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0화. 그들이 들려주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

서로의 편지로 주고받는 마음과 그들의 역할

by 유블리안



두 사람 모두 넋을 놓은 듯했으나, 그 빛은 사뭇 달랐다. 장영실의 눈에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경이(驚異)와 흥분이 불꽃처럼 타올랐고, 성삼문의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사유(思惟)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용상에 앉은 이도(李祹)가 그 둘을 꿰뚫어 보듯 나직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이리 다르니, 같은 것을 보고 온 것이 맞느냐?"

기다렸다는 듯, 장영실이 엎드린 채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 그곳은 실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듯한 기술의 세상이었나이다! 유리탑은 구름에 닿았고, 말 없는 마차는 바람처럼 달렸으며, 거대한 새는 사람들을 싣고 구름 위를 날았나이다! 소신이 평생을 바쳐 만든 발명품들은… 그저 아이들 장난감 수준일 뿐이었사옵니다!”


기술자의 경외감 섞인 보고가 끝나자, 이도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돌려 침묵하는 성삼문을 보았다.


“삼문아. 그대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느냐. 저 기술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던가?”

성삼문이 고요히 고개를 들었다.

“전하, 그가 본 기술들은 허공에 뜬 신기루가 아니었나이다. 그 모든 것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글이었습니다. 밤하늘보다 많은 글자들이 빛이 되어 도시를 밝혔고, 모든 백성이 손바닥만 한 서책(書冊)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실시간으로 읽고 있었나이다.”

그의 말에 장영실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맞사옵니다, 전하! 그 손바닥만 한 옥판(玉板) 하나로 집을 사고, 쌀을 사고,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더이다! 그 안에 적힌 것이 모두 글자였습니다!”

성삼문이 다시 고요히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글자는… 왕족도, 학자도, 아녀자도… 모두가 같은 글자를 쓰고 있었사옵니다.
신이 전하의 곁에서 만들었던, 바로 그 스물여덟 글자로 온 세상이 소통하고 있었나이다.”

그의 말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장영실이 말을 거들었다.

“전하, 더 놀라운 것은 그 백성들은 서로 간의 대화보다는 필답(筆答)으로 많은 소통을 하고 있었나이다. 함께 마주 보고 있어도 작은 옥판에 글자를 새겨 넣고 표정을 그림으로 넣어서 주고받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장영실의 보고에 이도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성삼문은 그 기색을 읽고 말을 이었다.

“하오나 전하,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옵니다. 미래의 백성들은 전하께서 글자를 반포하신 날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었사옵니다. 해마다 열 번째 달, 아흐렛날이 되면 온 나라가 일을 멈추고 그날을 기렸습니다. 그들은 그날을 ‘한글날’이라 부르며,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든 성군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뜻을 되새기는 가장 큰 명절로 삼고 있었나이다.”

‘한글날’. 그 낯선 단어에, 늘 굳건하던 이도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의 진심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백성들에게 온전히 닿았다는 사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 성삼문이 무언가 결심한 듯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그의 표정에는 감격과 회한이 뒤섞여 있었다.

“전하… 소신, 외람되오나 그곳에서 소신의 이름을 찾아보았나이다. 소신의 이름 앞에는 ‘사육신(死六臣)’이라는 멍에가 씌워져, 평생을 바친 학문보다 죽음의 절개만이 남아 있었사옵니다. 허나…”

성삼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하의 존함은 함부로 부르는 이가 아무도 없었나이다. 후대의 왕들이 전하께 ‘세종(世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더이다.”

이도가 나직이 되뇌었다.

“세종…?”

“예, 전하. ‘세상 세(世), 으뜸 종(宗)’. ‘한 시대를 연 가장 으뜸인 임금’이라는 뜻이옵니다. 그 이름 뒤에는 ‘대왕(大王)’이라는 존칭을 붙여,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계셨나이다. 소신의 이름이 죽음의 그늘에 갇혀 있을 때, 전하의 이름은 글자의 빛이 되어 영원히 빛나고 있었사옵니다. 결국… 전하의 ‘마음’이 이긴 것이옵니다.”

성삼문의 고백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도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마침내 흘러내렸다. 기술의 성취와 인문의 승리, 두 신하의 보고가 하나의 감격이 되어 왕의 마음에 닿은 순간이었다.

이도는 손등으로 조용히 눈물을 닦아냈다. 감정을 추스른 그는, 지친 듯 그러나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사람에게 묻겠다.”

