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전시물 :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출력소 앞의 1.44MB 작지만 큰 불안감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리포트 제출 전쟁
학교 앞 출력소(복사집)는 ‘인쇄’보다 ‘구원’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개인 프린터가 귀하던 시절, 대학가 앞에는 “컴퓨터/타자/복사/출력” 간판을 건 가게들이 성업했고, 마감이 임박하면 디스켓을 든 학생들이 가게 안에 장사진을 쳤습니다.

버전 호환성 공포
집에서는 아래아한글로 작성했는데, 출력소 컴퓨터 버전이 더 낮거나 환경이 달라서 파일은 열리더라도 줄이 무너지고 표가 깨지고 글꼴이 바뀌는 대참사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그날의 전쟁은 내용이 아니라 서식에서 갈리기도 했습니다.

디스켓의 생존
가방 안에서 눌리거나 자석 필통 옆에 두었다가 데이터가 날아갈까 봐, 중요한 리포트 디스켓은 신줏단지 모시듯 했습니다. 셔츠 앞주머니는 그 시절 가장 안전한 금고였습니다.


1995년, A+을 향한 질주


1995년 6월의 어느 오후.

희수가 동현이의 자취방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야! 정동현! 컴퓨터 켜져 있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동현이가 놀란 토끼 눈으로 희수를 쳐다보았다.

“왜? 영장 나왔냐?”

“아니! 파일 확인! 지금 당장!”


희수는 셔츠 앞주머니에서 파란색 3.5인치 디스켓을 꺼냈다.

전공 서적 사이에 끼워 빳빳하게 모셔온, 지난 일주일의 밤샘이 담긴

[한국근현대사_중간. hwp] 파일이었다.


딱 1.44메가바이트짜리 플라스틱 조각인데, 그 안에는 희수의 잠, 라면, 새벽, 그리고 각주가 들어 있었다.


“출력소 가기 전에 네 걸로 확인해 봐야 돼. 저번에 전산실 갔다가 배드 섹터 나서 파일 날렸잖아. 빨리!”


동현이는 투덜거리며 의자를 내주었다.


“너 리포트가 아니라 폭탄 해체하는 표정이다.”

“폭탄 맞아. 내 학점이.”


희수는 떨리는 손으로 디스켓을 드라이브에 밀어 넣었다.


“철컥.”

“지이잉— 드르륵.”


익숙한 기계음이 들리고, 잠시 후 모니터에 희수가 작성한 리포트가 떴다. 다행히 파일은 살아 있었다.


희수는 화면을 한 줄, 두 줄 내려보며 숨을 삼켰다. 내용이 아니라 줄 바꿈, 표, 각주 번호—그런 것들이 멀쩡한 지부터 먼저 확인했다.


“됐다! 살아 있다!"


희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젝트 버튼을 눌렀다. “톡!” 하고 튀어나온 디스크를 다시 낚아챘다.


“야, 너… 이젝트 장인이다.”

“시간이 없잖아.”

“야, 나 간다! 출력소 마감 30분 전이야!”

“야, 같이 가! 나도 심심한데.”


동현이가 슬리퍼를 끌고 따라나섰다. 두 대학생은 학교 후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희수의 손에 들린 1.44메가바이트의 플라스틱 조각이 달리기 리듬에 맞춰 흔들렸다.


희수는 뛰면서도 디스켓을 꾹 쥐었다. 과장 같지만, 그때는 정말로—손에서 놓치면 데이터가 아니라 인생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학교 앞 ‘미래 컴퓨터 복사/출력’


가게 안은 이미 전쟁터였다. 기말 과제 제출을 앞둔 학생들이 좁은 가게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디스켓을 흔들며 아우성이었다.


“아저씨! 저부터요! 5시 마감이라니까요!”

“잠깐만요, 이 학생 거 먼저 하고!”


구석에 있는 구형 도트 프린터가 전산 자료를 뽑느라 “찌익— 찌익— 찌이익!” 하는 비명 같은 소리를 냈고,

메인 자리의 레이저 프린터는 “위이잉—” 하는 팬 소리와 함께 쉴 새 없이 뜨끈한 종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가게 안의 공기는 종이 냄새와 땀 냄새와 토너 냄새가 섞여, 한 번 맡으면 오래 남는 종류가 되었다.


