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07화. 말이 통하지 않아도 : 첫 번째 진심

세종의 은밀한 프로젝트와 희성의 완벽한(?) 변신

by 유블리안




전날 밤의 거한 술판이 벌어지고 난 다음 날 오후. 희성과 다온은 세종의 은밀한 호출을 받았다. 세종은 내관들조차 물리치고 직접 앞장섰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경복궁 깊숙한 곳, 흠경각(欽敬閣) 뒤편의 허름한 전각이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리자, 희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 안은 책과 종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벽면 가득 알 수 없는 기호들과 그림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구겨진 종이 뭉치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과인의 고민이자, 조선의 미래다."


세종이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초기 형태의 한글, 혹은 실패한 시안들이 적혀 있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글자가 없어 가슴을 친다.

내 그들에게 '소리'를 주고 싶으나... 소리를 모양으로 담아내는 것이 이토록 어렵구나."


세종은 희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래에서 왔다 했느냐. 네가 가진 그 '소리의 이치'를 내게 빌려 다오."


희성은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하, 제가 아는 것은 완성된 결과물일 뿐입니다.

허나... 전하께서 찾으시는 그 '소리의 길'을 찾는 데 제 목소리를 보태겠습니다."



세종과의 독대가 끝난 직후, 다온은 희성을 서둘러 자신의 처소로 데려갔다.


"이리 들어와. 언제까지 그 눈에 띄는 '회색 갑옷(정장)'을 입고 다닐 셈이냐? 신고당하고 싶어?"


다온은 낡은 궤짝을 열어 옷가지들을 꺼내 툭 던졌다.


"자, 입어라. 양아버지(강진묵 대감)의 젊은 시절 옷을 몰래 훔쳐 온 거다."

"으아 드디어 갑갑한 넥타이와의 이별인 것인가?"


희성은 병풍 뒤로 들어가 2025년의 슈트를 벗어던지고, 헐렁한 한복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다.

하지만 곧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 이거 끈을 어디로 묶는 겁니까? 매듭이 자꾸 풀리는데?"

"하아... 나와 봐. 내가 해줄 테니."


희성이 어정쩡한 폼으로 걸어 나오자, 다온은 희성의 가슴께에 있는 옷고름을 잡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매듭을 짓는 다온의 손끝이 희성의 명치 부근을 스쳤다.


"흡..."


"숨 참지 마라. 배 나온 거 다 아니까. 운동 좀 하자."


"머리는 이게 뭐야? 정체를 감추려면 머리부터 만들어야겠네."


"머리요? 머리는 갑자기 기를 수도 없고 어쩌죠?"


"방법이 있지. 얌전히 앉아 있거라. 내가 조선시대 양반으로 만들어 줄 테니."


다온은 희성의 짧은 머리 위에 가발을 덧대고, 망건을 아주 단단히 조여 맸다.


"아악! 아가씨! 머리에 피 안 통해요!"


"가만히 좀 있어! 헐거우면 들킨다니까."


다온은 툭 내뱉었지만, 그녀의 귀 끝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다온은 희성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얼굴이 너무 허전한데? 수염이 하나도 없어서야 원."


"아, 매일 면도하니까요. 깔끔하고 좋잖아요?"


"조선에서 사내가 나이 먹고 수염 없으면 딱 하나다. 내시."


다온의 말에 희성이 기겁하며 턱을 감싸 쥐었다.


"내, 내시요? 그건 안 되죠!"


"가만있어 봐. 분장 도구가 있을 텐데."


다온은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검은색 말총(가짜 수염)과 접착제(아교)를 꺼냈다.


"턱 들어."


다온이 까치발을 들고 희성의 턱과 인중에 꼼꼼하게 풀칠을 했다.

그녀의 숨결이 턱밑에 닿자 희성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다온은 집중하느라 입술을 삐쭉 내민 채,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수염을 붙였다.


"간지러워요, 아가씨..."


"움직이지 마! 삐뚤어지면 영락없는 간신배 꼴 되니까."


잠시 후, 다온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됐다. 이제 갓만 쓰면 완벽해."


다온은 희성의 짧은 머리 위에 가발과 망건을 씌우고, 탕건과 갓까지 씌워주었다.

턱수염과 콧수염이 제법 그럴싸하게 붙어 있어, 영락없는 조선의 중년 선비처럼 보였다.

다온은 자신의 작업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호오... 수염 하나 붙였다고 인물이 확 사네. 입만 안 열면 아주 점잖은 사대부야."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입 주위가 뻣뻣해서 말도 못 하겠는데..."



완벽하게 변장한 두 사람은 궐내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 수라간 근처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이 칠칠맞은 것! 이것이 전하께 올릴 타락죽인 것을 모르느냐!"


희성이 돌아보니, 중년의 내관 하나가 어린 생각시를 구석에 몰아넣고 손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바닥에는 죽이 엎어져 있었다. 희성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들었다.