“예, 전하.”

“그리… 글로서 소통하고, 기술로써 풍요로워진 나의 백성들은… 진정 행복해 보이더냐?”

​이도의 마지막 질문에, 경이로 가득 찼던 장영실과 고뇌에 잠겨 있던 성삼문이 나란히 침묵에 빠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장영실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의 흥분과 달리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하... 그들은 풍요로웠으나, 고단해 보였사옵니다. 밤에도 대낮같이 밝았으나, 잠들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나이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늘 소통할 수 있었으나, 저마다 작은 옥판 속에 갇혀 외로워 보였사옵니다."

​성삼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하, 글은 넘쳐났으나, 그 글 속에 담긴 진심은 옅어 보였사옵니다. 기술은 빨라졌으나,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조급 해졌사옵니다. 허나..."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소매 속에서 두툼한 편지 봉투를 꺼냈다. 희성이 전해달라 부탁했던 바로 그 편지였다.

​"이것을 읽어보시면, 그들이 진정 행복했는지 아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미래에서 온 두 아이가 전하께 올리는 서신이옵니다."

​이도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아 들었다. 낯설고 매끄러운 2025년의 종이.
그 위에 반듯하게 적힌 훈민정음이 이도의 눈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하께 올립니다.
전하, 저희(희성, 다온)는 전하의 글자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약속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여 만드신 그 글자가, 500년 후 저희에게 사랑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비록 저희 세상은 빠르고 고단하지만, 전하의 글자가 있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록하고, 기억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전하. 이 글자를 우리에게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편지를 다 읽은 이도의 얼굴에,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가장 환하고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임금의 미소가 아닌, 자식의 행복을 확인한 아비의 미소였다.

​"그래... 그럼 되었다. 그들이 행복하다면... 내 고단했던 모든 밤들이, 헛되지 않았구나."



같은 시각, 2025년의 서울.

희성과 다온은 연구실 창가에 나란히 서 있었다. 희성의 손에는 성삼문이 떠나기 전 건네준, 꼬깃꼬깃해진 낡은 한지 편지가 들려 있었다.

​"이게... 전하께서 남기신 편지..."

​다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종은 다온과 희성이 돌아갈 채비를 하던 때, 성삼문 편에 미리 이 편지를 맡겨두었던 것이다.
​희성이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묵향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종이 위로, 임금의 고뇌와 따뜻한 진심이 담긴 글씨가 정성스럽게 담겨있었다.

​[나의 벗, 다온과 희성에게.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무사히 너의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뜻이겠구나.
나는 가끔 밤하늘을 보며 상상하곤 한다.
후손들이 사는 그곳은 과연 어떤 세상일지.
​그곳의 백성들도 나의 글자로 마음을 나누고 있느냐.
신분이 다르다고 하여 억울한 이가 없고,
글을 모른다고 하여 까막눈이라 설움 받는 이가 없느냐.
​나는 보지 못할 세상이지만, 나의 글자만큼은 그곳까지 닿아
너희의 삶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부디 너희의 세상에, 따뜻한 바람이 머물기를 바란다. - 이도(李祹)]

​다온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희성의 품에 안겼다.
세종은 미래를 알지 못했지만, 미래를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5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전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희성 역시 붉어진 눈시울로 편지를 가슴에 꼭 품었다.

​"우리가... 답을 해드린 거야. 전하의 글자가 등불이 되었다고."

​창밖으로 2025년의 봄바람이 불어왔다.
거리의 수많은 한글 간판들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온은 조선에서의 10년을 바탕으로
칼럼니스트가 되었고,
사람과 시대를 읽어내는 문장으로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그녀의 글에는 언제나
조선의 바람과 현대의 빛이 함께 머물렀다.
글자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이 다시 글자를 살린 이야기.

그렇게, 이들의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오래도록 남았다.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시간을 건너온 사람들의 모험담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오래된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조선의 백성들은 어리석어서 침묵했던 것이 아니라,
말을 적을 수 없어서 침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종과 집현전은, 그 침묵을 구조적으로 바꾸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글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존엄을 지키는 가장 작은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그리고 깊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희성과 다온, 장영실과 성삼문은
모두 다른 시대의 사람이지만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람으로 남는가.’

그 답은 언제나,
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기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조용히 말하고 싶었습니다.

20회의 시간을 함께 걸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글자가,
여러분들의 오늘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때로는 공감이 가고 때로는 어색한 문장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진정 어린 글을 사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작가 유블리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