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은 김에 키웁니다 26
큰 딸이 새 학기를 시작하고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다이소를 가고 떡볶이를 사 먹고 마라탕을 사 먹고.
약속은 줄줄이 생기는데, 일주일에 2,500원을 주는 용돈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단원을 끝내면 2,000원을 받는 문제집 풀기를 시작한 것이다
(한 권에 1만원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하여 얼마 전 규칙을 바꾸었다.)
일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 처럼
우리집에서 공부하지 않는 자는 돈도 조금 밖에 못 쓴다.
문제집 한 단원을 급히 끝내고 돈을 받았다.
일단 돈을 주고 저녁에 문제집을 가져와 채점을 하다보니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야, 이리 와!"
앙칼진 목소리로 큰딸을 불러 앉혔다.
대분수의 곱셈을 하면서 가분수로 바꾸지 않고 약분 먼저하는 실수를 한 덕에 문제집 한 장 거의 전체가 줄줄이 비가 내렸다.
문제를 못 풀 수 있다. 실수를 하고 틀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화를 낸 대에는 단 한 가지 이유뿐이다.
바로 기본을 지키지 않은 것.
몇 번이고 개념에서 설명을 해준 내용이었다.
큰 글자 작은 글자 할 것 없이 안내를 하고 주의를 주며 강조를 한 내용이다.
반드시 가분수로 바꾸는 것을 먼저 하라고 가르치는 문제집의 글자를 싸그리 무시한 결과, 빨간색 줄이 줄줄이 그였다.
기본을 지키지 않은 책임은 엄마의 호된 잔소리와 구겨진 자존심으로 딸에게 돌아갔다.
딸은 쉽게 가려고 요령을 피우려다 제대로 걸려 된통 혼이 났다.
"하아...... 엄마.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
문제풀이를 다시 하며 큰 딸이 투덜 거렸다.
"나는 공부가 재밌어서 마흔 넘은 지금도 공부를 하는데, 넌 왜 공부가 싫은데."
"어렵고 힘들어. 하기 싫어."
"모르는 거 아는게 재밌지 어렵고 힘들어서 싫냐?
그래도 니 공부는 끝이 있잖아. 언젠가는 끝나니까 버텨.
싫어도 어째. 시작 했으면 끝은 내야지. 학교는 때려 치워도 공부는 해야한다. 알지?"
-종종 나는 딸에게 중고등을 검정고시로 친다면 외국에 나가서 몇 년 살다 오자는 소리를 한다.
그때마다 영어를 못해서 본인은 한국에서 살고 싶다며 큰딸은 거절 하고 있다.
"아니, 이 엄마야. 공부가 끝이 어딨어.
내가 직업을 가지려해도 그 직업에 맞는 기술을 배워야 하잖아.
우리 선생님이 공부는 끝이 없는 거랬어. 평생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고 했어."
딸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한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엄마도 선생님을 하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식이었다.
"학교 졸업하고부터 공부는 선택이잖아.
공부도 배움도 다 니 선택으로 하는 거잖아.
기술이든 뭐든 배우다 어렵고 싫으면 관두면 되지."
"관두고나면 후회할 건데?"
"후회할 거면 그만 두지 말고 계속 해야지. 싫어도 해야지."
"거봐. 그러니까 평생 공부 해야하는 거잖아."
"무조건 해야하는 공부랑 선택할 수 있는 공부는 다르지. 안그래?"
"그렇긴 해."
"평생 직업이 어딨어. 엄마도 아빠도 벌써 직업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근데 다 자기가 배우고 익힌 걸로 벌어 먹고 살잖아."
"엄마 아빠는 기회를 잘 잡은 거지."
"아니, 기회는 나 기회다 하고 오지 않아.
지나고 나니까 아, 그게 기회였구나 하는 거지.
준비가 되어있어야 기회도 잡을 수 있는 거야.
너는 지금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공부를 하는 거고.
어른 되서 뭐해먹고 살 지는 니가 정하고 또 배워야지.
근데 지금 너는 이 문제나 제대로 다 푸세요.
니 나이에 공부는 그만두는 선택도 못해. 무조건 해야 돼."
"치이...................."
투덜 거리면서도 엄마가 옆에 앉았다고 그래도 곧잘 풀어낸다.
집중한 딸을 보니 기특해서 쓰담쓰담 머리를 만져줬다.
그랬더니 헤헤 웃으며 나를 본다.
금새 기분이 좋아진 딸은 신바람나게 문제를 빠르게 다 고쳤다.
"공부 싫다면서 잘만 하네.
하고 싶은데 머리가 안따라주고 몸이 안따라줘서 못하는 애들도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공부 할 수 있는 것만도 넌 감사하게 생각해."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잘 된 거야."
"웃기시네.
그리고 하기 싫은 마음을 다 잡는 것도 연습하고 배우는 거야.
기분 좋고 집중 잘 되고 상황 좋을 땐 누가 못해.
어렵고 힘들고 하기 싫을 때도 해내는 게 공부지. 그건 진짜 평생 배워야 한다."
"평생 공부해야되는 거 진짜 싫다."
"평생이라도 죽으면 끝나. 죽으면 배우고 싶어도 못 배워. 그러니까 즐겨.
엄마는 아무것도 안하고 맨날 공부만 하라고 하면 좋겠구만.
누가 너더러 공부 잘 하라 하냐?
딱 기본만, 할 때 집중해서 열심히 후딱 하고 끝내고 놀아."
"알았어. 나 이거 다 고쳤으니까 이제 잔다."
큰딸은 손을 씻고 양치를 하고 혼자서 이부자리를 정돈한 뒤 스스르 잠이 들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대화가 통한다.
부모 말은 반기부터 드는 예삐랑 달리 내가 뭘 말 하면 들어는 준다.
그리고 날 많이 닮은 얼굴로 잠이 든 큰 딸을 보며 새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어서 이렇게 내 딸에게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것에 대해 모범이 되고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어서.
아직 어린 내 딸이 내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을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끔 이런 답 없고 결론 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 시간이 딸의 생각도 키우고 나의 생각도 덩달아 키운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