“줄 서, 줄!”


희수는 긴 줄의 맨 끝에 섰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혹시 땀 때문에 디스켓이 미끄러질까 봐 희수는

옷자락에 손을 닦고, 디스켓의 은색 셔터를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짤깍, 탁. 짤깍, 탁.’


동현이가 옆에서 낄낄거렸다.


“야, 셔터 그만 만져. 그러다 스프링 나간다.”

“조용히 해. 지금 내 목숨줄이다.”

“목숨줄이 1.44MB냐?”

“지금은 그게 우주야.”


줄은 생각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앞사람은 파일이 열렸는데 글꼴이 바뀌었고, 그 뒤사람은 표가 무너졌고,

다른 누군가는 갑자기 파일명이 사라졌다고 했다.


희수는 그 모든 비극을 가까이서 목격하며, 자기 차례가 오기 전에 이미 반쯤 지쳐갔다.


드디어 희수의 차례가 왔다.

희수는 주인아저씨에게 디스켓을 건넸다.


“아저씨, hwp 파일이고요. 레이저로 뽑아주세요.

깨끗하게 나와야 돼요.”


아저씨는 무심한 표정으로 희수의 파란색 디스켓을 컴퓨터 본체에 찔러 넣었다.


“철컥.”


희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수많은 학생들의 손을 거친 공용 컴퓨터.

과연 내 디스켓을 제대로 읽어줄 것인가.


“끼릭….”


순간, 드라이브에서 긁히는 소리가 났다.

희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 아저씨, 소리가 왜….”

“아, 기다려봐. 읽고 있잖아.”


아저씨가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화면에 모래시계가 돌았다.

희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파일을 읽는 중입니다…]


모래시계가 한 바퀴 도는 동안, 희수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일주일이 되감기처럼 돌아갔다.


밤샘, 커피, 문헌, 각주, 결론, 그리고 마지막 저장.

그 모든 게 1.44MB 안에서 간신히 서로를 떠받치고 있었다.

잠시 후, 화면에 익숙한 리포트 첫 페이지가 떴다.


“휴우….”


희수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곧이어 레이저 프린터에서 “위잉, 척. 위잉, 척.”

하는 소리와 함께 따끈따끈한 A4 용지가 출력되어 나왔다.

잉크 냄새가 아니라, 레이저 토너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확 풍겼다.


아저씨가 디스켓을 뽑아 카운터 위로 ‘탁’ 던져주었다.


“자, 여기 있다.”


희수는 급히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레이저 프린터에서 막 나온 A4는 아직 따끈했고,

손바닥에 온기가 그대로 남았다.


반대로 디스켓은 차가웠다.


뜨거운 종이와 차가운 플라스틱을 동시에 쥐고 있으니,

방금 전까지의 공포가 손끝에서만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희수는 서둘러 결제를 마쳤다.

동전이 카운터 위에서 짤랑거리며 굴렀고,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끝났다’는 도장을 찍어주는 것 같았다.


그제야 희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게 밖으로 빠져나오자, 눅눅한 토너 냄새와

사람들 목소리가 등 뒤로 밀려났다.

마감 직전의 전쟁터에서 살아 나온 사람처럼,

희수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과제 제출 하고 나오는 희수는 아주 여유로운 모습이다.


동현이가 어깨동무를 했다.

“야, A+ 확정이네. 기념으로 '하드볼' 한 게임?”

“콜. 내가 너 그냥 이기지.”

“방금까지 목숨줄이라더니, 출력되니까 바로 인생의 여유냐?”


희수는 셔츠 앞주머니에 디스켓을 다시 집어넣었다.

딱딱한 네모난 플라스틱이 가슴팍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마치 “나 아직 살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집에 프린터 따위는 없던 시절.


1.44메가바이트의 이 작은 사각형은,

출력소 아저씨의 손을 거쳐야만 비로소

‘학점’으로 변환될 수 있는,

1995년 대학생들의 가장 불안하고도

소중한 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