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의 충격, 1994년의 해방

서태지와 아이들, X세대의 문화 대통령

by 유블리안
특종TV연예 방송 화면 스포츠경향 이미지 인용


레전드의 등장


때는 1992년 4월, MBC <특종! TV연예>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신곡 소개'라는 코너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를 불렀다. 전설의 트리오, 서태지와 아이들이 탄생하게 된 전설적인 데뷔 무대였다.
​당시 심사위원들(기성세대 평론가, 작곡가 등)에게 최하점 수준의 혹평을 받았지만,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학교는 그야말로 '서태지 열풍'이었다. 복도에서는 춤을 따라 하는 친구들이, 교실에서는 워크맨으로 테이프를 늘어지게 듣는 친구들로 가득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 우리나라 음악 시장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심사위원이 아닌, 소비자들이 주인이 되다


​심사위원들은 그동안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랩과 댄스에 대한 반감으로 혹평을 쏟아내며 최저점을 주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학생들과 20대 청년들의 폭발적인 소비가 이어지며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힙합도, 댄스도 아닌 생소한 장르의 음악이니, 기성세대들에게는 아무래도 낯설고 괴이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음악은 개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던 'X세대'의 감성을 제대로 자극했고,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했다.

​그 증거로, 1992년 <가요톱텐>에서 한 앨범에 2회 이상 '골든컵'을 수상한 가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신승훈과 함께 유이했다.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로 말이다.)

​특히 '환상 속의 그대'에는 같은 시나위 출신인 김종서가 코러스에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난 알아요'가 준 신선한 충격


​처음 '난 알아요'를 들었을 때,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발라드나 댄스가 주를 이루던 그때, 빠른 비트에 실린 랩, 그것도 정통 랩이라기보다 말하듯 중얼거리는 그 스타일이 너무도 가슴에 꽂혔다.

​특히 '둥둥 둥둥' 비트가 울리는 댄스 브레이크 타임에 터지는 '각 잡힌' 안무는 모든 학생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 역시 신승훈의 감미로운 발라드 음악을 즐겨 들었지만, 어느 순간 서태지에게 푹 빠져버렸다. 서태지(Seo Taiji)라는 이름이 '스테이지(Stage)'에서 따온 것이라 하니, 그는 말 그대로 무대를 휘어잡은 셈이다. ​아직도 그 노래를 들으면,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댄스 본능이 스멀스멀 깨어나기 시작한다.



​'교실 이데아', 10대의 해방구가 되다


​1994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난 알아요'와는 또 다른 차원의 충격적인 노래가 발표되었다. 바로 '교실 이데아'라는 곡이었다. 교권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 '유'가 아닌 '류'로 성을 썼다고 선생님께 맞았던 나의 학창 시절 기억 위로, 그 가사가 꽂혔다. 그야말로 사이다 1.5리터를 원샷한 듯한 기분이었다.


​됐어 됐어. 그런 가르침은 됐어.
... (중략)...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심지어 이 곡을 역재생하면 '피가 모자라'라는 말이 들린다는 '백마스킹(Backmasking)' 논란이 터지며, 어른들은 '악마의 노래'라고 폄훼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논란은 오히려 홍보 효과를 낳았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더 큰 화제가 되었다.

​거기다 같은 3집 앨범에 실린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는 (반항을 넘어) 역사에 대한 궁금증까지 일깨워주었다. 당시 역사 선생님들이 가장 좋아했다는 루머(?)가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TV 데일리 뉴스기사 이미지 인용


그들은 '아재'가 되었지만


​그들은 단순한 유행가 가수가 아니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항상 이슈가 되었고, 실험정신이 돋보인 노래들은 항상 팬들을 열광시켰다.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선언 당시 눈물 흘리던 팬들, 다시 복귀했을 때 열광적으로 응원해 주던 팬들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던 그들이었으니.


​지금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닌 '서태지와 아재들'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세 명이 다시 한 무대에 설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