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으로 보이고 싶은 진수의 노력, 안경
그때 그 시절 상식: 80년대 유행, 금테 안경
1. 안경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안경은 단순히 눈이 나빠서 쓰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밤새 책을 보며 세상 고민을 하는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일부러 안경을 쓰기도 했습니다.
안경은 시력을 교정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은근한 “지적 연출”의 소품이기도 했지요.
2. 무거운 유리알
요즘처럼 가벼운 플라스틱이 아니라, 진짜 유리를 깎아 만든 유리 안경알이 흔했습니다.
콧등이 눌려 아플 정도로 무거웠지만, 유리 특유의 맑고 깨끗하게 보이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무거운 만큼 더 진지해 보인다는, 누가 시킨 적 없는 논리도 자연스럽게 따라붙었습니다.
3. 디자인의 특징
아래로 길게 늘어진 보잉 스타일의 금색 금속 테는 그 시절 '복학생'이나 '인텔리'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습니다.
1984년 10월, 안개 낀 대학교 교정
진수는 학교 길을 걸으며 자꾸만 코 아래로 내려오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올리고 또 올렸다. 안경은 내려오고, 진수의 체면은 그걸 다시 올리고.
가을 아침의 찬 안개 때문에 안경알이 뿌옇게 변했다가 이내 이슬처럼 맺혔다.
금색 테가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은 낯설었지만, 코끝을 묵직하게 누르는
안경의 무게가 진수는 왠지 뿌듯했다.
사실 이 안경은 진수가 어릴 적부터 꿈꿔온 ‘똑똑해 보이는 모습’의 완성이었다.
초등학교 때 안경을 쓴 짝꿍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참 지적으로 보였다.
어려운 책을 많이 읽어서 눈이 나빠진 것 같은, 그 진지한 분위기를 진수는 닮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텔레비전 바로 앞에 앉아 눈이 나빠지길 기다렸던 엉뚱한 밤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수상한 노력인데, 그때 진수는 진심이었다.
마침내 시력이 떨어졌다며 안경을 써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진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나도 지식인 쪽으로 입장.’
“야, 진수야! 너 안경 썼냐? 그게 뭐야, 할아버지 안경 같아!”
“모르면 말하지 마! 이게 최신 유행하는 보잉 스타일의 비행 조종사들이 쓰는 안경테라고.”
과방 문을 열자마자 친구 민우의 장난 섞인 목소리가 들렸고 진수는 맞받아 쳤다.
민우는 진수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선배들을 불러 모았다.
“선배님들, 진수 좀 보세요! 드디어 공부 좀 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안경까지 썼네요.
근데 테가 왜 이렇게 길어요? 그거 쓰면 생각도 길어져요?”
선배들도 웃으며 한 마디씩 했다.
“진수야, 안경 쓰니까 이제 진짜 대학생 같네.”
“이제 말할 때 ‘엣헴, 그러므로’ 같은 거 쓰는 거 아니야?”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진수의 여자 친구 순희가 한마디 거들었다.
“안경 쓰니까 진짜 공부 잘하게 생겼어. 나중에 교수님 하는 거 아니야? 호호”
진수는 갑자기 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경다리를 접었다.
다리 끝부분이 유리알 뒷면에 닿으며 ‘챙—’ 하고 청아하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플라스틱 안경에서는 들을 수 없는, 깨끗한 유리의 소리였다.
민수는 그 소리를 듣고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딱히 공부할 생각은 없었지만, 소리만큼은 공부를 시켰다.
진수는 유리가 깔린 과방 탁자 위에 안경을 내려놓았다.
유리와 유리가 만나며 ‘쨍~ ’하고 맑게 울리는 소리가 짧게 번졌다.
그 소리가 묘하게 “나 지금 똑똑해 보이지?” 하고 확인해 주는 것 같아서,
진수는 마음이 놓였다.
“이게 그냥 안경이 아냐. 진짜 유리알이라 무거워도 엄청나게 잘 보인다고.
세상이 이렇게 밝은 곳이었던가. 하하하”
진수는 안경 수건으로 유리알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손가락을 꾹 눌러 문지를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조금만 땀이 나도 콧등 아래로 미끄러지는 불편한 물건이었지만,
진수는 이 무게가 좋았다.
무거운 안경을 버티는 만큼 세상을 더 똑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일단 콧등부터 버텨야 했다.
“진수야, 안경알 구멍 나겠다. 그만 닦고 수업 가자.
아마 후회할 날이 올 거다. 안경이 이렇게 불편한 것이었나. 라고 말이야. ”
그러거나 말거나 민우의 말에 진수는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과방 벽의 대자보 글씨들이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1984년의 안개 낀 학교 풍경은, 묵직한 유리 안경알을 거쳐
아주 선명하게 진수의 눈 속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Classic is Forever.
진수는 코 위로 흘러내린 무게를 다시 한번 밀어 올리며, 가장 선명해진 청춘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오늘의 지성은 조금 무거웠지만, 그 무게만큼 청춘도 또렷해지는 날이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유리알에 보잉 스타일의 금테 안경. 지금 우리가 쓰는 안경들과 달리
많이 무거웠고 부딪혀서 깨지면 눈을 다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추억과 낭만은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필수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