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도장기능사 도전의 이유2
별 걸 다 하는 중입니다
● 나로 인해 새로이 시작된 그의 과거●
서울 살던 남자가 영화 촬영 차 내 고향 부산에 왔었다.
영화만 찍고 가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사랑에 불씨를 던져 버리고 그는 이내 부산을 떠났다.
잘 만나던 사람이 있음에도 사귀자는 소리를 안한다고 내다버릴 정도로 남편이 더 잘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 막연히 꿈꾸던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로망을 억지로 영화에 연결 시켰던 것 같다.
부산에서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생소한 직군의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리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호기심에서 그치지 못하고 푹 빠져버린 그놈의 사랑이 뭔지,
달라도 너무 다른 그와 멀어지지 못해 헤어지지 못해 우리는 결혼을 했다.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한 세상에서 살던 상대 여자 나는
그의 유동적인 일과 굴곡 많은 급여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계획 없이 허니문 베이비까지 생겨 나와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는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 했다.
한 번 그 바닥을 벗어나면 어지간해서는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그는 어떻게 해서든 영화판에서 버텨보려 했지만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시작하고 유지한 결혼 생활이라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임신 후기가 되어 내가 일을 그만 둔 후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때는 정말 안되려고 해서 그런지,남편이 하려고 하는 일마다 자꾸만 어긋나고 엎어졌다.
그래서 결국 남편은 종편 개국으로 일감이 많아진 드라마판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회사에 묶인 몸이 되다보니 그제야 저를 찾는 영화판 사람들의 부름에도 갈 수 없었다.
안정적인 급여를 원하는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안된다며 딱 달라 거절했기 때문이다.
첫 아이가 태어난 지 5개월 남짓 했을 무렵,
그가 여전히 드라마 미술회사에서 차장으로 일을 하던 때였다.
가평 세트장을 다녀오던 남편의 차를 졸음운전을 한 공항버스가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가 났다.
뒤에 오던 공항버스에 받쳐 앞에 가던 트럭에 처박히는 그 찰나의 순간.
나 죽는구나 싶었던 남편의 눈 앞에 지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상영되었다 했다.
그때만 해도 내 남편은 결혼하고 애만 낳았을 뿐, 자기 멋대로 사는 아주 이기적이고 못된 남자였다.
그런데 목숨의 위협이 느껴진 그제야 가족이 떠올랐다했다.
다행히도 그 가족이 제 부모형제가 아닌 집에서 저만 목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아내인 나와 딸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정말 미치도록 후회를 했단다.
아내와 아이에게 남편이나 아빠로서 잘 해주기는 커녕 기본조차 해주지 않았던 자신의 지난 과오를.
구입가가 이천만원대였던 차의 수리비만 천만원 가까이 나올 정도로 차는 엉망이 되었다.
그렇지만 조상님이 보우하사 천만 다행히도 남편은 피 한방울도 나지 않았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몸은 괜찮다는 소리에 한시름을 덜었나 했지만,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자 그는 교통사고 후유증인지 혼자 일어나지도 못했다.
남편은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사고 다음 날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입원 기간동안 매일 나는 10킬로가 넘는 꽉 막힌 서부간선도로를
익숙지 않은 렌터카로 다니며 반찬 배달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은 한 번 먹은 음식을 두 번 먹지 않는다.
어머님이 잘못 키우셨거나 매끼 다른 반찬 먹여가며 곱게 키운 게 아니라
영화를 찍으며 이곳 저곳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매 끼 밖엣 음식을 먹다 보니 입이 그렇게 변한 거였다.
나이롱 환자를 극진히 간호하는 내 등뒤에는 카시트에 앉히기만 하면 똥을 싸는 딸아이도 늘 함께였다.
지극정성으로 남편의 간호 아닌 간호를 하는 나와
엉덩이에 똥이 묻어 발진까지 나며 아빠인 제게로 오는 딸을 보며
그제야 남편은 자신의 삶의 이유가 가족임을 인지했다.
그리고 때 마침 병문안을 온 선배의 권유로 남편은 인테리어 일로 전업하게 되었다.
-이 선배는 남편을 영화판으로도 불러들였고, 인테리어 판으로도 불러들인 아주 대단한 냥반이다.
인테리어.
단 한번도 생각지 않았던 업종으로 변경하며 그의 고생길은 다시금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