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전시물: 다이어리 주소록

빈방을 채우는 엄마의 펜글씨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1996년의 인맥 관리

시스템 다이어리 (System Diary):

90년대 중반, 대학생과 직장인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바인더형 수첩. 가죽 커버를 열고 "투둑" 하며 6개의 금속 링을 여는 소리는 체계적인 삶의 상징이었다.

지번 주소와 우편번호:

도로명 주소가 없던 시절, 'OO동 산 24-1번지 3통 5반' 식의 복잡한 지번 주소를 외워야 했고, 우편번호부 책자를 뒤적여 빨간 칸 안에 6자리 숫자를 채워 넣었다.

가정의 외교 장부:

주소록은 단순 연락처가 아니었다. **"누가 우리 집 잔치에 얼마를 냈나", "누가 명절에 선물을 보냈나"**를 기록하는,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핵심 데이터베이스였다.

군대 사서함:

군 복무 중인 군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보안상 실제 부대 위치 대신 **'우체국 사서함 O호'**라는 고유 주소를 사용해야 했다.


1996년 1월, 아들이 떠난 자리


1996년 1월의 늦은 오후. 거실에는 괘종시계 밥 주는 소리만 '똑, 딱' 하고 울렸다. 시끄럽게 굴던 녀석이 없으니 집이 절간 같았다. 유희수가 입대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엄마 영숙은 희수의 방문을 열어보다가,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져 거실 교자상 앞에 앉았다. 일이라도 해야 잡생각이 안 들 것 같았다.

영숙은 서랍에서 진갈색 시스템 다이어리를 꺼냈다. 희수가 입대하기 전에 "엄마, 이거 쓰세요. 요즘은 다 이런 거 써요"라며 사 주고 간 것이었다.

"비싼 거라 가죽도 좋네..."

영숙은 다이어리를 쓰다듬다가 금속 레버를 눌렀다.

‘투둑.’

경쾌한 소리와 함께 6개의 링이 입을 벌렸다. 영숙은 문방구에서 사 온 빳빳한 [Tel & Address] 리필 속지 뭉치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옛날 수첩을 옆에 폈다.


[마음을 다잡는 옮겨 적기]


영숙은 검은색 모나미 볼펜을 들고, 정성스럽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ㅇ(이응)' 탭. 영숙은 시댁 식구들부터 챙겼다. 좁은 칸에 맞춰 깨알같이 정보를 채워 넣었다.

이름: 유인철 (시동생) 전화: 02-XXX-XXXX

주소: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산 24-1번지


영숙은 꼬불꼬불한 지번 주소를 또박또박 적었다. 주소를 적다 보니 문득,


강원도 최전방 양구 골짜기에 있을 아들 생각이 났다.


'거긴 눈이 더 많이 온다던데...'


영숙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다시 펜을 잡았다.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Memo/비고] 란이었다.

영숙은 옛날 수첩 귀퉁이에 적힌 메모를 빠짐없이 옮겼다.


Memo: 95년 아들 대학 입학식 때 20만 원 용돈 쾌척함. (기억해 둘 것)

이 다이어리는 단순한 전화번호부가 아니었다.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며 쌓아온 영숙의 '인생 성적표'이자,

갚아야 할 빚과 받아야 할 마음이 적힌 '가계부'였다.


그때, 안방에서 TV를 보던 희수 아빠가 나왔다.

그 역시 아들이 없으니 영 의욕이 없어 보였다.


"여보... 뭐 해?"

"주소록 정리해요. 당신도 거기 멍하니 있지 말고 귤이나 좀 까먹어요."


남편은 머쓱한지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물었다.


"그... '박 사장' 전화번호 좀 찾아줘. 내일 등산이나 가자고 하게."


영숙은 펜을 놓고 'ㅂ(비읍)' 탭을 넘겼다.


"어느 박 사장요? '자재과 박 사장'? 아니면 '대성상사 박 사장'?"

"그, 저번에 우리 희수 군대 갈 때 용돈 쥐어준 친구 있잖아. '대성상사'."


영숙은 손가락으로 주소록을 훑어 내려갔다.

박대성(대성상사) / 02-XXX-XXXX

이름 옆 비고란을 확인한 영숙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 이 분이네. 여기 적어놨어요. [95년 12월 희수 입대 때 용돈 5만 원 줌.]"

"그래? 거참, 고마운 친구네."

"그러게요. 이 분하고는 잘 지내요. 나중에 경조사 있으면 우리가 더 크게 챙겨야 하니까."


영숙은 남편에게 번호를 불러주고 다시 다이어리에 코를 박았다.

수백 명의 이름. 그 옆에 적힌 깨알 같은 숫자와 메모들.

이것들은 영숙이 억척스럽게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아들이 사회에 나와서 기댈 언덕이 되어줄지도 모를 소중한 자산들.


주소록 정리가 거의 끝날 무렵, 영숙은 맨 앞장을 폈다.

가나다순이 아닌, 가장 잘 보이는 첫 페이지.


영숙은 숨을 고르고, 가장 정성스러운 글씨체로 적어 내려갔다.


[우편번호 OOO-XXX] [강원도 양구군 남면 사서함 O호...] [훈련병 유희수]


"......"


주소를 다 적은 영숙은 손으로 그 글씨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종이의 질감이 거칠었다.


'탁.'


영숙은 다이어리를 덮었다. 두툼해진 가죽 수첩이 묵직했다.

아들은 떠났지만, 엄마의 다이어리 속에는 아들이 돌아올 곳과,

아들을 위해 챙겨야 할 사람들의 목록이 단단하게 채워져 있었다.


1996년 1월의 겨울.

영숙은 그렇게 빈방의 허전함을 펜글씨로 꾹꾹 눌러 채우고 있었다.


얼마 후 있을 신병 교육대 퇴소식 방문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