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와 미래인, 소리의 뼈대를 세우다
짹짹—.
경복궁의 아침은 종(鐘)보다 먼저 참새가 출근한다. 처마 끝에서 요란하게 회의를 열더니, “오늘도 살자”는 결의를 소리로 쏟아붓는다.
희성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낯선 냄새.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은… 맑았다.
어젯밤, 다온이 장난스럽게 끊어 부르던 그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 라. 버. 니?”
희성은 이불을 걷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으아… 다시 생각해도 적응 안 되네. 05년생이라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이불을 가지런히 개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일어나셨어요? 오라버니?”
다온이 들어왔다. 손에는 분장 도구가 들려 있었다. 작은 풀단지와 붓, 얇은 수염 조각. 표정은 당차고 눈꼬리는 장난기로 번뜩였다. 어색함 같은 건— 애초에 궐 안 어딘가에 출입 금지라도 당한 듯 보이지 않았다.
“어… 그래. 잘 잤냐. 우리 다온이.”
“어라? 적응력 빠른데요? 어제는 얼굴 빨개져서 기침하더니.”
다온이 희성 앞에 앉았다. 며칠 면도를 못 한 탓에 턱과 인중이 거뭇했다. 다온이 그걸 보더니 쿡 웃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수염 안 붙여도 되겠네.”
“그 말… 칭찬 맞지?”
“네. 아주… 조선식 칭찬.”
희성은 얌전히 턱을 내밀었다. 다온이 붓에 풀을 묻혀 인중과 턱에 꼼꼼히 발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료’의 손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라버니’라는 호칭 하나가 공기를 바꿔 놓았다. 닿을 듯 말 듯한 손끝이 괜히 간질간질했다. 희성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바로 후회했다.
“가만히 좀 있어요. 입이 씰룩거려서 삐뚤어지잖아요.”
“네가 너무 꼼꼼하게 하니까 그렇지. 숨도 못 쉬겠다.”
“엄살은. 오라버니가 되어서 의젓한 맛이 없네.”
다온은 밉지 않게 타박하면서도 갓끈을 매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희성은 그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못 참겠다는 듯 장난을 걸었다.
“근데 너, 어제부터 오라버니 소리가 아주 입에 붙었다?”
“왜요? 싫으면 다시 ‘야’, ‘너’ 할까요?”
“아니. 듣기 좋은데? 계속 그렇게 불러. 오빠가 곶감 많이 사줄게.”
다온은 코웃음을 쳤다.
“궐에 널린 게 곶감이고요. 밥값이나 하세요. 전하께서— 지금, 목이 빠지셨습니다.”
“목이… 빠지셨어?”
“네. 글자 때문에요.”
다온이 희성의 갓을 톡 치며 일어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어색함 대신 열 살의 간격이 둘 사이를 더 쫀쫀하게 묶는 끈이 되어 있었다.
강녕전 옆, 비밀 연구실.
문을 열자마자 확 끼쳐오는 건 묵향과, 밤을 꼬박 새운 사람만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였다. 종이, 먹, 초의 그을음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방 안 공기가 말라 있었다. 말라 있는데 뜨거웠다.
딱 “야근방”의 공기였다.
“오! 왔느냐!”
이도는 책상 너머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 밑은 거무죽죽했고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데 표정만큼은 소풍 가는 날 아침의 아이처럼 해맑았다. 잠은 못 잤는데, 기대감이 대신 혈색을 지키는 얼굴이었다.
다온이 먼저 예를 갖췄다.
“전하,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안색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이도는 손을 내저었다. 내저으면서도 몸은 앞으로 쏠렸다. 마음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 내 안색이 문제더냐. 백성들은 글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해 숨이 막힌다. 내가 어찌 편히 눕겠느냐.”
책상 위는 전쟁터였다. 중국의 운서(韻書)와 각종 책, 쪽지, 먹물 번짐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 끄적인 훈점(訓點)과 표시들이 빼곡했다. ‘어젯밤’이 아니라 ‘며칠 밤’ 같았다.
세종은 희성의 손을 덥석 잡아끌어 앉혔다.
“어서 앉거라. 다온이 너도 가까이 오너라.”
희성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집현전 학자 몇이 이미 자리에 와 있었다. 눈빛들이 날카로웠다. 똑똑한 사람들의 눈빛은 늘 조금 무섭다. 특히 새벽에 불려 나온 똑똑한 사람들의 눈빛은 더 무섭다.
세종이 말을 이었다.
“미래에는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쓴다 하였지. 그게 가능하려면— 문자가 백성의 손에 들어가야 한다.
헌데 한자는 높고, 이두는 좁다. 우리말은 넓은데 그릇이 작다. 나는… 그게 견디기 어렵다.”
그 말끝에, 이도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왕의 웃음이 아니라, “해결해야 잠이 오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희성은 한 박자 숨을 골랐다.
여기서 ‘정답’을 꺼내면 이야기(그리고 역사가) 망가진다. 무엇보다 세종의 것이 될 발명을 ‘복사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희성은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말했다.
“전하. 소신이 미래의 ‘완성된 글자’를 그대로 내보이면… 그 글자는 전하의 것이 아니라, 미래의 그림자가 될 것이옵니다.”
집현전 학자들의 시선이 동시에 희성에게 꽂혔다.
