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와 성장

essay07

by 유연

수년 전 지속된 기침으로 곤혹을 치른 경험이 있다. 중요한 회의나 세미나에서 모두 조용하게 발표자의 말을 경청하는 가운데 기침이 쉴새 터져나와 종종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만 했다. 얼마나 무안했던지. 잠잠해졌다가도 나도 모르게 기침이 자꾸만 터져나와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고 빈 사무실에 앉아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더 답답했던 건 주변에서 다들 어디 아프냐고 물었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동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선생님은 폐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종합병원에 가서 다시 정밀촬영을 해보겠다며 진단의뢰서를 끊었다. 우리나라에서 제법 크다는 대학병원을 두 군데나 골라 엑스레이를 찍고 CT도 찍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폐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폐암 등 끔찍한 병을 생각했던 내게는 크나 큰 안도이긴 했으나 그것도 그때뿐, 더 큰 불안감이 몰려왔다.

수개월간 계속된 기침으로 많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도 많이 위축되었다. 뭘 해도 집중이 안되었고, 다른 사람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니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헛소리를 하곤 했다. 어서 빨리 이 병을 낫게 하고 싶었지만 원인을 모르니 치료가 될리가 만무였다. 나도 모르는 큰병에 걸린건 아닌지 불안해 하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스르르 기침이 잦아들어 자연치유가 된 것으로 여겼다.


한참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었던 거였다. 식도로 위산이 타고 올라오니, 그 자극에 기침을 연신 쏟아냈던 것이다. 위 이상을 폐 이상으로 예단하고 진단하려했으니 당연히 원인을 알수가 없었던 거였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보며 설명을 하던 상담 의사선생님이 역류성 식도염을 앓았던 흔적이 있는데, 라고 말할때 갑자기 불현듯 기침과 연관이 있냐는 질문을 했다.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아, 나의 기침의 원인은 위였구나. 매년 꼬박꼬박 내시경을 하며 '위'라는 장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1년여 전 심하게 독감을 앓은 후 감기 한번 안걸렸던 내게 며칠 전부터 코감기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편도선으로 왔다가 바로 코로 옮겨갔다. 코로나19 자가진단 키트를 두번이나 해봤지만 음성이어서 다행이었지만 머리가 띵하고 눈물 콧물 쏟아지고, 감기약 때문에 졸음마저 쏟아지니 삶의 질이 바닥을 기고 있어 슬프다.


중요한 모임에서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의욕을 잃고 가만히 먹거나 얘기에 추임새를 넣거나 그러면서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 상대는 꽤 지루해하나보다 했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만나는 모임 중에 있는 그대로 편하게 할 수 있는 모임이 있는 반면, 거절하기 어려운 일적으로 얽혀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모임도 있다. 바로 이 후자의 모임이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프지만 않았으면 나는 더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내 의견을 말하고 심지어 표정도 지금보다 더 밝아서 좋은 인상을 줬을 텐데. 아프지만 않았다면 아까 그분의 말에 이런 내 의견을 밝혔을 텐데. 아프지만 않았다면 그 일을 기억해내어 분위기를 반전시켰을 텐데.

또 아프지 않았다면 벌써 그 책을 다 읽었을 텐데. 아프지 않았다면 보고서를 멋지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아프지 않다면 어디를 가던 발걸음이 가벼웠을텐데.....

감기가 다 나으면 지금껏 하지 못했던 일들을 더 잘 할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조금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일에서도 더 열심히 성과를 낼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 말이다.


새삼 예전에 할머니가 감기에 걸려 아픈 아이에게 '여물려고 아픈거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이는 너무 급하게 성장하는 바람에 울음을 달고 산다지만, 감기 걸린 아이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갑자기 아,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아픈 만큼 사람은 성숙해진다.라는 사실 말이다.


아플 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 건강해지려고 작지만 생활습관을 바꾸고, 아플때 못했던 일들도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니, 아픈만큼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말이다.

감기와 성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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