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딱좋은나 Oct 14. 2023

아직은 안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13년된 차를 애정하느라 폐차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사 2급 취득을 위해 시작했던 학점 은행제 중 한 학기, 

7 과목의 공부가 지난달로 끝이 났다.

다음 수업까지 텀이 길어 이사와 맞물린 김에 실습을 먼저 하자 싶어 

10월 개강반으로 실습 한 과목만 신청했다.

10월학기는 이번 주에 개강을 했고, 

실습 필수 요건 중 세 번의 대면교육을 위해 구로까지 가야했다.


집에서 거리는 약 20킬로미터.

토요일 아침 이른 시간부터 집을 떠나야 해,

전날 새벽까지 아이들이 먹을 미역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어두고 밥을 새로 해두었다.


나는 진작 씻고 외출 준비를 하고 아침식사까지 마쳤지만,

어젯밤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논 아이들은 여전히 비몽사몽 중이었다.

믿을 구석인 남편까지 오늘은 아침부터 일을 나가야해서 

잠이 덜 깬 딸들에게 몇 번이고 당부를 했다.


밥을 꼭 챙겨먹어라, 동생 잘 돌봐라,

엄마가 돌아오면 바로 경기이룸학교에 가야하니 준비해라.


어제밤부터 몇 번이나 한 당부가 잔소리처럼 느껴졌는지,

예삐는 결국 잠결에 내게 짜증을 내며 빨리 가기나 하라고 했다.


자는 아이 셋을 두고 나가자니 가볍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주차장으로 갔다.


남편도 나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와 큰 차에 올랐고, 

나는 올해로 13살된 우리 부부의 첫 공동재산인 토비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았는데 오늘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 차를 탄 이 후 큰 차에 받히는 사고가 두 번이나 났던 남편도 

피 한방울 보지 않고 멀쩡히 살아 돌아왔고,

우리 가족을 24만킬로가 넘도록 잘 태우고 다녀주는 걸 보니

무언가 나를 지켜주는 힘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 차 토비도 그 힘을 가진 존재 중 하나인 것 같다라고.


"토비야, 오늘도 잘 부탁해."


평소 같으면 나올 생각은 커녕 창문도 한 번 열어보지 않을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선선하다 못해 스산한 아침,

차를 몰아 아파트를 벗어나며 나지막히 말했다.


꼭 오늘 날씨가 딱 건축도장기능사 시험을 보러 가던 날과 비슷하다.

그 때도 역전을 날렸는데, 오늘도 어쩐지 감이 좋다.


네비게이션 위에 추억의 싸이월드 BGM을 틀어놓고 기분 좋게 길 위를 달렸다.







초행길이지만 막히지 않은 덕에 빠르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수업도 잘 마쳤다. 

그리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예전에 목동에 살 때 맞은 편 집에 살던 이웃이 

막내에게 옷을 물려준다하여 잠시 들르기로 해 차를 목동으로 향했다.


목동 깨비시장을 네비게이션에 입력해두고 가는 길, 갑자기 차가 이상하다.


액셀레이터를 밟아도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웅. 웅. RPM 오르는 소리만 나지 가속은 커녕 바퀴가 움직이지 않았다. 


급하게 비상등을 켜고 기어를 P에 옮기고 사이드까지 야무지게 당긴 후 시동을 껐다.

그 후 다시금 키를 돌려 시동을 걸어봤지만 몇 개의 경고등이 뜨며 차가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까처럼 망부석은 아니고, 천천히이긴 하지만 차가 움직였다.

비록 가속은 되지 않고 꿀렁여서 마음에 불안함은 가득 찼지만 일단 바퀴가 굴러는 갔다.


일차선에 있던 차를 천천히 몰아 갓길에 세웠다.

