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낭비 감정낭비 연애썰 2

아닌건 끝까지 아닌 관계, 확신이 없는 관계

by 딱좋은나

그 회식 이후부터 그사람은 가끔 술에 취해 "뭐하니?" 하고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별 뜻 없이 오는 전화를 반가워하며 받아주다보니, 그사람의 휴무날에 맞춰 "만나자" 소리가 나왔다.

그사람은 차로 집 앞까지 나를 데리러 왔고, 유명한 부대찌개 맛집으로 안내했다.


평소와는 달리 술냄새가 아닌 향수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그사람을 통해서 나는 처음 불가리 향수를 알게 되었고, 부대찌개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사람을 만나는 횟수가 더해갈수록 철 마다 먹어야 되는 술 안주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사람과 함께일 땐 친구들과 먹는 것 보다 훨씬 비싼 안주를 골고루 먹었다.

돈 걱정이나 눈치 보지 않고 소주보다 더 비싼 백세주도 시킬 수 있었다.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나는 그사람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이 익숙해지고 편해졌다.

그사람과 함께 차를 타고 지나가다 깜깜한 부산의 밤 하늘을 밝히는 산 꼭대기를 보며 저기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었다.


"저기 유명한덴데. 한 번도 안 가봤어? 그럼 지금 가 보자!" 하며 차를 돌리던 그사람의 박력이,

그땐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인 게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해 다 맞춰주는 멋으로 보였다.

그사람 덕에 황령산 봉수대까지 가는 그 길이 연애 중인 사람들에게 드라이브 코스인지도 처음 알게되었다.


가난하고 내게 무언가를 해줄 수가 없는 남자친구와는 다름을 느끼며 아주 천천히 콩깍지가 씌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사람에게 어려서 순진했던 나는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집 앞까지 나를 공주처럼 잘 데려다주고 돌아간 그사람은 "잘 들어갔냐"는 흔한 안부 연락 한 번이 없었다.


그리고는 한두 달이 지난 후에 아무 일 없이 바로 어제까지 연락했었던 냥 다시금 다정하게 보고싶다는 문자를 보내거나 만나자, 나와라 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이 따위 태도가 절대 용납이 안되어야 하는데 나는 혹시나 그를 다시 못만날까 말도 못하고 그저 수용했다.

그사람에게 왜 연락 안하냐, 우린 무슨 관계나 한번을 묻지도 않고 그사람의 변덕을 받아들였다.

진작에 끊어내야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그가 들어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사람으로부터 더이상 연락해오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해하면서.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차에서 밤을 새워 함께 있기도 했다.

일, 학업, 학창시절, 가족, 친구나 직원 이야기 등 정말 많은 말들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가끔은 손을 잡기도 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와 나란히 걸으면 키가 큰 그는 언제나 나의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고, 어린아이를 대하듯 나를 귀여워했다.


딱 한 번, 그사람과 나를 지켜보던 그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이가 나에게 그사람은 아니라고 몰래 말했다.

아닌 거 안다고 했더니 두 번은 더 말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어쩌면 우리의 관계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늘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는 적지 않은 월급을 모두 술로 탕진하는 것인지 술자리가 참 잦았다.

그와 함께 각종 모임에 나가면 그의 주위에는 늘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마트 근무자들 뿐만 아니라 그의 고등학교 친구들도 만났고, 그의 대학교 친구들도 만났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누구냐 물었고, 또 다시 만난 사람은 그와 내 관계를 궁금해 했다.

일상을 살다 가끔 일탈을 하듯 우리는 연인이 아님에도 만났을 때 만큼은 남들 눈에도 연인처럼 보이는 사이였다.

우리는 매일 만나고 연락하지 않아도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옆자리를 지키는 연인처럼 굴었다.


그런 나와의 관계에 대해 뒤에선 그가 뭐라고 떠들고 다닌 건지 알것 같지만 정확히는 모른다.

어느 날, 그의 아는 사람 중 하나가 계속해서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며 대 놓고 물었다.


"아니 이런 자리에까지 같이 나온 거 보니, 이 분이랑 결혼이라도 하실 겁니까?"


"그럼, 해야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와는 달리, 망설임 한 번 없이 그에게서 yes의 대답이 나왔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그동안 무책임하고 비일관적인 그의 태도에 대한 서운함을 단박에 날려버렸다.

우리 관계에 진전이 있을 건가 싶었다.

그리고 그날도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온 이후 여전한 그의 태도를 보며 다시금 나는 혼자 애를 태웠다.


우리는 과연 무슨 사이일까, 그는 도대체 나를 무어라 생각하는 걸까.

머리로는 이미 다 알면서 가슴이 인정을 못했다.

한동안은 입만 열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인지 남들에게 묻고 다녔다.

나의 지인들도 같이 만났고, 그들도 그 사람의 애매한 태도에 답을 쉬이 내놓지 못했다.


이야기로만 들었을 때 너도 나도 다들 같은 소리를 했는데, 만나보면 또 나의 기대가 충분히 이해간다며 동조해줬다.

그래. 아닌 건 끝까지 아닌 건데 그사람이 연극을 잘 한 건지 내 주윗사람들도 핑크빛을 기대했다.

그렇게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들을 애써 회피했다.


꽤 긴 시간동안 지지부진한 관계를 이어가면서 그사람을 단호히 끊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구겨지고 찢긴 자존심이나마 지킨답시고 그사람이 열 번을 보자고 하면 내가 한두 번 정도 보자고 했다.

보고싶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술이나 마시자고 하면서.

나 역시도 이상하게 그 사람에게 솔직해지지 못했고 용감해지지 못했다.

내가 그를 보자고 할 때마다 마치 술 값에 나를 파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라도 그 사람이 보고싶었다.


닿았다 멀어졌다하며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사람은 진급을 하고, 더 큰 지점, 더 영향력 있는 부서로 옮겨갔다.

진급에 떨어지는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에도 그사람은 내게 연락을 해 위로를 받아갔고,

진급이나 부서 이동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나의 응원을 받아갔다.


심지어 그사람은 부친상을 당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당일에 내게 연락을 해 왔다.

본인이 직접 연락을 해온 터라 무시 하지 못하고 그의 직장동료들과 섞여 조문객으로 갔다.

그사람은 그의 어머니에게 소속이나 직급이 아닌 내 이름 석 자로 나를 소개 시켰다.

그의 어머니는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를 보셨다.

그 점이 조금 의아했지만 그 어떤 것도 티 내지 않고 그에게 묻지도 않고 위로만 전하고 나왔다.

왜냐하면, 나는 장례식장에 오는 동안 그의 직장 동료들로부터 듣지 않았어도 될 이야기를 이미 모두 들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사귄, 그가 죽도록 사랑한 여자와 헤어지고, 그가 다른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한다는 걸.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자신을 학대하고 혹사시키는 것이 도저히 맨 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정도로 떠난 전 여자친구를 사랑했어서라는 걸.


이미 다른 사람으로 마음이 꽉 찬 그사람에게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정거장이었던다.

버스가 노선을 돌고 도느라 지나치듯 되돌아가긴 하지만 그냥 지나치는 정거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놓지 못했다.

그사람이 끝을 말하지 않는 이상, 나는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편이 이어집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간낭비 감정낭비 연애 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