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각을 다툰 20세기의 끝, 그리고 21세기의 시작
1999년 12월 31일 밤.
희수네 거실은 거의 국가재난상황실 분위기였다. 다만, 국가 대신 “우리 집”이었고, 재난 대신 “뉴스가 말하는 재난”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앵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Y2K, 이른바 밀레니엄 버그로 인해… 전산망 마비 가능성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실 문이 벌컥 열렸다.
희수 외삼촌들이다.
진수와 진우 진철
진수가 먼저 라면 박스를 쿵 내려놓았다.
“비상식량. 기본이지.”
진우는 양초를 한 다발 꺼냈다.
“정전 나면 촛불이야. 촛불은 마음도 안정돼.”
진철은 집에 있던 컴퓨터 본체를 무슨 폭탄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컴퓨터가 연도를 00으로 읽으면 말이지… 세상이… 잠깐 멈출 수 있어.”
그 ‘잠깐’이라는 말이 무서웠다.
진짜 무서운 사람들은 늘 말을 작게 한다. 그래야 전문용어처럼 들리니까.
희수 아빠는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지구의 운명을 내가 지금 채널로 결정한다”는 자세였다.
희수 엄마 영숙은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계속 뭔가를 했다.
재난이 오면 엄마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대피하는 엄마와 밥 하는 엄마.
영숙은 후자였다.
“세상이 멈춰도 밥은 먹어야지.”
엄마는 밥솥을 닫으며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거실 한쪽에서는 외삼촌들의 ‘비상 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진수 : “정전 대비 완료. 라면 있음.”
진우: “조명 대비 완료. 양초 있음.”
진철: “전산 대비… 음… 컴퓨터가 문제야.”
그때 영숙이 김치를 접시에 옮기며 한마디 했다.
“근데… 너희 비상대책에 제일 중요한 게 빠졌네.”
3명의 동생들이 동시에 누나를 봤다.
영숙은 조용히 말했다.
“밥은?”
거실이 한 번 얼었다.
라면은 있었고, 양초도 있었고, 컴퓨터도 있었지만…
정작 ‘밥’은 없었다.
진우가 슬쩍 라면 박스를 가리켰다.
“밥 대신 라면…”
영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
“라면은 밥이 아니야.”
그 말은 거의 법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계속 무서운 얘기를 했다.
은행이 마비될 수 있다, 비행기가 위험할 수 있다, 물이 끊길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희수네 거실에서는 비상 대비가 점점 생활 예능처럼 흘러갔다.
진우는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말했다.
“물 미리 받아놔야 돼. 물은 곧 돈이야.”
진수는 양초에 불을 붙여보며 감탄했다.
“이야… 생각보다 낭만 있다. 2000년을 촛불로 맞이하는 거지.”
진철은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혼잣말했다.
“만약 00년이 1900년으로 돌아가면… 우리 집도… 조선시대 되는 거야?”
희수 아빠 영우가 리모컨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러면 너부터 군역이다.”
진철이 조용히 키보드를 덮었다.
역시 현실은 빠르게 정리된다.
그러다 자정이 가까워졌다.
외삼촌들이 동시에 “최종 점검”을 시작했다.
전등: 켰다 껐다
수도: 틀었다 잠갔다
가스: 만졌다(왜 만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만지면 안심된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냉장고는 억울했다)
영우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근데… 비행기는 우리 집 위로 안 날아가잖아.”
외삼촌들이 한 번 더 얼었다.
맞는 말은 늘 분위기를 망친다.
그리고 그때였다.
영숙이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눈썹이 한 번 올라갔다.
엄마들은 다 안다. 뭔가 이상하면, 그 이상함을 ‘감’으로 잡는다.
“근데…”
엄마가 천천히 말했다.
“얘들은 왜 소식이 없니?”
그 순간, 거실의 모든 소리가 멈췄다.
양초가 타는 소리도,
뉴스 앵커의 목소리도,
라면 박스의 존재감도 잠깐 잦아들었다.
희수와 예진.
오늘이 예정일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떠들썩한데도, 연락이 없었다.
엄마는 물 묻은 손으로 전화기를 잡았다.
그리고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외삼촌들은 이미 몸을 들썩였다.
세기말 대비는 라면으로 했지만, 출산 대비는… 외삼촌들의 몸으로 하는 거였다.
“희수야. 어디야?”
잠깐의 정적.
엄마의 목소리가 한 톤 내려갔다.
“병원?”
그리고 엄마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 우리가 지금 간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외삼촌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영숙운 문 앞에서 딱 한마디를 남겼다.
“얘들아, Y2K는 됐고…
지금 우리 집 진짜 버그는 애가 아직 안 나온 거야.”
외삼촌들이 잠깐 멈췄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날 밤, 희수네 거실은 잠깐 ‘세기말 대피소’였다가
곧장 산부인과로 향하는 출동기지가 되었다.
병원 복도는 밝았다. 형광등이 밝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긴장해서였다.
그리고 거기엔 또 하나의 카운트다운이 있었다.
세상이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
그리고 희수와 예진의 아이가 세상을 맞이하는 카운트다운.
벽시계는 23시 58분을 가리켰고, 희수는 손바닥에 땀이 찼다.
그때 외삼촌들이 옆에서 속삭였다.
“야… 1999냐 2000이냐… 이거 크다.”
“2000이면 주민번호가… 3이지?”
“야 그럼 얘는 태어나자마자 세기 바꾼 거네.”
희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숨을 삼켰다.
그리고—
0시가 넘어갔다.
제야의 종소리가 어디선가 들렸고, 병원 안내방송 삐— 소리가 겹쳐졌다.
0시 03분.
간호사가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아드님이세요!”
아이의 울음은 정말 ‘새것’ 같은 소리였다.
희수는 그 울음을 듣는 순간, 세기말이 끝났다는 걸 진짜로 믿게 되었다.
며칠 뒤, 구청.
희수는 자신의 번호를 적다가 잠깐 멈췄다.
그의 시대를 표시하던 ‘1’.
그리고 아이의 시대를 열어젖히는 ‘3’.
희수는 또박또박 ‘3’을 적었다.
그 순간 그는 알았다.
세기가 바뀐다는 건 뉴스 속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울음으로 시작되는 일이란 걸.
[에필로그]
아이의 첫울음은 ‘우리들의 박물관’에 울려 퍼지는 폐관 종소리 같았다.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진 낡은 신문 편성표,
세기말 공포로 사둔 라면 박스(결국 멀쩡한 세상에서 천천히 먹게 될 라면),
그리고 손때 묻은 기억들.
희수는 잠든 아이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 이제는 너의 세기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폐관이라 쓰고,
보관이라 읽는 방식으로.
안녕, 나의 1999년.
우리들의 박물관, 폐관.
그동안 〈사라진 것들의 박물관〉 시리즈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시즌 1과 시즌 2는 분위기가 달라, 저 역시 쓰면서 여러 번 놀랐습니다.
공감과 웃음을 충분히 드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이 전시는 더 단단해졌습니다.
언젠가 새로운 시즌을 열게 된다면, 세상에 없던 아이템 10가지로 ‘10년 후의 생활’을 유쾌하게 상상해 보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