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02
친구란 무엇일까. 진정한 친구 세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는데, 과연 나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진정한 친구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난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나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상황도 있다. 그 어떤 계기로 둘도 없이 친하던 친구가 다시는 안 보게 되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일까. 아니면 나의 부족한 점을 일깨워 주며 따끔한 충고도 서슴지 않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일까.
공자는 강직한 사람, 신의가 있는 사람, 견문이 넓은 사람을 유익한 친구로 꼽았고, 굽실대는 사람, 뒤에서 비방하는 사람, 말만 앞세우는 사람을 해로운 친구라 했다. 스스로를 어떤 사람인지 냉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사실 자신을 잘 모른다. 괜찮은 인간이길 지향할 뿐, 삶은 늘 괜찮음과 안 괜찮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나를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시기와 질투, 욕심, 무시, 분노 따위의 감정으로 관계를 그르치고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게 삶이 아닐까. 그러면서 성장하는.
옴니버스 TV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우정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다뤄진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예쁘고 인기가 많았던 고미란과 따돌림 받던 하지만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어가는 정은희의 이야기다. 둘은 하나뿐인 친구, 절친이었다.
미란은 어려서부터 은희를 챙겼고 은희는 미란에게 고마워한다. 은희는 어떤 상황에서도 미란의 일이라면 쫓아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은희는 미란을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면서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로 여겼다. 모두가 은희를 무시하고 따돌리던 어린 시절 자신을 감싸주던 고마운 친구니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억척스럽게 생계를 책임지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인내하는 삶만 살아왔기 때문일까. 미란에게 은희는 자신의 섭섭한 속마음을 결코 표현하지 않는다.
미란은 은희가 자신을 제멋대로인 친구라고 생각할 줄은 까마득히 몰랐다. 그저 세 번의 이혼 뒤 딸의 졸업식 참석마저 거부당한 외로운 미란은 늘 그 자리에 있던 은희에게 위로받고 싶었을 뿐이다. 우연한 기회에 은희가 쓴 일기장 속 진심을 알게 되자 미란은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말한다. ‘말을 했어야지, 혼자서 끙끙 앓을게 아니라 그게 친구지.’라고.
은희와 미란의 우정을 보면서 문득 삼십년 전, 대학 졸업반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고교시절 친구를 만났다. 은희와 미란처럼 그렇게 절친은 아니었지만 착하고 바른 그 친구에게 나는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둘 다 서울생활의 고단함,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우리는 자주 만났고 의지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관계는 끝났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방식이나 가치관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스물다섯이 채 안된 나이에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강남의 아파트에 기거하며 고급 양주에 명품 옷, 가방을 자랑스러워했다. 집에 초대되어 고급양주를 마시며 스물다섯도 안 된 이들이 나누던 대화는 곧 무미건조해졌다. 종로의 피맛골에서 고갈비 시켜 놓고 막걸리 마시며 왁자한 분위기 속에 있어야 하는 나였기에, 그 친구와의 만남이 곧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졌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원론적이고 근본적이며 때로는 답도 없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를 친구는 곧 지겨워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어떻게 고급아파트에 거주하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묻지 않았다. 정작 궁금했던 것은 그거였는데 그 질문을 하는 순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답들이 돌아올까 무서웠다.
대학교 1,2학년 이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또 다른 고교시절 친구는 나이 서른이 넘어 TV에 출연한 것을 보게 되었다. 꽤 유명인사가 되어 처음에는 연락을 망설였지만 너무 궁금했다. 고교시절 꿈을 함께 나누며 이런저런 애기들을 나눴던 그 숱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SNS로 안부를 전했는데, “누구신지?”라고 물었다. 충격이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다니. 고등학교 시절 매일 밥을 같이 먹고 대학 입학 후에도 가끔 만나 누구보다 대화를 많이 했던 친구였는데, 누구냐고 묻다니. 혹시 내 이름을 잘못 썼나 싶어 다시 들여다봤다. 십년도 넘었으니, 또 동명이인도 많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나는 바로 그 친구와 나만이 알만한 정보를 나열해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이렇게 왔다. ‘그런 이야기로 연락을 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네요.’라고. 소속사에서 그렇게 글을 써서 보냈건 그 어떤 이유였든 나는 바로 SNS 친구를 끊었다. 몹시 실망했던 나는 그때에도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중학교 절친들과의 연락이 끊어진지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다. 대학 시절 새벽에 술 먹고 전화해 안부를 묻고, 과거 시시콜콜한 추억을 읊어댔으니, 매일 만나는 친구들도 아니고 그걸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라. “이제는 전화하지 말라.”는 그 친구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순간 한없이 서운했던 내 감정이 한동안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서운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젊은 시절 나는 나를 표현하기에 바빴지 정작 상대방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렀던 것 같다. 상처가 될까봐, 내가 상처받을까봐 애써 외면했던 건지도 모른다.
명품을 자랑했던 고교시절 친구는 아마 한심해 하는 나의 속마음을 느꼈 을거다. 말이든 행동이든 그 어떤 형태로든 뜨거웠던 이십대 청춘의 내가 그 친구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짜고짜 SNS로 연락했던 유명해진 고교시절 친구는 내가 연락하기 이전에 벌써 나를 손절한 건지도 모른다. 매년 방학에 고향에서 만나자했던 약속을 내가 먼저 지키지 않았으니깐. 학보에 자신의 근황을 써 보냈지만 뭐가 그리 바빴는지 나는 답하지 못했으니깐, 그때 이미 나를 떠났을지 모른다.
그리고 곤히 잠들 새벽시간 전화해 넋두리를 한 중학교 시절 친구는 나를 자기 멋 대로인 사람으로 생각했을 거다. 답답한 시골에 있지 말고 서울로 오라는 식의 내 말에 은근히 불쾌했을지도 모른다. 친구의 청춘이 아득한 암흑인지, 뜨거운 불구덩이인지 나는 전혀 묻질 않았고 내말만 했던 거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 이십년이 넘게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중고교 시절 친구들과는 달리 여전히 좋은 만
남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과 늘 평온하고 좋기만 했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론 서운하고 때론 화도 나고 때론 밉기도 했던 것 같다. 무슨 일들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별거 아닌 일이 태반이었을 거다.
시간이 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해 또다시 한자리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중고교 시절 친구들과 다른 점은 우리는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화가 났으면 화가 났었다고 말하고 난 뒤에 그냥 그 일은 까마득히 잊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억지로 기를 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게 진짜 친구라고 말이다. 변화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의 마음을 진솔하게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이러니 너도 그럴 것이라는 가정만큼, 과거의 모습으로 현재를 단정 짓는 것만큼, 폭력적이거나 일방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이십년 지기 친구들은 나의 직선적인 성격을 바꾸지 않으면 다른 사람 인생을 망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의 말이 섭섭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내내 충만한 느낌을 갖는 이유는 뭘까.
비단 세월과 함께 나를 객관적으로 말해주는 친구에게 서운해 하지 않을 마음의 여유가 생겨났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그들과의 만남이 있은 다음날 눈을 뜨면, 새로운 나로 변화되어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밤이다.
“모든 언행을 칭찬하는 자보다 결점을 친절하게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하라.”
Think not those faithful who praise all your words and actions; but those who kindly reprove your faults.
-소크라테스-
만약 누군가를 당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그의 진정한 친구임을 확신시켜라.
If you would win a man to your cause, first convince him that you are his sincere friend.
-에이브러햄 링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