"잠깐!"


탁! 희성이 내관의 손목을 낚아챘다. 내관이 황당하다는 듯 희성을 노려보았다.


"누, 누구냐?"


"아이가 실수 좀 할 수 있지, 다짜고짜 손부터 올라갑니까? 말로 하시오, 말로."


희성의 낯선 말투에 내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복장을 보니 궐내 사람은 아닌 듯한데... 여봐라! 여기 거동이 수상한 자가 있다!"


내관의 고함에 군졸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희성은 아차 싶었다.


그때 다온이 앞으로 나서며 품에서 출입패를 꺼내 들었다.

"멈추시오! 이분은 집현전 부제학 강진묵 대감의 친척 되시는 분으로, 전하의 특명을 받아 오신 것이오.

이 패가 보이지 않소?"


다온의 서슬 퍼런 호통에 내관과 군졸들은 멈칫했다.


"저, 전하의 특명이라 하셨습니까... 몰라 뵙고 실수를..."


내관이 물러가자 다온은 희성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얏! 왜 꼬집어요?"


"나서지 말랬지! 의금부 가고 싶어 환장했냐?"


다온은 씩씩거리면서도, 바닥에 주저앉아 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희성은 아이에게 다가가 주머니에 있던 곶감을 쥐여주며 눈을 맞췄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따뜻한 눈빛에 아이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하는구나."



그날 밤, 다온의 처소 앞 마루.

희성은 스마트폰으로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를 작게 틀어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노래냐? 참... 청승맞구나. 가사는 또 왜 이리 슬픈 것이냐. 내가 들어본 노래는 아닌 것 같구나. 노래는 어떻게 나오는것이냐?"


"아 이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 저장해 놓았지요."


다온이 다가와 옆에 털썩 앉았다.


"...... 아까는, 고마웠다." 다온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 아이 일 말이다.... 사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말이 통하지 않아서 꽤나 고생했거든.

매일 밤 울었는데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


"그래서 네가 좀 부럽더라. 기계한테도 말을 걸고, 낯선 아이한테도 서슴없이 다가가는 그 뻔뻔한 용기가."


희성은 말없이 웃으며 다온을 바라보았다.


"근데 아가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 몰랐거든요.

선배님... 아니, 다온 씨. 우리 꼭 같이 집에 갑시다."


'다온 씨'라는 호칭에 다온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려 했다.


"크흠! 그나저나... 너 몇 살이냐? 하는 짓 보면 철딱서니가 없어서 나보다 한참 동생인 건 알았는데. 확실히 하자고."


다온은 당연히 자신이 '누나'뻘일 것이라 확신하며 팔짱을 꼈다.


"저요? 서른인데요. 95년생."


정적. 다온의 눈이 탁구공만 하게 커졌다. 팔짱 낀 손이 스르르 풀렸다.


"뭐...?! 서, 서른?"


"네. 왜요? 동안이라 몰랐나?"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나 스무 살인데. 05년생... 그럼 나보다 열 살이나 많다고?"


다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희성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조선 생활이 서툴러서 어리바리한 동생인 줄 알고 마음껏 하대했는데,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차이라니.

다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 나 완전 실수했네.

그럼 내가 지금까지 아저씨한테 야, 너 하고... 반말 찍찍했던 거야?"


다온이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자, 희성이 이때다 싶어 능글맞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더니, 우리 '다온 씨'는 초면에 멱살부터 잡고 아주 무서우시더라고요?"


"아, 아니... 그건 네가... 아니, 당신이 너무 수상해서..."


다온이 횡설수설하며 당황하자, 희성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에이, 아저씨라니 섭섭하게. 오빠죠, 오빠. 10살 차이면 딱 오빠 아닙니까?"


희성의 말에 다온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오히려 더 뻔뻔하고 짓궂은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배꼽인사를 했다.


"아이고~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몰라봤습니다. 어르신."


"오? 그럼 이제 누나 행세는 끝인 겁니까?"


다온이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네~ 그럼요. 오. 라. 버. 니?"


"......!!"


갑작스러운 '오라버니' 공격에 희성은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터뜨렸다.


"콜록! 콜록! 아, 아니... 훅 들어오시네."


"왜요, 오라버니? 싫으세요? 오라버니~ 저도 곶감 하나만 주시지요~"


"자, 잠깐만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적응 안 됩니다!"


다온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희성을 놀려대자, 희성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달빛 아래, 10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밤공기에 퍼졌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희성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때, 눈치 없는 바름이가 알림을 띄웠다.


[크흠. 배터리 잔량 3%. 절전 모드로 전환합니다. 저는 자러 갑니다. 흥!]


다온과 희성은 갑작스러운 바름이의 질투 섞인 멘트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이제 막 급속 충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서로의 심장 박동수가 120~130BPM 유지하고 있었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