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의 시작과 끝
가끔은 시작보다
끝이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中 -
무언가를 끝낼 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다. 결과물을 통해 과정을 평가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끝도 그 나머지 반이다. 첫 단추만큼 중요한 것이 끝매듭이다.
학교에서는 다양한 끝을 마주한다. 수업의 끝, 하루의 끝, 시험의 끝, 학기의 끝, 학년의 끝. 그 모든 끝에 또 하나의 꼬리표를 달게 된다. 어쩌면 학교는 끝내러 오는 것일까? 3년이라는 유한의 시간을 앞세워 다양한 헤어짐을 미리 배우기라도 하는 것일까? 마치 학생들은 떠나기 위해 입학하고, 교사들은 떠나보내기 위해 맞이하는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
모든 것의 끝이 종종 아프지만, 다른 곳에서의 끝보다 학교에서의 끝이 조금 더 잔인한 이유는 모두 계량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자아를 가진 인격을 정량화된 평가방법으로 수치화시키는 것은 교육의 수치일 수도 있겠다. 문득 학생들의 이름보다 숫자가 앞서 보이는 것이 교사를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이름은 생각이 안나도 숫자가 생각이 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시작은 늘 어색하지만, 끝은 다정하다. 누군가의 한 때를 책임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추억이 되는 일이다. 누군가의 공간에 함께 자리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오감이 되어주는 일이다. 그렇기에 끝이 돼서야 기어코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함께 보낸 물량의 시간이 채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마음이 헛헛하다.
교실 한편을 채색하는 햇빛. 정리되지 않은 청소도구함을 향하는 발걸음, 앞자리에 앉은 친구를 쿡쿡 찔러보는 장난기 가득한 손.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푹 숙인 얼굴들. 진심을 다해 감사함을 표현하는 눈망울. 죄송하다고 말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입술. 이번엔 못했지만, 다음엔 더 잘할 거라 다짐하는 수줍은 결의. 처음부터 봤으면 좋았을 것을, 교사이기 전에 어른으로서 미안하다.
서로 다른 세계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끝은 환희일까, 아쉬움일까. 아니면 조금 더 깊은 감정일까. 학창 시절이라는 누군가의 한 때를 함께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채롭지 못했던 시간들이 흩뿌려진다. 우리의 세계가 끝맺는 추운 2월에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미소를 뗘도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