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04화. 그녀는 10년 먼저 이곳에 왔다

10년의 경력이 주는 여유로움

by 유블리안



"저기요... 강 교리님? 같이 좀 가요!"


어둠이 짙게 깔린 경복궁의 회랑.

유희성은 절뚝거리며 앞서가는 여인의 뒤를 쫓았다.

의금부 뒷문에서 빠져나와 집현전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했다.

고신을 당한 무릎이 시큰거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앞서가는 강다온의 걸음은 야속할 정도로 빨랐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기이했다.

보통의 조선 여인들이 보여주는, 치맛자락을 살포시 쥐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그 우아한 자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퇴근 시간을 1분 남겨두고 지하철역으로 전력 질주하는

직장인의 바이브를 뿜어내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치마가 발에 채일 법도 한데, 그녀는 아주 익숙한 발놀림으로

옷자락을 툭툭 걷어차며 성큼성큼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허억, 허억... 질문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어디를 뒤져봐도

여성 교리는 없거든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남장 여자... 뭐 그런 설정인가요?"


희성의 끈질긴 물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다온은 대답 대신 속도를 더 높였다.

그녀의 등 뒤로 '귀찮으니 말 걸지 마시오'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집현전 본관이 아니었다.

화려한 단청이 칠해진 본관을 지나,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구석진 곳에

자리한 낡은 별채였다.

주위에는 보초도 없었다. 아니, 일부러 보초를 세우지 않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는 듯한 은밀하고 습한 기운이 감돌았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낡은 문이 열렸다.

다온이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희성도 쭈뼛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방 안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겉은 분명 평범한 한옥이었으나, 내부는 기묘한 부조화의 연속이었다.

벽면에는 먹물을 여러 번 덧칠해 칠판처럼 만든 검은 판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고,

그 위에는 백묵 대신 하얀 돌가루로 쓴 알 수 없는 수식과 도안들이 빼곡했다.


바닥에는 구겨진 종이 뭉치와 깎다 만 나무 조각,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부품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널려 있었다.


마치 을지로 뒷골목의 공업사와 21세기 판교의 스타트업 사무실을

조선 시대로 옮겨놓은 듯한 난잡함이었다.


"문 닫으세요."


다온이 등불을 책상 위에 쿵 내려놓으며 짧게 명령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더니, 붓통에서 붓을 꺼내 들었다.


"거기 앉아서 상처나 좀 닦으시죠. 피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니까."


그녀는 턱짓으로 희성이 메고 있던 낡은 괴나리봇짐, 아니 백팩을 가리켰다.


"가방에 '빨간약' 있죠? 아까 보니까 약 챙겨 다니는 것 같던데."


희성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가방을 열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의금부 옥사에서 짐을 빼앗겼다가 방금 돌려받았을 뿐,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자신조차 잊고 있었다.


"어찌... 아셨소?"

"시간 없으니 얼른 바르기나 하세요."


희성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었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포비돈 요오드, 일명 '빨간약' 병이 손에 잡혔다.

그는 뚜껑을 열어 찢어진 무릎과 팔꿈치에 약을 발랐다.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눈앞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붓을 들고 무언가를 빠르게 적고 있었다.

등잔 불빛 아래 드러난 단아한 옆모습은 영락없는 조선 사대부가의 규수였으나,

붓을 놀리는 손목의 스냅이나 종이를 홱 넘기는 행동거지는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마치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팀장님의 포스라고 해야 할까.


"저기... 강 교리님."

"......"

"용건만 말하라 하셨으니, 묻겠습니다."


희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절 왜 구해주신 겁니까? 전하의 특명이라곤 했지만,

저 같은 잡범을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뚝. 다온의 붓이 멈췄다. 종이 위에 검은 먹물이 번져나갔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희성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호기심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불량품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려는 '신상품 검수' 담당자의 서늘한 눈빛이었다.


"잡범이라뇨."


다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희성에게 다가왔다.


"전하의 휘(諱)를 함부로 입에 올리고, 곤룡포 자락을 만져보고,

심지어 '숙취해소제'라는 기묘한 물건을 진상하여 환심을 산 잡범은 조선 팔도에 없습니다."


