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전시물: OHP 프로젝터와 투명필름

너무 뜨거웠던 20세기의 마지막 열정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그 시절의 프레젠테이션

​OHP의 열기:
장시간 켜두면 상판 유리가 다리미처럼 뜨거워져서, 싸구려 수성펜 잉크는 열기에 녹아 흐르거나
증발해버리곤 했다.

​정전기:
레이저 인쇄된 필름은 정전기가 심해 서로 딱 달라붙는 게 다반사였다.



​학교 정문 앞, '미래복사'.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매캐한 토너 냄새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복사기의 소음, 그리고 종이 먼지가 희수를 반겼다.

1998년 이곳은 전쟁터의 보급기지이자 성지였다.
​희수는 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며칠간 점심을 굶어가며 아껴온 지폐였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최고급 필름에 레이저로 부탁드려요.

농도 제일 진하게요. 저 이거 망치면 취업도 끝장입니다."


"아이고, 유 학생 왔어? 걱정 붙들어 매. 우리 집 기계가 어제 드럼을 새로 갈아서 아주 쨍하게 나와. 자네 미래처럼 아주 훤할 거야."
​복사집 이모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갓 출력된 따끈따끈한 투명필름(OHP 필름) 뭉치를 건넸다. 희수는 필름을 형광등 불빛에 비춰보았다.


[IMF 시대의 틈새시장 공략: 20대 소비 패턴의 변화]
검은색 텍스트와 도표가 마치 칼로 오려낸 듯 선명했다.

레이저 프린터 특유의 반질반질한 광택은 잉크젯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공의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희수의 작업은 이제 시작이었다.


가난한 복학생에게 장당 몇천 원을 호가하는 '컬러 레이저 출력'은 언감생심이었다.

희수는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가방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문구점에서 가장 비싼 '독일제 전문가용 OHP 마커' 빨간색, 그리고 30cm 철자였다.


​희수는 숨을 멈췄다. 흑백으로 인쇄된 x축과 y축 위에, 가장 중요한 '향후 성장 예측 그래프'를 그려 넣어야 했다.


'스으윽-'


펜 끝이 미끄러운 필름 위를 달릴 때마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외과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신중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2만 원이 날아간다.

다행히 그래프는 자를 댄 듯 완벽한 45도 우상향 직선으로 그려졌다.


​검은색 레이저의 차가운 이성과, 붉은색 마커의 뜨거운 감성이 결합된 순간.
희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필름을 파일에 끼워 넣었다.


​"완벽해.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어."



​발표 당일. 전공 필수 강의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교수님은 깐깐하기로 소문난 '학점 킬러' 박 교수였다.

강의실 구석에는 앞서 발표를 망친 조원들이 박 교수의 독설을 견디지 못하고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다음. 유희수 학생."


​희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강단으로 걸어 나갔다.

아버지의 장롱에서 몰래 꺼내 입고 온 더블 버튼 양복이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지만,

거울을 보고 연습한 덕분에 핏(Fit)은 제법 그럴싸했다.


​강단 한가운데에는 오늘의 파트너이자 적군, 거대한 회색 몸체의 OHP 프로젝터가 웅크리고 있었다.

희수가 전원 스위치를 '탁' 올렸다.


​'터엉- 위이이잉!'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는 듯한 거대한 팬 소음이 강의실을 메웠다. 렌즈를 통해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희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첫 번째 필름을 유리판 위에 올렸다.
​스크린에 '미래복사'표 선명한 폰트가 꽉 찼다.
희수는 지시봉을 잡고 청중을 향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남자, 유희수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21세기의 새로운 생존 전략을 제안하려 합니다."


​오프닝은 훌륭했다. 동기들의 눈빛에 '오~' 하는 감탄이 서렸다.

희수는 물 흐르듯 발표를 이어갔다.