차가 이상해서 두렵고 무섭고 걱정되는 마음보다 

비도 오는데 왜 이러나 부가세 내느라 돈 떨어진 달인데 또 돈 깨지게 생겼네,

정말 고루고루 가지가지 한다며 뒤죽박죽이 된 생각에 정신이 사나워졌다. 

깜빡 깜빡 주기적으로 울리는 비상등 소리에서 되려 안정감이 찾아진다.


아!!!!!!!!!!!!!!!!!!!!!!!!!!!


내가 차를 멈춰 세운 이 곳은 비가 와 정체가 가중된 서부간선도로 한 가운데이다.







2010년 신차를 구입한 이후부터 매 5000km마다 엔진오일을 갈아주었고 

비싸도 꼼수 부리지 않고 제조사 정비센터에서만 차량관리를 해왔다. 

엔진오일뿐만 아니라 밋션오일이든 타임벨트 등 소모품 교체는 제 때 했고 모든 정비내역이 남아있다. 

애지중지 관리한 자식 같은 차인데 이렇게 갑자기 문제가 생길 리 없다.

절대로, 그러면 안된다. 정말!



이사를 다니는 동안 몇 번이고 바꾼 정비소의 정비사들도 

우리 토비의 엔진은 워낙 관리가 잘 되어 아직 몇 년은 충분히 더 탈 수 있을 거라 하셨다.

늙고 삭아서 교체해야하는 호스나 벨트같은 소모품은 몰라도

엔진에 이상이 있으면 그게 이상한 일인 것이라 생각하고 그간 마음을 너무 놓았던 걸까.


역시 앞 일 놓고는 장담하는 것 아니라더니,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제는 토비가 늙고 지치고 힘들어 쉬고 싶어한다는 걸.

내 욕심에 이제껏 끌고 왔지만 이제는 멈추고 싶다는 걸.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이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토비를 보내고 나면 볼트 EUV를 살거야' 

하고 지나치듯 말했던 내 말이 섭섭했던 걸까.


정말로 헤어지자는 듯 잘 가던 토비가 일순간에 멈추었다.







급하게 정비소에 전화를 걸었다.

렉카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애정하는 이 차를 믿고 맡길 곳이다.


제조자 직영 서비스 센터는 토요일이기 때문에 이미 업무를 마쳤다고 한다.

당직 직원은 월요일에 입고 하던지, 직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키를 넣어두라고 했다.


다음으로 자주 가던 바로정비서비스에 전화를 하자 마감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남았지만

무엇보다 안전하게 오는 것이 우선이니 시간에 괘념치 말고 오라고 했다.


나를 알고 토비를 알고 토비에 대한 나의 애정을 아는 직원이

나를 걱정하고 토비를 염려하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우리 토비 아직 못보내요. 저 정말 마음의 준비가 안됐어요. 꼭 좀 고쳐주세요."


아빠의 심장수술 때 만큼 내 마음이 간절하고 절박했다.








"얘들아, 토비가 지금 고장나서 경기이룸학교엔 못가겠어.

점심 챙겨먹고 집에서 잘 기다리고 있어."


하는 내 말에 아이들의 통곡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토비야, 죽으면 안돼! 엄마 토비 살려줘! 토비 없으면 안돼! 우리 토비."


이제는 다섯 가족이 타는 큰 차가 생기긴 했지만,

작년까지만해도 우리 집 다섯 식구는 토비를 타고 다녔다.

우리 아이 셋은 태어나서 이날 이 때 껏 유모차보다 더 자주 더 많이 탄 차가 토비이다.

새 차인 하트가 새 차라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토비가 최고라고 하는 아이들이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 모두 토비를 버릴 수 없다며 울었다.

겨우 참고 있는데 아이들 목소리에 결국 내 눈물이 똑 하고 떨어졌다.



"고쳐서 더 타야지. 아직은.

뭐가 문젠데? 내가 갈까?"


