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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ul 07. 2022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내가 수많은 경계를 넘는 이유 (1)

본업이 뭐예요?



당황하게 되는 질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물었는데, 나도 나에게 물어본다. '그러게, 나는 무슨 일 하는 사람이지?' 하는 일은 많은데, 무어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나 자신을 단순히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경계를 넘나들었다. 내가 봐도 조금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한 장 남아있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서의 사진. 부끄럽다.



첫 번째 경계선은 중학생에서 체육 특기생으로서의 선택으로 시작되었다. 중학교 1학년, 빙상부 감독 선생님이셨던 체육 선생님께 눈에 띄어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경기도 파주시, 시골 끝자락에 있는 작은 중학교에서 당시 비인기 종목이었던 '스피드 스케이팅'이라는 운동을 만나게 된 것은 그저 행운이었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래에 비해 운동신경이 좋았으나, 운동선수로서 14살은 너무 늦은 나이였다. 게다가 16살에 발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고, 1년의 재활 치료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얼음 위에서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발목을 보며 4년의 시간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스케이트장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나를 학생으로 받아 주지 않는 반면교사들이었다. '체육특기생'이라는 딱지로 받아야 했던 시선은 열일곱 살이 받기에는 너무 따가웠다. 






4년의 정규 교육과정을 통째로 스킵한 고등학생이 헤쳐나가야 할 길은 꽤나 벅찼다. 양도 양이지만, 방법을 몰랐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를 전혀 몰랐다. 손에 펜을 들었던 기억은 매일 밤 운동일지를 쓴 것이 전부였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였다. 단순히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는 나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놓아버린 공부에 비례하여 학교 생활은 재밌게 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며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들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일주일에 6번을 노래방을 갔고, 야자시간마다 몰래 배드민턴을 쳤다. 피구가 너무 재밌어서 어깨 인대가 늘어날 정도로 했다. 고2 때는 1년 내내 지각을 해서 방과 후에 B4 용지에 꽉 채워 글쓰기를 해야 했다. 친구들과 야무지게 노는 모습을 보던 담임 선생님은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하니 지방에 있는 경영학과에 지원해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등 떠밀려 하나의 경계선을 넘었다.






소위 '뒷머리'가 트인다는 사람들이 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성인이 돼서야 공부에 흥미가 생긴 사람들을 말한다고 한다. 내가 딱 그랬다. 경영학 공부는 내가 10대에 해소하지 못한 지적 욕구를 단숨에 해결해주는 학문이었다. 전공이 재밌으니 교양도 재밌었고, 타 전공도 재밌었다. 그냥 공부가 무작정 재밌었다. 책도 무섭게 읽었다. 지금 와서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심한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채워진 게 하나도 없는 공허한 스무 살이었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체할 것처럼 공부를 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열심히 보낸 대학생활이었다. 


휴학 1년을 포함한 5년의 대학생활의 끝자락에 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시간이 나의 시간이 아닌, 나의 삶에서 하나의 큰 변곡점을 맞이할 경계선 앞에 서게 된다. 신기루 같은 4월이었다. 






펜으로 쓰는 글씨는 못쓰는데 분필로 쓰는 글씨는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다.



26살. '교사'라는 수식어가 내 이름에 붙었다. 근사했다. 한평생 꿈꿔온 꿈도 아니었는데, 꽤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가진 많은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선택한 일이라 더욱 귀했다. 긴장되고, 두렵고, 떨리고, 어리숙하고, 부담스럽고, 어렵고, 부족했지만 그 모든 감정을 뒤엎는 대단한 무언가가 있었다. '교육'은 적어도 나에게 그랬다. 누군가 나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교육은 '행복하기 위함'이기에, 나 역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냥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 될 줄 알았다. 



교육계의 최대의 이벤트, 스승의 날. 서로를 속고 속이는 숨 막히는 심리전의 날이다.



나는 어떤 것에서 무력감을 느낄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서 나는 크게 무너진다. 교사로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은 절대적이었다. 학생들의 가정사가 그랬고, 학교의 시스템이 그랬다. 교육의 정책이 그랬고 나 스스로가 그랬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나의 교육은, 진짜 나의 교육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직 6년 차. 몸은 이미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고, 처음 느껴보는 우울감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학기 중간에 휴직을 들어가야 했고, 그 선택이 하나의 경계선인 것은 그땐 몰랐다.






수많은 물음표를 안고 들어온 고요한 집이었다.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떻게 가르쳤는지, 아니 그전에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타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지. 나는 그동안 어떤 모습의 교사였는지, 진짜 교사가 맞는지, 아니 그전에 교사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 질문들에 1년이 흘렀다. 여전히 명쾌하지 못한 정답에 분명한 것 하나만 붙잡았다. 학교에는 나의 미래가 없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진짜 교육을 위해서는 또 한 번 경계선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꼬박 2년이 걸렸다. 2년 동안 가족들의 도움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질적인 공간, 낯선 책과 영상을 통해 다소 편협적이었던 시선을 넓히고, 생각의 기준점을 바로 잡았다. 깊게 자리 잡은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내는 것도 하나의 숙제였다. 


무소속의 '나'. 20대에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어느 곳에서도 소속되지 않은 내 이름으로서의 가치. 내 이름만으로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그 가치를 통해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궁극적으로 내 삶에서의 마침표는 무엇일까? 꾸준한 질문에 서투른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경계선을 넘을 시간인 것이다. 



새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3월, 

나는 파주 출판단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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