레이저로 인쇄된 깔끔한 자료와 희수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어우러져, 발표는 순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수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강의실의 OHP 프로젝터는 80년대에 도입된 골동품이었고,

먼지 쌓인 냉각팬의 성능은 이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표가 10분을 넘어가자, 프로젝터의 상판 유리는 계란 프라이를 해도 될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희수는 필름을 교체할 때마다 손끝이 데일 듯한 열기를 느꼈지만, 프로답게 내색하지 않았다.


​"자, 그럼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장. 희수가 밤새 공들여 그린 '붉은색 성장 그래프'가 등장할 차례였다.

희수는 비장하게 필름을 유리판 위에 올렸다.
스크린에 선명한 흑백 도표와 그 위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붉은색 화살표가 나타났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전략을 도입한다면 향후 5년간의 매출은..."


​그때였다.


'지글...'


​스크린 속의 붉은색 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뜨거워진 유리의 열기가, 필름 위에 덧칠된 유성 잉크의 끓는점을 넘어서버린 것이다.


​"어? 야, 저기 봐."
"어? 어?"


​맨 앞줄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수가 뒤를 돌아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꼿꼿하게 우상향 하던 붉은색 그래프가, 마치 한여름 아스팔트 위의 엿가락처럼 흐물흐물해지더니,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뚝. 뚝.


스크린 위에서 붉은 잉크가 피눈물처럼 번져 내렸다.

희망찬 매출 상승 곡선은 순식간에 대공황 수준의 폭락 그래프가 되어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잉크 자국이 아니었다. 희수의 학점이, 아니 그의 청춘이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강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위이이잉-'
야속한 기계음만 더욱 크게 들려왔다.


​"저, 저거... 완전히 망한 거 아니냐?"
"그래프가 녹네, 녹아. 무서워 죽겠네."


​수군거림이 들불처럼 번졌다. 박 교수의 미간이 좁혀졌다. 누가 봐도 발표를 망친 상황.

식은땀이 희수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당황해서 손으로 닦으려 했다간 더 흉측하게 번질 게 뻔했다.
​희수는 3초간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 희수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핑계가 스쳐 지나갔다.


'기계가 낡아서요.', '펜이 불량이라서요.', '다시 하겠습니다.'


​하지만 희수는 핑계 대신,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OHP의 전원 스위치를 '탁!' 하고 꺼버렸다.


​'휘유우우...'


거친 팬 소리가 잦아들고, 강의실은 순식간에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겼다.
모두의 시선이 어둠 속에 서 있는 희수에게 집중되었다. 희수는 지시봉을 내려놓고,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교수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
"보시다시피, 20세기의 낡은 하드웨어는... 저희가 준비한 21세기의 뜨거운 열정을 감당하기엔 벅찬 것 같습니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푸하하하!"
"오! 유희수 선배!"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와아아아!" 하는 환호성과 박수가 강의실을 메웠다.

기계적 결함으로 망칠 뻔한 상황을, 재치 있는 언변으로 '열정'으로 포장해 버린 순발력에 대한 찬사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깐깐한 박 교수의 입가에도 피식, 실소가 번졌다.


​"허허, 그놈 참... 말주변 하나는 A 학점이네. 불 켜게."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빠져나간 텅 빈 강의실.


희수는 열기가 식은 OHP 유리판 위에서 쭈글쭈글해진 필름을 떼어냈다.

붉은 잉크는 흉하게 번져 있었지만, 희수는 그 필름을 버리지 않고 다이어리 맨 뒷장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미래복사' 이모님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미래는 레이저 프린터처럼 선명하게 뽑혀 나오는 게 아니라, 때로는 뜨겁게 녹아내리고,

때로는 엉망으로 번지면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희수는 붉게 물든 손끝을 문지르며 강의실을 나섰다.


이 장면을 본 여자친구 예진은 한마디 거든다.

"너.. 쫌 멋지다."


바람이 시원했다.


​비록 그래프는 녹아내렸지만,
그날 희수가 보여준 '임기응변'이라는 이름의 가능성은,

그 어떤 고열에도 녹지 않는 단단한 알맹이가 되어 그의 대학교 마지막 페이지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