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밀리의 아슬아슬한 승부
회수권 11장 신공:
10장이 한 장으로 길게 이어진 회수권을 자와 칼로 미세하게 잘라 11장으로 만드는 기술. 장당 약 0.9mm씩을 훔쳐내어 티 안 나게 11번째 장을 탄생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당시 학생들에게는 용돈을 아끼기 위한 일종의 ‘생존 비기’였다.
자율버스의 빈틈:
승객이 직접 요금함에 표를 넣는 방식이었기에, 운전하느라 바쁜 기사님이 얇아진 종이의 두께를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노렸다.
회수권 케이스:
은색 양철로 된 직사각형 케이스. 옆에 달린 검은 고무 롤러를 엄지로 밀면 표가 한 장씩 배출되는 방식이라, 구겨짐 방지는 물론 폼나게 표를 낼 수 있는 '인싸템'이었다.
1988년, 0.9밀리의 마법
희수 방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부하는 정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치밀하게 “제조하는” 정적이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로 회수권 한 묶음이 길게 누워 있었고,
희수는 그걸 마치 정교한 외과 수술을 집도하듯 다루고 있었다.
희수의 왼손은 30센티미터 자를 꽉 누르고 있었고,
오른손에 들린 커터칼 날은 회수권의 점선보다 아주 미세하게,
약 1밀리미터 안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스윽… 스윽…”
종이가 잘려 나가는 소리는 예리했다.
그것은 10장의 희생으로 새로운 한 장을 창조해 내는,
이른바 ‘11장 신공’의 현장이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한 번만 삐끗해도 11번째 장은커녕 멀쩡한 표까지
못 쓰게 될 수도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유희수.”
진우 삼촌이었다.
진우 삼촌은 노크라는 절차를 생략하는 게 집안의 불문율인 양
당당하게 등장했다.
희수는 화들짝 놀라며 자와 칼을 회수권 위로 덮었다.
하지만 삼촌의 눈은 매보다 빨랐다.
“… 너 지금 위조지폐 만드냐?”
희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내일 학교 갈 준비요. 표 자르고 있었어요.”
진우 삼촌은 성큼성큼 다가와 책상 위에 흩어진
회수권 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불빛에 비춰보며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야, 이 표. 왜 이렇게 날씬하냐? 다이어트했냐?”
들켰다.
희수는 잠시 시선을 피했지만, 곧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88년은 요령과 눈치의 시대가 아니던가.
“그게… 경제적인 재단법이죠.”
“경제적인 재단? 허, 말은 청산유수네. 너 이거 11장 만드는 거지?”
진우 삼촌은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간도 크다. 그러다 내일 버스 기사 양반이
‘학생, 표가 왜 이렇게 홀쭉해?’ 하고 잡으면 어쩔 거야?”
“에이, 삼촌. 요즘 기사 아저씨들은 운전하고 거스름돈 내주느라 바빠요.
그냥 뭉쳐서 요금함에 쏙 넣으면 절대 몰라요.”
“너 그러다 나중에 파출소 간다.”
삼촌은 겁을 주면서도, 희수가 만들어낸 감쪽같은 11번째 회수권을 보며
내심 감탄하는 눈치였다.
그 0.9밀리의 오차 없는 간격은 거의 장인의 경지였다.
“이게 다 과학이에요, 삼촌. 여기서 조금씩 아껴서 모으면 일주일에 크림빵이
하나 더 생기는 거라고요.”
“오~ 크림빵. 꿈이 소박해서 눈물 난다.”
진우 삼촌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희수의 책상 위에
‘촤르르’ 쏟아냈다.
“희수야, 인생은 말이다. 이렇게 짤랑거리는 맛이 있어야 하는 거야.”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노란 황동색 토큰들이었다.
책상 위에서 묵직하게 구르는 토큰 소리는 희수의 얇은
종이 회수권과는 차원이 다른 위엄을 뽐냈다.
“너처럼 가위질하느라 눈 빠질 일도 없고, 기사 아저씨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당당하게 ‘톡’ 던지는 거. 그게 바로 어른의 여유지.”
희수는 입을 삐죽거렸다.
“삼촌은 직장인이니까 그렇죠. 저도 어른 되면 토큰 쓸 거예요.”
“그래, 얼른 커라. 근데 너 그 기술은 나중에 이력서에 써도 되겠다.
손기술이 아주… 문화재급이야.”
진우 삼촌은 킬킬거리며 방을 나가려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희수야.”
“네?”
“내일 아침에 그 홀쭉한 표 내다가 걸리면 삼촌 모르는 척해라.”
“걱정 마세요. 제가 삼촌보다 빨라요.”
문이 닫히고, 방 안엔 다시 희수와 회수권,
그리고 삼촌이 흘리고 간 토큰 하나가 남았다.
희수는 마지막으로 완성된 11장의 회수권을
책상 한구석에 놓인 은색 양철 케이스에 조심스레 채워 넣었다.
노란 스티커가 붙은, 검은 고무 롤러가 달린 바로 그 케이스였다.
엄지손가락으로 롤러를 ‘스르륵’ 문지르자 표가 한 장 혀를 내밀듯
부드럽게 밀려 나왔다.
조금 얇아진 표들이었지만, 차가운 철제 케이스 안에
빡빡하게 들어찬 느낌이 든든했다.
그 속에는 중학생 희수의 절박하고도 귀여운 잔꾀가
꽉 들어차 있었다.
희수는 삼촌이 두고 간 토큰을 쥐어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일은… 크림빵 먹을 수 있겠다.”
그리고 1988년의 밤은, 종이 자르는 소리가 멈춘 자리에
소년의 작은 승리감만이 조용히 내려앉으며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