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전시물: 45돈 황금 열쇠

난세의 영웅(?)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1998년 금 모으기 운동

​방송의 힘:

TV 뉴스에서는 연일 금을 내놓는 시민들을 '애국자'로 치켜세웠습니다. 아저씨들은 "나도 저 역사적 현장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으로 장롱 깊숙한 곳의 금붙이를 꺼냈습니다.​

기록의 욕구: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집안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장롱 위의 '자동카메라(일명 똑딱이)'가 필수품으로 등장했습니다.



1998년 1월, 우리 아버지는 무비 스타


​1998년 1월.

말년 휴가를 나온 병장 유희수는 무릎 나온 회색 츄리닝 차림으로

거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아, 심심해..."


​IMF고 뭐고, 당장 할 일이 없어 하품만 쩍쩍하고 있는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희수 아빠가 등장했다. 그런데 복장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잘 입지도 않는 더블 버튼 양복에, 머리에는 포마드를 잔뜩 발라

2:8 가르마를 칼같이 탔다.


목에는 비장한 붉은색 넥타이까지. 마치 대선 출마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희수야! 일어나라! 작전 개시한다!"

"네? 아버지 어디 가세요?"

"어디긴! 나라 구하러 간다! 너도 빨리 옷 입어. 츄리닝 말고 좀 멀쩡한 거 없냐?"


​아버지는 거실 테이블 위에 붉은 벨벳 상자 세 개를 '척, 척, 척' 내려놓았다.


​"이야..."


​희수는 상자를 열어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번쩍!


10년, 15년, 20년 근속 황금 열쇠 세 개. 도합 45돈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 이거 진짜 다 내시게요? 45돈이면 이거..."

"시끄러워.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금덩이가 무슨 소용이야. 이게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거다."


​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고쳐 맸다.

하지만 입꼬리는 씰룩거리고 있었다.

희수는 그 모습이 왠지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비장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와, 우리 아빠 오늘 좀 멋있는데?

엄마! 카메라! 우리 집 카메라 어딨어?"


​희수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카메라는 갑자기 왜?"

"아니 아빠 봐봐. 오늘 완전 영화배우야.

그리고 45돈 기부하는데 증거 사진이라도 남겨야지!"


​희수의 호들갑에 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에이, 녀석 참. 유난 떨지 마라.

남자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거실 벽에 걸린

족자(가화만사성) 앞으로 가서 포즈를 잡고 있었다.

벨벳 상자를 가슴 높이로 딱 들고.


​"희수야, 여기 조명이 좀 어둡지 않냐?"

"아니에요. 딱 좋아요. 자, 찍습니다! 김치~"


​'찰칵- 징~'


자동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근엄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행 앞, 금 모으기 행사장]


​은행 앞은 인산인해였다.

아버지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야, 희수야. 저기 봐라. 방송국 카메라 왔다!"


​진짜로 뉴스 기자가 사람들을 찍고 있었다.

아버지는 희수의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


​"희수야, 지금 찍어. 지금! 저 방송국 카메라랑 내가 한 앵글에 나오게!"


​희수는 킬킬대며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알았어요. 아빠, 좀 더 왼쪽으로! 자연스럽게 걸어가요!"


​드디어 접수대 앞.

아버지는 감정위원 앞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상자를 열었다.


​'탁!'

​"여기! 제 20년동안 근속 열쇠 45돈입니다!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은행 안의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감정위원이 "아, 네... 대단하시네요" 하며 놀라자,

아버지는 은근슬쩍 방송국 카메라 쪽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방송국 카메라는 옆에 있는 '고사리손으로 돼지 저금통 털어온 유치원생'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애기 코 묻은 돈은 찍어가고,

내 45돈은 왜 안 찍어? PD 양반이 보는 눈이 없네."


​접수를 마치고 나온 아버지는 입이 댓 발 나왔다.

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인터뷰를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희수는 그런 아버지가 귀여워서 어깨동무를 했다.


​"에이, 아버지. 방송국 놈들이 뭘 알겠어요. 대신 제가 다 찍어놨잖아요. 나중에 사진관 가서 현상하면 아부지가 메인이야."

"진짜냐? 아까 족자 앞에서 찍은 거 잘 나왔겠지?"

"그럼요. 완전 홍콩 배우 주윤발 같던데?"


​그제야 아버지는 씩 웃으며 2:8 가르마를 쓸어 넘겼다.


​"그렇지? 짜식... 아빠가 왕년에 한 인물 했다.

가자! 기분이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




​은행 앞 거리는 여전히 금붙이를 들고 줄을 선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아버지는 빈손이 된 벨벳 상자 세 개를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었다.


​"아버지, 그 상자는 기념으로라도 가져가지 그랬어."

"껍데기가 무슨 소용이냐. 알맹이는 이미 나라에 심었는데."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 연기 사이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돌반지를 쥔 새댁, 십자가 목걸이를 푼 할머니,

묵직한 행운의 열쇠를 든 넥타이 부대들.

​모두가 무언가를 잃으러 온 사람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눈빛은 패배자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이 나라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독기 서린 희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희수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희수야."

"응?."

"아빠가 20년 동안 회사 다니면서 모은 금 열쇠...

그게 사실은 ''을 여는 열쇠였다."

"문?"

"그래. 우리 가족 밥 먹여 살리고, 너 대학 보내는 문을 여는 열쇠였지."


​아버지는 희수의 낡은 츄리닝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근데 오늘 그 열쇠를 다 반납했다. 왜인 줄 아냐?"

"......"

"이제는 그 열쇠로 '닫힌 대한민국의 문'을 따야 하니까.

그래야 네가 다시 취직도 하고, 장가도 가고,

사람 구실 하며 살 거 아니냐."


​희수는 코끝이 찡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45돈의 황금을 버린 게 아니었다.

아들의 꽉 막힌 미래를 뚫기 위해, 당신의 과거를

가장 비싼 값에 투자한 것이었다.


​"가자! 너 사진 잘 찍어놨지? 그게 나중에 우리 집 가보(家寶)다."

"아부지. 진짜 멋있었어."


​두 부자가 걷는 등 뒤로, 금 모으기 행사장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해 겨울.

전 국민이 모은 227톤의 금은 용광로 속에서 뜨겁게 녹아 사라졌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똘똘 뭉쳤던 그 뜨거운 마음만큼은 결코 녹지 않는 단단한 합금(合金)이 되어, 쓰러져가던 대한민국의 척추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45돈의 황금 열쇠는 사라졌지만,

그날 아버지가 보여준 '가장의 등'은 희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녹슬지 않는 진짜 황금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