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전시물 : 전국 도로 지도책

우리 가족은 시트콤 (세 친구 아닌 세 가족)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90년대 마이카 여행의 3요소

운전자(아빠):

“나만 믿어”라며 큰소리치지만, 정작 표지판은 잘 못 보는 미스터리한 자신감.

내비게이션(엄마 & 지도책):

무겁고 자꾸 덮이는 지도책과 사투를 벌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어머!”를 외침.

관객(자녀):

뒷좌석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과자를 먹거나 자는 척해야 함.



1995년 여름, 웃음과 환장의 44번 국도


1995년 8월, 강원도로 향하는 은색 ‘쏘나타 II’.
차 안에는 당시 유행하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신나게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희수네 가족의 상황은 노래 제목처럼 이미 천천히 꼬여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는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멋을 부렸다.
선글라스가 멋을 담당한다면, 표지판은… 옆자리 인간 내비게이션이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쪽이었다.

“여보, 걱정하지 말라고. 내 머릿속에 나침반이 딱! 박혀 있다니까? 바다 냄새가 난다, 나! 킁킁!”

조수석의 어머니는 무릎 위에 벽돌만 한 [전국 도로 안내] 책자를 올려두고 있었다.
하지만 떡제본으로 된 이 두꺼운 책은 펼치기만 하면 탄성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 입을 다물었다.

‘탁!’

“아우, 깜짝이야! 이 책은 왜 자꾸 덮이고 난리야?”

어머니는 지도책을 다시 쫙 펴서 배에 힘을 주고 눌렀다. 그래도 자꾸 튀어 오르자, 신고 있던 슬리퍼 한 짝을 벗어 책 귀퉁이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그 순간 지도책은 드디어 순해졌다.
가끔 세상은 논리보다 슬리퍼로 해결될 때가 있었다.

“여보, 지금 ‘홍천’ 지났으니까 빨간 선 따라 쭉 가는 거 맞지?”
“그럼~ 아빠만 믿어라, 희수야! 우리가 누구냐? 환장의 팀워크, 세 가족 아니냐!”

아버지는 어깨춤까지 추며 액셀을 밟았다.
뒷좌석의 희수는 과자를 씹으며 생각했다. ‘세 가족이 아니라 세… 사고인가?’

그런데 30분 뒤, 창밖 풍경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매끈했던 아스팔트는 사라지고, 덜컹거리는 비포장 흙길이 나타났다.

양옆에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소금 냄새가 난다더니, 여기서는 소가 먼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보… 근데 바다 냄새라며? 왜 자꾸 소똥 냄새가 나지?”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바다의 짠내와 흙내음이 섞인… 퓨전의 향기지!”

아버지는 끝까지 우겼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쏘나타 앞을 막아선 건 푸른 파도가 아니라 커다란 황소 한 마리였다.

“음메——”

차는 막다른 논두렁길에 멈춰 섰다.
정적이 흐르는 차 안.
뒷좌석에서 과자를 먹던 희수가 툭 던졌다.

“아빠, 여기가 해수욕장이야? 소 타고 파도 타?”

아버지가 아무 말도 못 하고 핸들만 꾹 잡는 사이, 어머니가 지도책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슬리퍼를 치우고 눈을 비비며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했다.

“어머! 어머머! 여보!”
“왜! 지도에 소 축사라고 나와 있어?”
“아니… 내가 책을 거꾸로 놓고 보고 있었네? 호호호!”

어머니는 지도책을 180도 휙 돌렸다.
남쪽으로 내려가야 할 차가 북쪽 산골짜기로 기어올라 온 것이었다.
길을 잃은 건 자동차가 아니라, 지도책이 먼저 방향감각을 잃었던 셈이다.

“아이고! 어쩐지 산이 자꾸 높아지더라니! 당신, 지도를 거꾸로 보면 어떡해!”

아버지는 핸들에 이마를 콩 박았다.
보통 같으면 싸움이 났을 텐데,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인지 아버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거참, 당신이나 나나 도찐개찐이다! 야, 희수야. 내려 봐라! 여기 공기는 기가 막히다!”

“학교 가서 애들한테 자랑해라. 우리 가족은 남들이 절대 못 찾는 ‘숨겨진 명소’만 골라 다닌다고.”
“네, 네. 아주 콜럼버스 나셨네요. 근데 대학생이 엄마 아빠랑 여행 다닌다 하면 웃을지도 몰라요. 하하하”

희수는 옥수수밭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서야, 어머니는 지도책을 제대로 펼쳤다.
이번엔 슬리퍼가 아니라, 두 손으로 단단히 눌러 잡고—책등이 튀어 오를 틈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도 선글라스를 잠깐 내려 코끝에 걸치고, 표지판을 “진짜로” 보기 시작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버지는 그제야 표지판의 글씨가 보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보. 여기서 다시 큰길로만 붙으면 돼. 아까 우리가 빠진 게… 이 조그만 농로였네.”
“그래. 인정. 내가 잠깐… 바다 냄새에 취했어.”

아버지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황소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길을 비켜주었고,

소나타는 덜컹거리며 다시 큰길을 찾아 나섰다.
뒤로는 옥수수밭이, 앞으로는 44번 국도가 길게 이어졌다.

차 안의 음악이 바뀌었다. 라디오에서는 느린 발라드가 흘러나왔고, 희수는 뒷좌석에서 창문에 이마를 대고 졸 듯 말 듯 흔들렸다.
길을 잃었다가 다시 찾는 리듬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
정확한 길이 아니라, 결국 도착한다는 확신이 마음을 풀어주기 때문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드디어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은 생각보다 조용했고, 파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아버지는 “어때, 내가 뭐랬어”라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고, 어머니는 지도책을 덮으며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도착은 했네. 당신 덕분인지, 내 덕분인지, 슬리퍼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우리 덕분이지. 환상의 팀워크, 세 가족!”

희수는 창밖 바다를 보며 작게 웃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보다 더 또렷한 건, 길을 잃던 순간에도 차 안이 계속 떠들썩했다는 것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없어도, 지도책이 자꾸 덮여도, 표지판을 놓쳐도—이 가족은 늘 어떤 방식으로든 웃으며 다시 길을 찾았다.

대시보드 위에는 두꺼운 지도책이 이번엔 얌전히 놓여 있었다.
길은 잃었지만, 길을 되찾는 방법도 배웠다.
1995년의 여름휴가는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야 비로소 한 편의 시트콤으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