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 금지령과 건지선(建智膳)의 탄생
"아, 오게이! 오게이! 알겠다고요!"
짜악-!
희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얇은 회초리가 책상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다온 선배... 아니, 지금은 호랑이보다 무서운
스승인 다온이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오... 개... 이? 지금 나보고 개(犬)라 하였느냐?"
"아니, 그게 아니라요! 미래에서는 '알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여기는 미래가 아니다. 네 목이 달아나지 않게 하려면 혀끝부터 단속해야
한다고 누차 일르지 않았느냐!"
다온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는 억울함에 입이 댓 발 나왔다.
TV 사극에서는 대충 말끝마다 '~하오'나 '~하소서'만 붙이면 만사형통이던데,
실전 조선어는 딴 세상이었다.
억양, 장단음, 그리고 상대의 품계에 따른 미묘한 어미 처리까지.
이건 국어 공부가 아니라 암호 해독 수준이었다.
"드라마 작가님들... 고증 좀 살살하시지..."
"또, 또! 혼잣말도 함부로 하지 말거라. 다시 해봐라. '명심하겠나이다.'"
"명...심...하게...ㅆ...나이다..."
"혀에 힘을 빼라! 다시!"
조선의 아침은 닭 울음소리가 아니라, 희성의 처절한 발음 교정 소리로
시작되고 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잠시 궐내를 걷던 중이었다.
저 멀리, 수십 명의 신하들에 둘러싸여 걸어오는 붉은 곤룡포의 사내가 보였다.
세종대왕, 이도였다.
"와... 전하 포스 장난 아니네."
감탄도 잠시, 가까이서 본 세종의 얼굴은 충격적이었다.
눈 밑까지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 푸석한 피부. 위인전 속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감 3일 전인 IT 개발자 같은 몰골이었다.
"전하 얼굴이 왜 저러십니까?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그 물음에 다온이 목소리를 낮췄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경연(經筵)을 하셨다.
신하들과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즐기시니, 잠을 줄여가며 책을 보신 게지."
"즐기신다고요? 저 얼굴로?"
"전하는 당신이 더 많이 공부하여 논리로 신하들을 이기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으신다. 그러니 밑에 있는 신하들도 죽어날 수밖에."
희성은 혀를 내둘렀다.
"와... 우리 회사 사장님이랑 정반대네.
거긴 불통의 아이콘인데 여긴 과도한 소통왕이시네."
"소통왕?"
"아닙니다. 아무튼, 존경스럽긴 한데... 좀 짠하네요."
해가 지고 다온의 처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공적인 업무가 끝나자 다온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빗장을 걸어 잠그자마자 그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래서, 2025년에는 여인들이 얼굴에 무엇을 바른다고?"
"아, 쿠션 팩트 같은 거요? 그냥 톡톡 두드리면 화장이 끝나요.
바름이가 알려줬는데 요즘 그게 제일 유행이라더라고요."
희성의 입에서 '바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다온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바름...? 이름이 참 곱구나.
헌데 그 여인은 누구길래 너에게 그런 것까지 알려주는 것이냐?"
"아, 제 비서예요. 목소리도 좋고, 제가 '야' 하면 '왜' 하고 대답도 바로바로 하고.
밤이고 낮이고 제가 부르면 1초 만에 튀어나오는 아주 똑똑한 친구죠."
그는 꺼져버린 휴대폰 속 AI 어플인 '바름이'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낯선 조선 땅에 오니 그 기계적인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다온의 표정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희성의 말을 '밤낮없이 곁에 붙어있는 헌신적인 여인'으로 해석한 것이
분명했다.
"허... 밤낮없이... 1초 만에... 아주 지극정성이구나."
탁! 다온이 붓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됐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듣겠다."
"네? 아직 저녁 안 먹었는데요? 그리고 2025년 이야기 더 해달라면서요."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 바름이라는 비서가 그리 좋으면 당장 가서 찾지,
왜 여기서 얼쩡거리느냐!"
다온은 홱 등을 돌리고 앉아버렸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날 판이었다.
기계한테 질투를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나는 억울함에 입을 삐죽거리며
짐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때, 짐 사이로 삐져나온 초록색 병이 다온의 등 뒤에서 반짝였다.
"잠깐. 저것은 무엇이냐?"
다온이 가리킨 것은 희성이 가져온 짐 속에 섞여 있던 마시다 남은 소주병과
숙취해소제 '컨디션'이었다.
다온은 홀린 듯 다가와 소주와, '컨디션' 뚜껑을 따고 냄새를 맡았다.
"킁킁... 묘한 향이다. 약재 냄새 같기도 하고, 단내도 나고."
