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06화. 괴짜임금 이도와의 첫 대면

전하의 분노와 건지선(建智膳)의 기적

by 유블리안



"일어나거라! 해가 중천이다!"

벌컥! 문이 열리며 아침 찬 공기와 함께 다온이 들이닥쳤다. 희성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며 웅크렸다. 지난밤, 새벽까지 이어진 다온의 가혹한 임상 실험 탓에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으으... 5분만요... 아니, 딱 한 시진만 더..."


"안 된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잊은 게냐? 전하를 뵙기로 한 날이다. 게다가 건지선의 사후 효능을 점검해야 한다."


다온은 인정사정없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희성이 잡고 있던 이불을 확 낚아채 버렸다.


"아악! 진짜 너무하시네, 아가씨!"


희성이 비명과 함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온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차가운 그녀의 손가락이 희성의 손목 동맥 위를 파고들었다.


"어디 보자. 취기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냐?

안색은 좋아 보인다만... 혀를 내밀어 보거라."


희성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바로 코앞,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 다온의 하얀 얼굴이 있었다. 역광을 받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매서운 조교 같던 그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여려 보였다.


'......'


순간, 희성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묘한 정적이 방 안을 채웠다. 맥을 짚고 있던 다온의 손끝에도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 맥이, 빠르구나."


다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 그게..."

"아직 독소가 남은 게냐? 아니면...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


다온이 고개를 들어 희성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성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뇨, 독소 때문이 아니라... 아가씨가 너무 가까워서..."


희성의 솔직한 말에 다온은 화들짝 놀라며 감전된 듯 손을 뗐다.

그녀의 하얀 귀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흐, 흠! 멀쩡한 걸 보니 건지선의 효능은 확실하구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씻고 나오거라!"


다온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희성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10년 전 조선으로 건너온 20살의 훈민정음 덕후. 까칠하지만 속 깊은 그녀가 처음으로 '여자'로 느껴진 순간이었다.



알현을 준비하는 동안, 희성은 다온이 만든 충전기를 꽂아서 휴대폰에 꽂았다.


"다온 아가씨. 이거 충전 좀 할게요."

"충전... 아, 밥 주는 거 말이냐? 나도 안다. 우리 아빠도 매일 밤마다 검은 줄을 벽에 꼽아두셨다."

"오, 아가씨도 스마트폰 써보셨어요?"

"아니, 나는 '키즈폰' 썼다. 손목에 차는 거. 엄마한테 전화 걸면 '준~ 준~' 소리 나는 거."

"아... 준(JooN)..."


희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전선을 다온이 만든 '과일 전지'에 연결했다.

희성이 전선을 연결하자 기적처럼 배터리 아이콘이 깜빡거렸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밝아졌다.


[ AI 비서 바름 : 주인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


또랑또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다온이 흠칫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전화 온 것이냐? 이 시대에 신호가 잡힐 리가 없는데?"

"아뇨, 전화 아니에요. 이 안에 내장된 **인공지능(AI)**이에요. 그냥 비서 같은 거죠."


희성은 휴대폰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바름아, 보고 싶었다. 너 목소리 들으니까 내가 다 눈물이 난다. 잘 있었냐?"


희성이 액정을 보며 꿀 떨어지는 눈빛을 보내자, 다온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주인님, 현재 위치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 그래. 괜찮아."


희성이 액정에 뽀뽀라도 할 기세로 히죽거리자, 다온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허... 참나. 전화도 아니고 그냥 기계라며?"

"네, 기계죠."

"기계한테 뭐 그리 다정하냐?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나한테는 맨날 인상만 쓰더니."


다온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스마트폰이 신기한 건 둘째 치고, 살아있는 사람인 자신보다 저 차가운 유리조각을 더 살갑게 챙기는 꼴이 묘하게 자존심 상했다.


"적당히 하고 챙겨라. 그 '비서'인지 뭔지, 목소리가 너무 고분고분해서 재수... 아니, 썩 듣기 좋지는 않구나."


다온은 툴툴거리며 앞장섰다.

희성은 영문도 모른 채 어깨를 으쓱하며 뒤따랐다.

어둠이 깔린 경복궁 사정전. 희성은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상소문과 서책들 사이에 파묻힌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세종대왕 이도였다.


