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의 시작, 어른이 되는 비용
1999년 9월. 세상은 온통 '노스트라다무스'와 'Y2K' 이야기로 흉흉했다. 12월 31일 자정이 지나면 컴퓨터가 멈추고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공포가 사람들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스물네 살 희수에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지구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백수'로 남는 것이었다.
IMF라는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처참했다. 내로라하는 선배들도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짐을 싸던 시절, 신입사원을 뽑는 기업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희수는 그 좁디좁은 문틈을 향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이력서를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9월의 어느 맑은 날. 희수의 손에는 '최종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쥐어졌다.
"희수야! 너 진짜 된 거야? 진짜로?"
엄마 영숙은 합격 통지서를 확인하고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녀에게 아들의 취업은 집안의 경사를 넘어, 고생 끝에 얻은 승전보와 같았다.
영숙은 그날 저녁, 희수의 손을 이끌고 동네에서 가장 큰 핸드폰 대리점으로 향했다. 아들이 출근할 때 기죽지 않게 하겠다는, 엄마만의 비장한 축하 의식이었다.
대리점 입구에는 안성기 배우가 중후한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들고 있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매장 안 진열장에는 당시 남자들의 심장을 뛰게 하던 모토로라 스타택이 검은색 슈트를 입은 신사처럼 놓여 있었다. '딸깍' 하는 그 묵직한 폴더 소리 하나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저기, 사장님... 저 검은색 모델은 얼마예요?"
희수가 조심스럽게 스타택을 가리켰다. 하지만 영숙의 눈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고, 핸드폰은 역시 애니콜이지! 너 안성기 나오는 거 못 봤어? 우리나라 지형에는 우리나라 기계가 최고래. AS도 삼성이 제일 편하고. 괜히 미제 샀다가 고장 나면 어쩔 거야?"
당시 핸드폰 유저들 사이에서는 디자인의 스타택이냐, 실용의 애니콜이냐를 두고 밤새 토론이 벌어질 정도로 시시비비가 치열했다. 하지만 물주이자 어머니인 영숙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희수의 손에 쥐어진 것은 검정색 삼성 애니콜 SPH-2000이었다.
011이나 017 같은 셀룰러 폰은 아니었지만, 희수는 016(KTF) PCS 가입 신청서에 이름을 적었다. 안성기가 TV에서 "본부, 본부!"를 외치며 최첨단 음성 인식을 자랑하던 바로 그 라인이었다.
가입 절차가 마무리될 즈음, 영숙은 가방에서 돋보기를 꺼내 쓰고 서류를 꼼꼼히 훑었다. 그러더니 희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아들, 입사 축하한다. 엄마가 기계값은 냈다. 큰맘 먹고 시원하게 뽑아준 거야. 대신 말이다... 요금은 이제 네가 벌어서 네가 내야지? 여기 급여 통장 번호 적어라."
희수는 펜을 든 채 헛웃음을 지었다.
"엄마, 이거 선물이라면서요. 선물에 요금이 포함 안 된 거예요?"
"당연하지! 이제 너도 어엿한 직장인인데 제 몫은 해야지. 그리고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엄마 아빠 핸드폰도 최신형으로 선물 해줘야 해? 알았지? ^^"
영숙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확고했다. 결국 희수는 자신의 급여 계좌를 자동이체 통장으로 등록했다. 말이 선물이지, 사실상 매달 꼬박꼬박 갚아나가야 할 '사랑의 빚'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희수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내 노동의 대가로 나의 통신비를 지불한다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희수는 주머니 속 SPH-2000을 만지작거렸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그립감이 훌륭했다. 당시 광고에서는 "본부!"라고 말만 하면 전화가 걸린다고 했지만, 희수가 조용한 방에서 "우리 집"을 외쳤을 때 인식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벨소리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투박한 단음이었다. 그러나
그 투박한 소리는 희수가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는 신호였고, 얼어붙은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아 세상 밖으로 첫발을 내디뎠다는 승전보였으며, 사랑하는 예진의 목소리를 언제든 들을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희수는 밤늦게 통장을 확인했다. 아직 월급이 들어오기도 전이었지만, 다음 달 그 통장에서 핸드폰 요금이 '자동이체'로 빠져나갈 생각을 하니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그것은 단순히 돈이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수가 세상의 일원이 되어, 제 몫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시작했다는 가장 확실하고도 뿌듯한 증거였다.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최첨단 기기에 세 번 접을 수 있는 폰이 나왔지만 그 당시의 투박한 모습은 희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폰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PCS폰. 우리들의 추억과 애환이 담겨있는 소중한 아이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