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바람이 후손에게 전해지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소리와 마음을 담은 진심

by 유블리안


[2025년, 서울]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과 규칙적으로 배열된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시야를 채웠다. 코끝을 스치는 소독약 냄새, 등 뒤로 전해지는 기계의 미세한 진동, 그리고 귀에 익은 인공지능 ‘바름’의 부팅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현실이었다. 희성은 옆에서 느리고 깊은숨을 내쉬는 다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늘게 떨리는 손끝에 아직도 조선의 거친 종이 섬유가 만져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돌아왔사옵니까?”


나직한 물음 끝에, 그녀의 말꼬리가 스르르 풀리며 웃음으로 바뀌었다.


“아니지. 이제는 ‘돌아왔네?’가 맞겠죠, 서방님.”


“그렇지. 여기는 2025년. 그런데 마음의 호칭은 쉽게 바뀌지가 않네요.”


희성이 마주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에 십 년의 세월과 600년의 시간이 함께 녹아 있었다. 그때였다.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시공간의 창이 불안정한 스파크를 튀기며 다시 열리는가 싶더니, 요란한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이 그들 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쿵, 쾅, 아악! 연구소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아니, 다온 낭자, 희성 군! 이게 어찌 된 영문이오?”
“허허, 장영실 대감까지 여기에 함께 오다니. 내 평생 이리도 황당한 일은 처음 겪소이다.”


먼지를 털며 일어선 것은 놀랍게도 성삼문과 장영실이었다. 둘은 영문을 모른 채 휘황찬란한 연구소를 둘러보며 서로를, 그리고 다온과 희성을 번갈아 보았다. 예상치 못한 동행이었다. 희성은 짧은 충격에서 벗어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 2025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단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설명한 희성은, 그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옷과 음식을 내왔다. 장영실은 난생처음 보는 음식 ‘피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심각하게 분석했다.


“이 둥글고 평평한 전병은 참으로 기이하구나. 위에 올린 채소와 고명은 흩어지지 않도록 누런 빛깔의 고약(膏藥)으로 붙여 놓은 겐가?”


그가 조심스럽게 치즈를 들어 올리자 쭉 늘어나는 모양새에, 옆에 있던 성삼문이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으허, 음식에서 저리 길고 끈끈한 실이 나오다니! 필시 요물일세!”


희성과 다온은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희성은 이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들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런, 이 고풍스러운 복식으로는 문밖을 나서기도 힘들겠군요. 저희가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희성이 건넨 것은 말끔한 현대식 정장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옷감과 형태에 어리둥절해하던 장영실이 넥타이를 집어 들고는 익숙하게 발목에 묶으려 하자, 희성이 급히 말렸다.


“대감! 그건 대님이 아니오. 머리에 두르는 끈이란 말이오.”


그는 천연덕스럽게 넥타이를 장영실의 이마에 질끈 묶어주었다. 영문을 모르는 성삼문과 장영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희성과 다온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 조선에서 낯선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당했던 소소한 장난들을, 이렇게 유쾌하게 되갚아주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네 사람은 잠시 바람을 쐴 겸 연구소 근처 공원으로 나섰다. 모든 것이 신기한 성삼문과 장영실은 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벤치에서 한 외국인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엉엉 울고 있었다. 다온이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아이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모두가 답답해하던 순간, 장영실이 다가갔다. 그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로 바닥에 웃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는,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가 저 멀리 한 방향을 가리키며 ‘엄마?’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진심 어린 몸짓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그들이 가리킨 방향에서 애타게 아이를 찾던 엄마가 달려왔다.


연구소로 돌아오는 길, 다온이 나직이 속삭였다.


“전하는 늘 말씀하셨지요. 글은 소리를 품고, 소리는 사람을 잇는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의 기술은 소리는 전해도, 그 안에 담긴 마음까지는 잇지 못하는 것 같아요. 방금처럼요.”


그녀의 말에 성삼문이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만드신 위대한 글이 수백 년 뒤에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로울 뿐이오. 이왕이면, 그 글에 담긴 마음까지 전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희성의 눈이 빛났다. 그는 곧장 노트북 화면에 새로운 프로젝트 이름을 적었다.


“Project ‘바람글’. 바람이 소리 없이 지나간 자리에도, 온기가 담긴 글자가 남게 합시다.”


그렇게 그들의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었다. 단순히 언어를 번역하는 것을 넘어, 소리를 보고 글을 듣는 시스템. 낯선 이의 서툰 발음 속에서도 그 사람의 표정과 맥락을 함께 읽어, 그 안에 숨은 진심을 번역하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이었다. 연구는 쉽지 않았다. 성삼문의 언어철학적 접근과 희성의 데이터 기반 접근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아무리 많은 자료를 학습시킨다 한들, 언어의 ‘격’과 ‘온도’를 기계가 어찌 알겠는가! 원칙 없는 데이터는 허상일세.”
“대감님, 원칙만으로는 변화하는 언어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실제 사용되는 용례가 중요합니다!”