“이 자가 무슨 말을 하는가”의 시선. 하지만 이도는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발명가였다. 발명가는 ‘답’보다 ‘과정’을 귀하게 여긴다.
희성이 이어 말했다.
“대신, 소신은 원리의 뼈대만 아뢰겠습니다.
뼈대만 세워두면— 살은 전하와 집현전에서 붙일 수 있사옵니다.”
이도의 눈이 반짝였다.
“좋다. 뼈대만 대라. 그 뼈대를 붙잡고 우리가 달려가겠다.”
희성은 책상 위 흰 종이를 앞으로 끌어와, 아주 간단한 그림부터 시작했다.
“첫째, 자음은 입속의 움직임을 닮으면 됩니다.
혀뿌리, 혀끝, 입술, 목구멍… 소리가 나는 자리마다 ‘기본 뼈’를 잡아두고,
나머지는 획을 더해 확장하는 식으로요.”
학자 하나가 바로 물었다.
“그렇다면 기본자는 몇이옵니까?”
희성은 웃음을 삼켰다. 여기서 숫자를 말하면 그게 곧 ‘정답’이 된다.
그는 숫자 대신 방향을 건넸다.
“기본자는… 필요한 만큼이옵니다.
다만 ‘확장 가능한 기본자’가 있어야 백성이 외우기 쉽습니다.
기본이 단단하면, 파생은 자연히 자라옵니다.”
이도가 짧게, 아주 짧게 “좋다” 하고 말했다. 그 한 마디가 CEO의 결재 같았다.
희성은 두 번째를 말했다.
“둘째,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의 결로 잡으시면 됩니다.
하늘 하나, 땅 하나, 사람 하나.
이 셋은 글자의 철학이면서 동시에— 백성이 가장 빨리 배우는 ‘기억 장치’가 됩니다.”
학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철학을 문자로?’ 하는 표정이 잠깐 스쳤지만, 이도는 이미 그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더 묻지 않았다.
희성은 마지막을 눌러 말했다.
“셋째, 가장 중요합니다.
이 문자는 조합으로 굴러가야 합니다.
글자 하나를 외우는 게 아니라, ‘붙이는 법’을 익히면…
백성은 스스로 글을 만들게 됩니다.”
이도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 순간, 이 방 안의 공기만큼은 확실히 “미래”를 향했다.
희성은 스마트폰을 꺼내려다— 잠깐 멈췄다.
정답을 보여주지 않기로 했으니까.
대신, ‘도구의 느낌’만 보여주기로 했다.
“전하, 이것은 미래의 도구이옵니다.
다만 글자의 완성본은 보이지 않겠습니다.
선과 점이 얼마나 반듯해질 수 있는지만 잠깐 보시지요.”
희성은 화면을 켰다. 얇은 빛이 방 안에 번졌다.
집현전 학자 몇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다온도 숨을 삼켰다.
“자, 보십시오.”
희성은 메모장에 아주 단순한 기호 세 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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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세 개.
점 하나, 가로 하나, 세로 하나.
세종의 눈이 움직였다. 그는 ‘기술’보다 ‘구조’를 먼저 보는 사람이라, 그 단순함에 오히려 더 빨려 들어갔다.
“하늘은 점, 땅은 횡, 사람은 종….”
이도가 중얼거렸다. 스스로 정답에 가까워지는 소리였다.
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 방향이옵니다.
이 셋을 가지고— 어디에 어떻게 붙일지, 어떤 소리를 맡길지,
그 규칙은 전하와 집현전이 정하셔야 하옵니다.”
학자 하나가 바로 물었다.
“그렇다면 자음과 모음은 반드시 오른쪽에 붙여 쓰는 것이옵니까?
아니면 아래에 두는 것이옵니까?”
희성이 웃었다.
바로 이 질문이, 앞으로의 이야기를 열어젖힐 문이었다.
“그 논쟁이— 오늘의 핵심이옵니다.”
이도는 붓을 집었다. 그리고 종이에 자음 하나를 그려놓았다. 아직 ‘정해진 글자’라 부르기엔 조심스러운, 그러나 분명한 뼈대. 그 아래에 점(ㆍ)을 조심스레 찍었다.
점이 내려앉는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소리가 종이 위로 “앉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낮게 말했다.
“좋다.
모음은… 붙는 자리부터 우리가 정하자.
백성이 가장 빨리 배우는 길이 무엇인지부터.”
그는 학자들을 바라봤다.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왕의 눈빛이 아니라— 일을 시키는 사람의 눈빛, 밤샘을 강요하는 상사의 눈빛.
하지만 그 상사는 이상하게도 미웠다기보다… 따라가고 싶었다.
“오늘은 여기서부터다.
각자 논거를 가져오라.
왜 오른쪽이어야 하는지, 왜 아래여야 하는지.
우리말의 숨결이 어디로 흐르는지 글자 자리를 정해보자.”
다온이 희성을 힐끗 봤다.
희성도 다온을 힐끗 봤다.
둘은 말없이 알았다.
정답을 들고 온 사람이 아니라, 정답이 태어나는 자리를 만든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걸.
창문 틈으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들어와, 종이 위의 점 하나를 비췄다.
그 작은 점이, 조선의 아침을 바꾸기 시작했다.
세종이 마지막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소리가… 이제 뼈를 갖추기 시작하는구나.”
잠들지 못하는 조선의 CEO는, 오늘도 잠 대신 미래를 선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