리 위원회' 구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실패의 이치(정부)'는 고립되었다. '진영'을 넘어선 '징비(김민수+류시인)'가 '실패'를 이기기 시작했다. ​희성의 연구실. 100.0%로 멈춰 있던 붉은 숫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99.8%… 95.2%… 10%… 그리고 마침내.
​[패턴 동화: 0.0%]

500년을 건너온 편지


​몇 주 후.


대한민국은 '10.19 총파업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다. 실패의 이치'를 상징하던 정부는 총사퇴했다. '배신자'로 낙인찍혔던 김민수와 류시인은, 국회가 구성한 '초당적 위기관리 위원회'의 공동 의장이 되어 나라를 수습하고 있었다. 네 사람은 다시 연구실에 모였다. 그때, 비서가 "손님이 오셨습니다"라고 알렸다. ​풍산 류 씨(豊山 柳氏) 종친회장이었다. 그는 지난번 논란 속에서 공개되었던 그 '종가 별지'를 내어주었던 장본인이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친회장은 네 사람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제가 이것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그가 꺼낸 것은 '종가 별지'가 담겨 있던 궤짝 '바닥'에서 나온, 또 하나의 작은 서찰(書札)이었다. 500년의 세월에 바스러질 듯한 종이였다.
​"이것은… 대대로 종손에게만 전해진 밀지(密旨)입니다. '500년 뒤, 4인의 빈객(賓客)이 다시 돌아와 '징비'를 완성하는 날, 비로소 이것을 전하라'는 유훈(遺訓)과 함께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
네 사람은 숨을 죽였다. 류성룡 대감이… 그들의 귀환을 알고 편지를 남긴 것이었다. 다온이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받아 들고,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나의 후손, 희성과 시인. 그리고 나의 벗, 민수와 다온에게. 그대들이 떠난 뒤, 나는 평생을 그대들과의 '징비'를 완성하는 데 바쳤소. 그대들이 겪었듯, 나는 수많은 '실패의 이치'와 싸웠고, 수없이 패배했소. 허나, 그대들과 나누었던 '전략'과 '명분'을 잊지 않았소."



그대들이 나의 '징비'라


​다온의 목소리가 눈물에 잠겼다. 김민수와 류시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 나는 이제 눈을 감지만, 그대들의 시대가 걱정되지 않소. 500년 전 지옥 속에서도 '진영'을 넘어 손을 잡았던 그대들이기에, 500년 뒤의 그 '실패의 이치' 또한 능히 깨뜨렸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 ​서찰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다온은 결국 흐느꼈다. ​
"… 나의 '징비록'은 종이에 남기나, 그대들은 살아있는 '징비'가 되었소. 부디, 나의 벗들이여. 그대들의 시대를… 지켜주시오." ​
네 사람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그들을 지켜보던 종친회장이 500년 전 류성룡 대감이 그랬던 것처럼, 온화하지만 깊은 눈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종친회장의 입에서, 류성룡 대감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 그대들이 자랑스럽소. 그대들이야말로… 나의 '징비'라."




에필로그
집필을 마치며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20부작이라는 긴 글, 『징비록, 현대 정치인을 심판하다』와 함께 울고 웃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함께 읽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보내주신 뜨거운 관심과 응원이 없었다면 이 긴 이야기를 무사히 마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서애 류성룡 대감의 『징비록』을 읽으며 품었던 작은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경계하여 미래를 대비한다'는 그 절절한 가르침이,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만약 첨단 AI가 500년 전 조선을 파국 직전까지 몰고 갔던 '실패의 이치' (특히 '진영 논리'라는 이름의 분열)가 2025년 대한민국에 94.7%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을 경고한다면, 우리는 과연 귀 기울일 수 있을까? 아니, 귀 기울이려 할까? 하는 두려운 질문이었습니다.


​희성, 다온, 김민수, 류시인. 너무나 다른 배경과 이념을 가진 네 사람이 1591년의 절망적인 현실 속으로 떨어져, 서로 반목하고 오해하다가 마침내 각성하고 손을 잡는 과정은, 제가 이 글을 통해 가장 그리고 싶었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바꾸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역사의 참혹한 실패를 온몸으로 겪으며, 자신들이 굳게 믿었던 '진영'의 논리가 얼마나 허망하고 위험한 것인지를 깨달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각자의 '각성'과 마침내 이루어낸 위태로운 '협력'이야말로, 류성룡 대감이 바라셨을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징비'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역사가 반복된다는 숙명론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복되는 '실패의 이치'를 인지하고,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진영'을 향해 쓴소리를 하고, 심지어 '배신자'라는 낙인까지 감수할 용기를 낼 수 있는가, 그 고통스러운 선택에 대해 묻고 싶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외부에서 오는 정체불명의 위협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라놓는 우리 안의 '분열'과 '불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부디 이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께 작은 울림이 되었기를, 잠시나마 즐거운 상상 여행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자의 삶과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사회 속에서 혹시 반복되고 있는 '실패의 이치'는 없는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경고'는 없는지 한 번쯤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작가로서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류성룡 대감의 『징비록』이 그러했듯, 2025년 이후의 '징비'는 결국 우리 스스로 써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긴 시간 동안 네 사람의 위태롭고도 의미 있는 여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그들의 '징비'가 헛되지 않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징비'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유블리안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