"아, 그거 숙취해소제예요. 제가 지난번에 황희 정승 대감님께 한 병 드리면서
'미래의 성주탕(해장국)'이라고 설명드렸던 건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쯧. 이래서 네가 하수라는 것이다."
"네? 뭐가요?"
"이 귀한 농축액을 고작 '성주탕'이라 불렀단 말이냐? 성주탕은 저잣거리
주막에서 파는 흔하디 흔한 국물이다. 이름을 그렇게 붙이면 누가 귀하게
여기겠느냐?"
다온은 한심하다는 듯 희성을 보더니,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알코올의 맛을 처음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 졌다. 바로 컨디션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은 호롱불보다 더 크게 번쩍였다.
"오오...! 마시자마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것은 국이 아니라 약이다, 약!
이 안에 무엇이 들어갔느냐?"
"성분표에요? 헛개나무 열매랑... 꿀이랑... 타우린? 뭐 그런 게 들어갔을 텐데."
다온은 갑자기 무서운 기세로 붓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방금 전의 질투는 온데간데없고, 광기 어린 사업가의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 보자. 성주탕 따위가 아닌, 전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명약'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네? 여기서요? 이걸요?"
"전하께서는 늘 새로운 문물에 목말라하신다. 우리가 이 비기를 재현해 낸다면
너의 신분 상승도 꿈은 아닐 것이다. 자, 앉아라. 지금부터 임상 실험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다온은 "취해야 깬다"는 기적의 논리로 그에게 막걸리를 사발째 먹였고,
곧이어 정체불명의 탕약을 들이부었다.
"우웩! 선배님, 이건 진짜 똥 맛인데요?"
"3호 실패. 소 오줌의 양이 과했나 보군."
희성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구토와 설사를 반복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해가며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잠깐만요. 전하께서 고기반찬 엄청 좋아하시죠?"
"그렇다. 수라상에 고기가 없으면 수저를 드지 않으실 정도지."
"그리고 운동은 안 하시고... 맨날 앉아서 책만 보시고... 혹시 물도 자주 찾으시지
않나요? 막 목말라하시고."
다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어찌 아느냐?
전하께서는 밤낮으로 갈증을 호소하시어 차가운 물을 달고사 신다."
"그거 '소갈(당뇨)' 증세잖아요. 단순히 술 깨는 것만으론 부족해요.
혈당... 아니, 그 단 기운을 낮춰주는 걸 넣어야죠."
그는 2025년 건강 프로그램에서 봤던 지식을 필사적으로 짜냈다.
"뽕잎! 상엽(뽕잎)이 소갈에 특효라고 했어요.
그리고 갈증에는 오미자가 좋고요!"
"상엽이라... 성질이 차갑고 독을 풀며 열을 내리는 약재지.
오미자는 진액을 생성하고. 네놈이 의술에도 조예가 있었느냐?"
다온은 즉시 말린 뽕잎과 붉은 오미자를 꺼내 약탕기에 추가했다.
"좋아. 지구자(헛개)로 술독을 풀고, 상엽으로 소갈을 잡고,
오미자로 맛과 갈증을 동시에 잡는다.
이것이야말로 육식을 즐기시는 전하를 위한 맞춤형 명약이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약탕기에서 구수하면서도 새콤달콤한 향이 퍼졌다.
다온이 의기양양하게 마지막 사발을 내밀었다.
"마셔보거라. 최종 완성본이다."
반쯤 기절한 상태로 그것을 받아 마셨다. 달큼하면서도 시원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울렁거림이 잦아들고 눈앞이 선명해졌다.
"어...? 머리가... 안 아파요!"
"성공이구나!"
다온은 아이처럼 방방 뛰다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붓을 들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힘차게 세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 建 智 膳 ]
"이름은 '건지선(建智膳)'이다."
"건지... 선? 컨디션?"
"그래. 네가 가져온 그 물건의 소리를 따르되, 격을 높였다.
세울 건, 지혜 지, 음식 선. 무너진 몸을 세우고 흐려진 지혜를 되찾게 해주는
귀한 음식이라는 뜻이다. 어떠냐?"
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와... 갖다 붙이는 건 진짜... 아니, 해석이 기가 막히네요. 뭔가 있어 보여요."
"그렇지? 내일 날이 밝으면 이것을 들고 전하를 뵈러 갈 것이다."
다온은 뿌듯하게 '건지선'이라 적힌 종이를 들어 보였다.
희성은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이 여자는 천재일까, 아니면 조선 최고의 장사꾼일까.
어찌 됐든, 그의 조선 생존기에 강력한 무기가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