희성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벽에 등이 닿았다. 다온의 시선은 희성의 얼굴이 아닌,

그의 왼쪽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매 끝으로 살짝 드러난, 배터리가 방전되어 까만 화면만 남은 검은색 스마트 워치.


"......"


방 안에는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등잔 심지 소리만이 들렸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다온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비릿하게 올라갔다.


"사과입니까, 우주입니까?"

"...... 예?"


희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순간 멍해졌다.

방금 이 15세기 조선의 한복판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뭐라고?


"아, 못 알아들으십니까? 스마트폰 기종 묻는 겁니다. 애플이냐, 갤럭시냐고요."


다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발음은 너무나도 명확한 21세기의 서울 표준어였다.

억양, 톤, 심지어 그 건조하고 시니컬한 말투까지.


희성은 입을 떡 벌린 채 뇌 정지가 왔다.

처음 이곳에 떨어져 곤룡포 입은 세종대왕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다, 당신... 지금 뭐라고..."

"반응을 보니 사과 제품은 아닌가 보네요. 워치 보니까 C타입 충전기 필요하겠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드르륵, 거친 소리를 내며 서랍을 열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희성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것은 나무를 깎아 거치대를 만들고, 구리선을 칭칭 감아 만든 물건이었다.

조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형태와 용도는 명확했다. 그것은 확실한 형태의 '수제 무선 충전기'였다.


"저기요, 강 교리님. 혹시... 당신도...?"


희성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다온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아까 의금부에서 보였던 차가운 미소와는 결이 달랐다.

타지에서 동향 사람을 만난 반가움보다는, 갓 자대 배치를 받은

어리버리한 이등병을 바라보는 말년 병장의 짠하고 측은한 눈빛에 가까웠다.


"반갑습니다, 후배님. 저는 2015년에 왔습니다. 그쪽보다 딱 10년 먼저."

"20... 15년이요?"

"네. 제가 열 살 때였죠. 국립중앙박물관 체험학습 갔다가 훈민정음해례본이 너무 보고 싶어서 유리창에 코 박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여기더라고요. 그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다온은 덤덤하게 자신의 비극을 이야기했다.

마치 '나 어제 카페에서 지갑 잃어버렸어' 정도의 가벼운 톤이었다.

희성은 말문이 막혔다. 스마트폰도, 와이파이도, 에어컨도 없는

이 야만의 시대에서, 이 여자는 무려 10년을 버텼단 말인가.

10살 꼬마가 20살 여인이 될 때까지.


"그, 그럼 10년 동안 여기서 사신 겁니까? 지, 집에 가는 방법은요?

돌아갈 방법은 찾으셨습니까?"


희성이 다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다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희성의 백팩을 툭 쳤다.


"방법이 있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벌써 돌아가서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치킨 뜯으면서 'SBS 인기가요'나 보고 있었겠죠."

"아......"


희성의 눈동자에 절망이 차올랐다. 다온은 희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포기하세요. 그리고 적응하세요. 그게 여기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온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가리켰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대기하세요. 나가지 마시고요.

전하께서는 내일이나 모레쯤, 기분 내키실 때 당신을 은밀히 부르실 겁니다."


"전하가... 저를 왜요?"


희성의 순진한 물음에 다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듯했다.


"왜긴요. 당신 가방 속에 든 그 '미래의 지식'들을 쪽쪽 빨아먹기 위해서죠.

저한테 지난 1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

"무서운 동네군요, 여기."

"후훗. 저는 10년 동안 조선어 공부를 빡세게 해서 웬만한 건 소통이 되는데,

희성 씨도 고생 좀 하셔야겠어요. 여긴 말이 안 통하면 목이 달아나는 곳이거든요."


희성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곳은 평화로운 학문의 전당 집현전이 아니었다.

이미 10년 먼저 납치된 선배(다온)가 영혼까지 털리며 썩어가고 있는,

한번 들어오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개미지옥이었다.


밤바람이 문풍지를 때리며 윙윙거렸다. 두 21세기인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