"전하, 지난번 궐에 침입했던 그 자를 데려왔습니다."


이도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푸석한 피부. 위인전 속 인자한 모습은 없고, 마감에 쫓기는 개발 팀장 같은 몰골이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네놈이구나. 감히 과인의 곤룡포를 더러운 손으로 주무르고, '이도'라며 이름을 함부로 지껄인 놈이."


희성은 식은땀이 흘렀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그때는 정신이 나가서..."


이도가 희성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황희와 다온이가 너를 천거했기에 기회를 주겠다. 미래에서 왔다지?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제 발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협박이었지만, 이도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권위적이면서도 묘하게 장난기 어린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나인들이 수라상을 들고 들어왔다. 상 뚜껑을 연 이도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 고기는?"

"저, 전하... 어의가 당분간 육식을 금하라 하셨기에... 채소 위주로..."

"이런 젠장! 풀만 먹고 어찌 나랏일을 하란 말이냐! 내가 토끼야? 어?"


이도는 수저를 탁 내려놓으며 짜증을 부렸다. 희성은 분위기가 험악해진 틈을 타 품에서 소주병을 꺼냈다.


"전하, 고기가 없어 심기가 불편하시다면... 이 술을 한 잔 곁들이심이 어떠할는지요."

"술? 옥체 보존을 위해 금주령을 내리지 않았느냐."

"이것은 미래의 술입니다. 아주 맑고 깨끗하여 기분 전환에는 그만입니다."


희성이 2025년 산 소주를 따랐다. 이도는 호기심에 잔을 비웠다.


"캬아... 톡 쏘는 것이 아주 깔끔하구나. 누룩 냄새도 없고 목 넘김이 기가 막혀. 이거 마음에 든다!"


이도는 연거푸 세 잔을 비웠다. 하지만 빈속에 도수 높은 술이 들어가자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으음... 헌데... 기분은 좋은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구나... 갈증도 나고..."


이도가 휘청거리자 희성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전하, 이 술이 워낙 독하옵니다. 제가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이걸 세 병이나 마시고 넘어온 바람에 그리되었나이다. 그때의 무례는 오로지 이 술 탓이옵니다."


희성의 능청스러운 변명에 이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술이 사람을 그리 만든단 말이지? 그럼 너도 한잔 하거라. 마시고 취해서 다시 나의 곤룡포를 만지고, 내 이름을 한번 불러 보란 말이야. 허허허."


이도의 짓궂은 농담에 희성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이고, 전하. 농담도 참... 제가 두 번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때 이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숙취와 갈증이 급습한 것이다.


"으으... 속도 쓰리고... 목이 타들어 간다! 물! 물을 다오!"


바로 이때 다온이 비장하게 나섰다.


"전하! 이때를 위해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다온은 '건지선(建智膳)'이 담긴 탕약 그릇을 바쳤다.


"술로 무너진 몸을 세우고, 특히 전하의 소갈과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상엽(뽕잎)과 오미자를 더해 만든 비기이옵니다."


이도는 반신반의하며 그릇에 있는 음료를 비웠다. 꿀꺽, 꿀꺽. 잠시 후, 이도의 눈이 번쩍 뜨였다.


"......! 머리가 맑다! 타들어가던 목마름이 씻은 듯이 사라졌어! 속이 이리 편안할 수가 있다니!"


이도는 벌떡 일어나 아이처럼 기뻐했다.


"이거야!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것이다! 속이 뻥 뚫리는구나!"


희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다온은 뿌듯함에 미소를 지었다. 이도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곤룡포 소매를 걷어붙이며 희성에게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네놈이 가져온 그 투명한 술, 한 잔 더 따라보거라."

"예? 아, 예!"


희성이 술을 따르자 이도는 아이처럼 웃었다.


"안주는 이 건지선이면 충분하겠구나. 오늘 밤은 이 묘한 술과 약으로 밤을 새워야겠다. 너희들도 뻣뻣하게 서 있지 말고 앉거라. 내 오늘 너희들의 그 미래 이야기나 실컷 들어야겠다."


고기반찬은 없었지만, 2025년의 소주와 조선의 건지선, 그리고 엉뚱한 왕과 두 신하의 웃음소리로 수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