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전시물: 전자사전

20만 원짜리 벽돌과 동갑내기 여친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1998년의 캠퍼스와 전자사전

1. 부의 상징, 전자사전 (Sharp vs Casio)
가격의 압박: 당시 전자사전 가격은 20~30만 원대였습니다. 당시 짜장면이 2,000원~2,500원 하던 시절이니, 짜장면 100그릇 값이 넘는 고가품이었습니다. 대학생 한 달 하숙비와 맞먹는 금액이라, 희수처럼 큰맘 먹고 사야 했습니다.
브랜드: 당시엔 샤프(Sharp) 리얼딕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이후 카시오(Casio), 아이리버(딕플) 등이 경쟁했지만, 90년대 말은 '전자사전 = 샤프'라는 공식이 있었죠.
2. 흑백 액정과 백라이트의 부재

어둠 속의 눈물: 초기 모델들은 백라이트(화면 조명) 기능이 없어서, 밤에 이불 뒤집어쓰고 몰래 하려면 플래시가 필요했습니다.
느린 반응속도: 액정 잔상이 심해서 타자를 빨리 치면 글자가 늦게 따라오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성격 급한 한국 사람들은 속 터지기 일쑤였죠.

1998년 대학 캠퍼스. 아버지의 45돈 황금 열쇠가 나라를 위해 사라진 뒤, 희수는 가슴 한구석에 뚫린 구멍을 메우려 큰 사고를 쳤다. 아르바이트비를 탈탈 털어 당시 대학생들의 로망이자 신문물, 최신형 전자사전을 지른 것이다.


"이게 바로 21세기 디지털이지."


도서관 휴게실. 희수는 묵직한 은색 전자사전을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히 융으로 닦고 있었다. 복학생 티를 벗고, '앞서가는 지성인'으로 보이고 싶은 허세가 8할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희수의 투박한 솥뚜껑 손으로 좁쌀만 한 쿼티 자판을 누르는 건, 곰발바닥으로 바느질하는 것만큼 고역이었다. 게다가 화면은 왜 이렇게 어두운지, 조금만 각도가 틀어져도 글씨가 안 보였다.



열람실. 희수는 호기롭게 전자사전을 폈다. 옆자리에는 동갑내기 여친 강예진이 취업 준비 서적을 보고 있었다. 희수는 여친 앞에서 스마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 자연스럽게... Vocabulary를 검색해 볼까.'

'V... (어딨어? 아 여기) 꾹.' 삐익-

조용한 열람실에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렸다. 예진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희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눈짓했다.


'미안, 미안. 소리가 좀 크네. 줄여야지.'

'F2... 꾹.' 삐익-

누를 때마다 "나 여기 있소!" 광고를 해댔다.


주변 시선이 집중되자 희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당황해서 전원을 끄려는데, 굵은 손가락이 버튼 두 개를 동시에 눌러버렸다. 하필이면 [TTS 음성 발음] 버튼이었다.


"V-O-C-A-B-U-L-A-R-Y!"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

"......" "......"


정적. 그리고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킥킥거리는 소리. 희수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때, 옆에서 '짝!' 하는 소리가 났다. 예진이 희수의 등짝을 찰지게 때린 것이다.


"야! 유희수! 너 진짜 뭐 하냐?"


예진은 희수의 손에서 전자사전을 홱 낚아채서 가방에 쑤셔 박고, 희수의 뒷덜미를 잡아 휴게실로 끌고 나갔다.




휴게실 자판기 앞. 예진은 벤치에 앉아 희수의 전자사전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하고 있었다.


"야, 너는 무슨 설명서도 안 읽어보고 가져오냐? 여기 [환경설정] 들어가서 [키음 OFF] 누르면 되잖아.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아니... 그게 버튼이 너무 깨알 같아서..." "그리고 타자는 왜 독수리야? 너 군대 행정반 나왔다며."


예진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날아다니듯 가벼웠다.

타다닥. 탁.


"자, 봐봐. 이거 [점프] 기능이야. 단어 뜻 보다가 모르는 거 나오면 바로 넘어가는 거. 너처럼 미련하게 종이 사전 10페이지씩 안 넘겨도 된다고." "오... 대박. 역시 강예진 똑똑하네."


희수가 헤벌쭉 웃으며 칭찬하자, 예진이 피식 웃으며 사전을 내밀었다.


"칭찬해도 소용없어. 이거 20만 원 넘지? 아르바이트비 다 털었지? 폼으로만 들고 다니지 말고 공부 좀 해라. 우리도 이제 취준 해야지." "걱정 마! 내가 이 전자사전으로 토익 만점 받아서, 너 맛있는 거 사준다."


희수는 자신만만하게 사전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예진은 알고 있었다. 이 단순한 녀석이 이 비싼 기계를 어떻게 쓸지를.




일주일 뒤. 희수의 전자사전 활용 능력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단, 예진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게임 기능 따윈 없는 1998년의 투박한 기계였기에, 희수는 엉뚱한 기능들에 집착했다.


기능 1: 공부하기 싫을 때 [세계 시각] 기능 켜놓고 '지금 파리는 새벽 3시네...' 하며 멍 때리기.
기능 2: 데이트할 때 밥값 10원 단위까지 나누는 '20만 원짜리 계산기'.
기능 3 (가장 중요): 도서관 비밀 쪽지.


어느 날 도서관. 예진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희수는 예진의 자리에 놓인 자신의 전자사전을 몰래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돌아온 예진이 자리에 앉자, 희수가 턱으로 사전을 가리켰다. 예진이 전자사전을 켜자, 검색창이 아닌 [전화번호부/메모] 기능이 켜져 있었다.


[To. 강예진] 타자 치기 힘들어서 10분 걸렸다. 공부 끝나고 떡볶이 콜? 내가 쏠게. 사랑한다.


투박한 띄어쓰기와 오타가 섞인 짧은 메모. (당시엔 한글 입력도 꽤 번거로웠다.) 하지만 그 한 줄을 쓰기 위해 굵은 손가락으로 끙끙댔을 희수를 생각하니, 예진의 입가에 픽 하고 웃음이 터졌다.

예진은 곁눈질로 희수를 흘겨보며 답장을 쳤다.


타다닥.


[Re: 유희수] 오타나 고쳐, 바보야. 떡볶이에 순대 추가하면 봐줌.



희수는 전자사전을 돌려받고 킬킬대며 웃었다. 비록 아버지의 황금 열쇠만큼 묵직한 맛은 없었지만, 이 차가운 은색 벽돌 안에는 이제 희수와 예진만의 티격태격하는 온기가 채워지고 있었다.


영어 단어보다 사랑의 단어를 더 많이 검색하고 저장했던 1998년의 가을. 복학생 희수의 전자사전은, 토익 점수 대신 두 사람만의 '비밀 메신저'가 되어가고 있었다.


'탁.'


희수는 사전을 덮고 예진의 손을 툭 쳤다. 가을 햇살이 도서관 창가로 따스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앱 하나면 단어 검색은 물론, 원어민 같은 정확한 발음까지 해결되는 세상이다. 그 시절 우리가 보물처럼 여겼던 전자사전은 이제 서랍 속 깊은 곳, 혹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1998년의 가을.
그 투박하고 무거운 은색 벽돌은, 비록 사용법은 서툴렀을지언정 남들보다 한발 앞서 미래를 만지고 싶었던 '얼리어답터 유희수'의 면모를 보여주기엔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이었다.


​비록 그 안엔 영어 단어보다 풋풋한 사랑의 쪽지가 더 많이 쌓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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