갈 곳이 정해졌겠다 보험으로 견인차 출동 접수를 하고 남편에게 알리자, 

일을 하다 말고 당장에 정비소로 뛰쳐 올 기세로 남편 또한 폐차를 거절했다.








다행히 출발하면서 전화 드린 시간 안에 도착도 했고 10km 이내라 추가요금도 없었다.

정비소까지 토비를 업어다 주신 렉카기사님도 매우 친절하셨고,

견인 후 정비소에 차를 넣어주시는 고난이도 기술을 보며 감탄했다.


"컴퓨터에 두 가지 이상이 뜨는데, 일단 부품 수급부터 하고 

그 이후에 문제가 해결이 되나 안되나 봐야해요."


주말 오후 퇴근도 못하고 나를 기다리시던 네 분의 직원이 렉카에 달려오는 토비를 맞아주셨다.

그리고 빠르게 단말기를 연결해 확인을 시켜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어, 전조등도 하나 나갔네. 

이참에 내가 월요일에 찬찬히 꼼꼼하게 봐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셔요."


그 정비소를 다닌지 10여년의 세월만큼 믿음이 가는 말씀을 해주신 분은 대표 정비사님이시다.


"견적은 얼마나 나올까요?"


"뭐 얼마나 나오겠어."


그 말에서부터 아직은 폐차하지 말고 고쳐서 더 타도 될 정도의 금액으로 고칠 수 있다는 의미 같아 

우리의 이별을 조금 더 미룰 수 있음에 안도하게 됐다.


얘는 뻗을 애가 아닌데 왜 갑자기 뻗었냐는 말로 걱정도 해주시면서 

급하면 차를 타고 그냥 가도 멈추거나 서지는 않을 거라면서 농도 던져주셨다.

든든한 정비사님들이 있는 곳에 토비를 맡기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정비소에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토비가 연식이 오래됐으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차 바로 세워!"

하고 장거리 운전이 잦은 남편에게 했던 말을 떠올랐다.


다행이다. 

차량이상이 있었어도 사고가 난 것은 아니니까.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비오고 차도 많아 막히는 도로에서 별 일 없이 벗어난 것만도,

때마침 갓길에 세우고 30분동안 렉카 기다리는 동안 아무일 없었던 것도

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남편의 출근길이나 미팅 가는 길에 차가 퍼진 게 아니라서.

나 역시 반드시 출석을 해야하는 대면 수업을 그래도 끝낸 후 차가 퍼진 거라 정말 다행이다.

하마터면 시작도 전에 한 학기를 통째로 날릴 뻔 했는데 말이다.


다행이다.

그래도 나 혼자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이렇게 멈춘 거라.

아이들까지 타고 있었던 거면 정말 여러 사람 고생시킬 뻔 했는데

비도 오고 막히는 도로에서 눈총을 맞은 건 나 혼자만이라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다.

부품만 있다면 아직은 고쳐서 더 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직은 정말로 토비와 어떤 식으로든 이별하고 싶지 않아. 

우리 가족의 애정과 사랑, 추억을 아직은 지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다.

으흐흑.............................


요즘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많이 힘든 내게

무어가 중요한 것인지 일깨워준 이벤트였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오래된 차가 퍼진 것이 되려 다행이다 싶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너무 계획대로 다 잘 하려고 하지 말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이고, 가족이다.

돈은 잃을 때가 있으면 벌 때도 있는 법.

무언가 조금 손해보는 것 같아도 결국 나는 늘 이익을 봐왔다.

알면서도 욕심에 눈이 멀어가고 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언지 잊지 말자.


힘들수록, 버거울수록 조금만 여유를 더 갖고 살자.

억지로라도 말이다.


월요일, 

토비의 상태가 정확하게 진단되는 날 정말로 울게 될지 다시 웃게 될지 모르겠다.

어떠한 결과든 겸허히 받아들이겠노라 다짐하며 오늘의 다행을 행운처럼 귀하게 여기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헌옷을 팔아 돈을 벌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