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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Sep 13. 2023

건축도장기능사 도전의 이유 3

별 걸 다 하는 중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의 일●       

       

처음 그가 영화판에서 드라마판 그리고 인테리어판으로 전향을 할 때만 해도      

그는 달라진 직종에 업무 환경 또한 달라도 뭔가 다를 줄 알고 기대를 했더란다.    

           

적어도 인테리어 일을 하면 몇 달씩 지방이나 외국에 가서 집을 비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단다.  

   

그러면 이전보다 훨씬 더 가정에 집중하고 충실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인테리어를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웬걸.      

태생이 역마살이 낀 사람인지 남편은 직종을 바꾸어도 한 곳에 머물지 못했다.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도 현장이 전국구다보니 정말 심하게 밖으로 돌았다.     


가까이 경기도를 시작해 멀리 충청도 경상도를 모두 아우르며 다녔다.     


물 건너로는 제주에도 불려가고 일본에도 불려갔다.     


또 한동안은 중국에 가서 관광비자 한 달 만기를 꽉 채우고 돌아오자마자 다다음날 다시 떠나길 반복했다.               

드라마판은 그래도 영화판과 연결은 되어있어 좀 덜했는데,     

멈추지 않던 열정과 보람으로 하던 영상미술 일을 버리고 선택한 인테리어 일을      

처음 시작하고 배울 때 그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정말 많이 힘들어 했다.      

         

처음으로 원형 탈모도 생기고 살도 쏙 빠지고 사람이 피폐해져갔다.     

아내와 딸을 위한 책임감으로 겨우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새장 안에 살 수 없는 야생인 그의 날개를 내가 꺾어버린 것 같아서.



                                                    

영화 미술을 할 때에도 남편은 캐드가 아닌 스케치업과 랜더링을 주로 담당했었다.      

미술 감독까지 했던 남편의 주 전공이 공간 디자인이다.      


그렇다보니 선배가 인테리어라고 꼬시긴 했어도

남편이 시작한 인테리어 일은 디자인 차별화가 중시되는 스튜디오 공사를 많이 했다.  

    

대한민국 웨딩 1번가 강남에서 내놔라 하는 스튜디오부터

지방과 외국까지 나가 새로운 디자인을 하고 그것을 실체화시키는 일을 했다.      


중국도 동서남북 메뚜기가 뛰듯 이곳저곳을 다니며 일했다.      

          

그 후로도 남편은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벽화도 그리고 간지도 하고.     

간간이 들어오는 드라마와 영화 작업에도 지원으로 참여 했다.   

  

처자식과 살아보려고 일이 있으면 가리지 않고 참 열심히 했다.     

 

그런 그를 집에서 딸과 함께 나는 마냥 기다렸다.     


맨날 기다리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남편의 일에는 문외한이라도 그래도 그가 실력이 있으니 이리 저리 불려다니는 것 같은데.      

영화판의 일이 없던 것도 아니었을텐데, 그가 그 바닥을 떠날 정도로 일이 성사되지 못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를 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했다.       

        

아주 나중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오더를 딴 대가로 뒷돈 먹이는 일을 못해서 라는 걸 알았다.     


나한테만 싸바싸바 딸랑딸랑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일도 대쪽 같이 했었다.     


양반집안이라 뻐기는 종갓집 맏딸로 태어났어도

일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다 내려놓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던 영업계의 꿈나무,

해외 영업 담당이었던 나에게는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런 짓은 절대 할 수 없다며 거절했던,

과도하게 꼿꼿했던 내 남편은 그렇게 영화나 드라마 일과 스스로 멀어져 간 것이었다.          


조금 더 빨리 그 사정을 알았더라면 나의 내조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그는 여전히 뽀찌라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 융통성 없는 사람과 살며 나는 여전히 용을 쓰며 개고생을 하는 중이고.



몇 년을 그렇게 정확한 주 종목 없이 집 주소에 사업자등록을 한 채 이것 저것 들어오는 일이란 일은 모두 다 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남편은 완벽하게 인테리어업자로 자립을 하게 됐다.    

 

유명한 프랜차이즈뿐만 아니라 지금도 인스타 핫플로 뜨는 곳의 카페 공사를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법인 사업자에게 맡겼으면 몇 배가 나왔을 일을      

개인사업자에다 혼자 작업하는 남편은 빠르고 정확하고 저렴하게 해줄 수 있어 고객의 만족이 컸다.

    

특히 자신의 머릿속의 구상을 실체화 시킨 남편의 능력을 크게 평가해주어 몇 년간 함께 일을 했다.               

그렇게 완벽히 인테리어 업자가 된 후 남편의 업무 분야는 더 확장되었다.     


인테리어라고 해서 건물 안만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건축사를 사 증축도 하고 옹벽이나 세트 가설도 했다.     


리조트와 호텔 체인 건축 현장에도 참여를 했고 복합 전시도 맡아서 했다.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와 많은 것을 경험했다.               


물론 그러다가 몇 억이나 되는 돈을 받지 못해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먹기도 했다.   

  

세금은 다 냈고, 카드 값도 다 냈지만 클라이언트가 파산을 해버려 하청업체들에게 줘야 할 돈을 못주었다.      

그 바람에 남편은 지금 신용불량자에 이혼남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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