격렬한 토론 끝에, 그들은 장영실의 아이디어로 돌파구를 찾았다. 바로 ‘상황과 감정’이라는 변수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장영실의 시대를 초월한 공학적 직관이 더해지자, 마침내 그들의 꿈은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바름은 그들의 지식과 열정을 먹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언어의 대가였던 성삼문은 한글을 익히는 속도가 남달랐다. 어느 날 인터넷이라는 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았던 그는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성삼문 : 아이를 낳기 전에 "낳았느냐?"는 물음을 세 번이나 듣고 나서야 낳았다고 하여 三問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으며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사육신의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고 후대에 복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역사적으로 평가되는 것을 두고 아쉬워했다.


시간여행 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미래를 어느 정도 보고 왔던 그는, 단종을 복위시키려 한 이유가 조선의 유학자로서 뿌리 깊게 간직했던 충의(忠義) 사상과 신념 때문이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마침내 긴 겨울이 가고 봄날, 그들의 노력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작은 현판식이 열렸다.


[바람글 연구소 (Windscript Institute)]



사회자가 “두 분 대표님,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라고 재촉하자, 희성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과거의 우리는 하늘의 빛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돌고 돌아 깨달은 것은, 우리가 정말 붙잡아야 했던 건 빛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온이 그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낯선 말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자주 닫힙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도 표정과 몸짓에서 서로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고, 저는 조선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배웠습니다. 저희 ‘바람글’은 조금 느리더라도, 더 바르고, 더 따뜻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걷겠습니다.”


현판식이 끝나고, 성삼문과 장영실은 희성과 다온을 마주했다.


“허허, 우리 후손들이 이룬 세상을 보니 더없이 기쁘고, 우리의 작은 업적이 이토록 위대한 역사의 주춧돌이 되었다니 자랑스럽소. 전하께는 이 기쁜 마음을 가득 담아 전해 드리리다.”


바름의 도움으로 둘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낼 준비는 끝나 있었다.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저녁, 희성과 다온은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피자를 나눴다. 문득 다온이 희성의 벨트를 가리키며 장난스레 웃었다.


“혹시… 오늘은 이 대님을 머리에 묶어 드려야 하옵니까?”


희성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제발, 오늘은 현대식으로 합시다.”


둘은 한참을 마주 보며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희성이 조용히 작은 상자를 열어 반지를 내밀었다. 반지 안쪽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바람이 머문 자리.'


다온의 눈에 천천히 이슬이 맺혔다. 그 순간, 그들의 감정을 읽은 바름이 조용히 스스로의 전원을 껐다. 어떠한 번역도, 기술적 개입도 없이—마치 둘 사이에 흐르는 고요한 시간만을 오롯이 기록하려는 듯했다. 밤의 창문을 열자, 서울의 도시 바람이 한 편의 문장처럼 흘러들었다. 조선에서 배운 느림의 가치가, 2025년의 숨 가쁜 속도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기를. 어느 날 문득, 세상 저편의 누군가 낯선 언어로 “안녕하세요”라 적어 보낸다면, 그 말의 뒤쪽에 숨은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읽어 줄 수 있기를.


바람은 스쳐 지나가도, 마음은 그 자리에 남는다. 글자는 그 마음을 고이 품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글자를 다시 사람에게 건넨다.



희성은 노트북 모니터를 응시하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드디어 끝났다.”


주방 쪽에서 요리를 하던 다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이제 식사해야죠. 그런데 이번 소설은 너무 리얼하게 쓴 거 아니에요? 이거 다큐멘터리예요, 소설이에요? 호호호.”


그녀는 남편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희성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반반이야. 하하하.”


그때 거실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장인인 강진묵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유 서방, 자네는 내 이름을 ‘강진묵’ 석 자나 써놓고, 달랑 대사 한 줄인가? 이거 너무하구먼, 허허허.”


희성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장인어른, 그래도 그 한 줄 안에 사위의 진심을 전부 담았습니다.”


강진묵은 한 박자 쉬고 나서 크게 웃었다.


“허, 그 말은 제법 마음에 드는구먼.”


조금 뒤, 무슨 일인가 싶어 사춘기 아들 이연이 제 방에서 나왔다.


“아들, 아빠가 새로 쓴 소설인데 한번 봐줄래?”
“…………좋네요.”


이연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들의 목소리였다. 희성은 그 뒷모습에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반응이라도 해줘서 고맙다, 이 녀석아.”


다온과 희성은 서로를 마주 보며 조용히 웃었다. 거실 한쪽, 희성의 노트북 위엔 ‘조선의 바람이 머무는 동안’이라는 제목이 여전히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장영실, 성삼문, 그리고 세종대왕이 모든 이야기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 곁에서, 인공지능 스피커 ‘바름’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행복한 가족 모드… 인식률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