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영웅(?)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
방송의 힘:
TV 뉴스에서는 연일 금을 내놓는 시민들을 '애국자'로 치켜세웠습니다. 아저씨들은 "나도 저 역사적 현장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으로 장롱 깊숙한 곳의 금붙이를 꺼냈습니다.
기록의 욕구: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집안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장롱 위의 '자동카메라(일명 똑딱이)'가 필수품으로 등장했습니다.
1998년 1월.
말년 휴가를 나온 병장 유희수는 무릎 나온 회색 츄리닝 차림으로
거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아, 심심해..."
IMF고 뭐고, 당장 할 일이 없어 하품만 쩍쩍하고 있는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희수 아빠가 등장했다. 그런데 복장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잘 입지도 않는 더블 버튼 양복에, 머리에는 포마드를 잔뜩 발라
2:8 가르마를 칼같이 탔다.
목에는 비장한 붉은색 넥타이까지. 마치 대선 출마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희수야! 일어나라! 작전 개시한다!"
"네? 아버지 어디 가세요?"
"어디긴! 나라 구하러 간다! 너도 빨리 옷 입어. 츄리닝 말고 좀 멀쩡한 거 없냐?"
아버지는 거실 테이블 위에 붉은 벨벳 상자 세 개를 '척, 척, 척' 내려놓았다.
"이야..."
희수는 상자를 열어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번쩍!
10년, 15년, 20년 근속 황금 열쇠 세 개. 도합 45돈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 이거 진짜 다 내시게요? 45돈이면 이거..."
"시끄러워.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금덩이가 무슨 소용이야. 이게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거다."
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고쳐 맸다.
하지만 입꼬리는 씰룩거리고 있었다.
희수는 그 모습이 왠지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비장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와, 우리 아빠 오늘 좀 멋있는데?
엄마! 카메라! 우리 집 카메라 어딨어?"
희수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카메라는 갑자기 왜?"
"아니 아빠 봐봐. 오늘 완전 영화배우야.
그리고 45돈 기부하는데 증거 사진이라도 남겨야지!"
희수의 호들갑에 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에이, 녀석 참. 유난 떨지 마라.
남자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거실 벽에 걸린
족자(가화만사성) 앞으로 가서 포즈를 잡고 있었다.
벨벳 상자를 가슴 높이로 딱 들고.
"희수야, 여기 조명이 좀 어둡지 않냐?"
"아니에요. 딱 좋아요. 자, 찍습니다! 김치~"
'찰칵- 징~'
자동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근엄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행 앞은 인산인해였다.
아버지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야, 희수야. 저기 봐라. 방송국 카메라 왔다!"
진짜로 뉴스 기자가 사람들을 찍고 있었다.
아버지는 희수의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
"희수야, 지금 찍어. 지금! 저 방송국 카메라랑 내가 한 앵글에 나오게!"
희수는 킬킬대며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알았어요. 아빠, 좀 더 왼쪽으로! 자연스럽게 걸어가요!"
드디어 접수대 앞.
아버지는 감정위원 앞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상자를 열었다.
'탁!'
"여기! 제 20년동안 근속 열쇠 45돈입니다!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은행 안의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감정위원이 "아, 네... 대단하시네요" 하며 놀라자,
아버지는 은근슬쩍 방송국 카메라 쪽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방송국 카메라는 옆에 있는 '고사리손으로 돼지 저금통 털어온 유치원생'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애기 코 묻은 돈은 찍어가고,
내 45돈은 왜 안 찍어? PD 양반이 보는 눈이 없네."
접수를 마치고 나온 아버지는 입이 댓 발 나왔다.
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인터뷰를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희수는 그런 아버지가 귀여워서 어깨동무를 했다.
"에이, 아버지. 방송국 놈들이 뭘 알겠어요. 대신 제가 다 찍어놨잖아요. 나중에 사진관 가서 현상하면 아부지가 메인이야."
"진짜냐? 아까 족자 앞에서 찍은 거 잘 나왔겠지?"
"그럼요. 완전 홍콩 배우 주윤발 같던데?"
그제야 아버지는 씩 웃으며 2:8 가르마를 쓸어 넘겼다.
"그렇지? 짜식... 아빠가 왕년에 한 인물 했다.
가자! 기분이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
은행 앞 거리는 여전히 금붙이를 들고 줄을 선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아버지는 빈손이 된 벨벳 상자 세 개를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었다.
"아버지, 그 상자는 기념으로라도 가져가지 그랬어."
"껍데기가 무슨 소용이냐. 알맹이는 이미 나라에 심었는데."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 연기 사이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돌반지를 쥔 새댁, 십자가 목걸이를 푼 할머니,
묵직한 행운의 열쇠를 든 넥타이 부대들.
모두가 무언가를 잃으러 온 사람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눈빛은 패배자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이 나라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독기 서린 희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희수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희수야."
"응?."
"아빠가 20년 동안 회사 다니면서 모은 금 열쇠...
그게 사실은 '문'을 여는 열쇠였다."
"문?"
"그래. 우리 가족 밥 먹여 살리고, 너 대학 보내는 문을 여는 열쇠였지."
아버지는 희수의 낡은 츄리닝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근데 오늘 그 열쇠를 다 반납했다. 왜인 줄 아냐?"
"......"
"이제는 그 열쇠로 '닫힌 대한민국의 문'을 따야 하니까.
그래야 네가 다시 취직도 하고, 장가도 가고,
사람 구실 하며 살 거 아니냐."
희수는 코끝이 찡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45돈의 황금을 버린 게 아니었다.
아들의 꽉 막힌 미래를 뚫기 위해, 당신의 과거를
가장 비싼 값에 투자한 것이었다.
"가자! 너 사진 잘 찍어놨지? 그게 나중에 우리 집 가보(家寶)다."
"아부지. 진짜 멋있었어."
두 부자가 걷는 등 뒤로, 금 모으기 행사장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해 겨울.
전 국민이 모은 227톤의 금은 용광로 속에서 뜨겁게 녹아 사라졌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똘똘 뭉쳤던 그 뜨거운 마음만큼은 결코 녹지 않는 단단한 합금(合金)이 되어, 쓰러져가던 대한민국의 척추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45돈의 황금 열쇠는 사라졌지만,
그날 아버지가 보여준 '가장의 등'은 희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녹슬지 않는 진짜 황금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